523화
번개걸음 교수는 너무나도 황당한 말에 자신도 모르게 물어버렸다.
“대체 그리폰을 만났을 때를 대비하는 훈련은 왜 하시오? 규정에 따르면 그리폰은...”
그리폰은 크기나 무게나 모두 일반적인 격구 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는 맹수였다.
그러나 불파드는 진지하게 말했다.
“상대가 키 작고 비쩍 마른 그리폰을 데리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번개걸음 교수는 새삼 자신은 멀쩡한 정상인이라는 걸 느꼈다.
물론 격구를 꽤 좋아하긴 하지만, 정말 격구에 미친 제국 사람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소소하게 좋아하는 편인 것이다.
상대가 키 작고 비쩍 마른 그리폰을 데리고 나올 때를 대비한다니.
...그리고 가장 놀라운 건 저 대비가 꽤 그럴듯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번개걸음 교수 생각에도 격구 선수 중 한 명은 어떻게든 키 작고 비쩍 마른 그리폰을 간신히 규정에 맞춰서 데리고 나올 법도 했다.
변신시켜서 데리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잠깐. 그러면 왜 저렇게?’
번개걸음 교수와 불파드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이 폰리그를 타고 다시 질주하자 골문을 막고 있던 산양은 버티다 못해 비켜버렸다.
선수는 그 모습에 눈물을 터뜨리며 외쳤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먹는 음식을 너한테도 주고, 내가 입는 옷을 너한테도 줬다! 내가 자는 곳도 줬는데!”
-깎...
산양은 주인의 분통을 알았는지 매우 미안해했다.
이한은 그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산양이 사람 먹는 먹이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그 때 관중석에서 불파드가 외쳤다.
“그리폰! 상대는 그리폰입니다! 그리폰이 변신한 말이니, 거기에 맞춰서 생각하십시오. 그리폰을 상대했던 훈련을 기억해내십시오!”
“......”
이한은 순간 상대가 이한을 혼란시키려고 속임수를 쓰나 싶었다.
그리폰을 상대했던 훈련이라니.
‘대체 왜 그런 훈련을?’
“과연! 어쩐지 말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 했더니... 자!”
선수는 산양의 눈을 재빨리 안대로 가렸다. 그리폰과 눈이 마주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그걸 전해 들었는지 재빨리 눈을 가렸다. 살기 넘치는 그리폰의 눈만 피한다면...
-깎!!!!
“아니 왜!”
“아.”
이한은 빈틈을 향해 장대를 휘둘러 공을 날리면서 깨달았다.
“이거 너 때문 아니야?”
생각해보니 이한의 품속에는 바실리스크도 있었다.
몬스터들은 사람이 맡지 못하는 바실리스크의 미약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테니, 저렇게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그러나 이한의 말에도 새끼 바실리스크는 동의하는 대신 꼬리를 흔들며 의아해했다.
영리한 몬스터는 자신의 힘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법.
새끼 바실리스크는 자신의 힘이 아직 볼품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아직 자라지 않은 새끼 몬스터의 냄새에 겁먹는 몬스터라면 어지간히 겁 많은 몬스터일 텐데...?
“고맙다. 너 덕분에 교수님이 행복해하시겠어.”
이한이 일단 고마워하자 새끼 바실리스크는 의아해하면서도 기뻐했다.
“대신 품속 안으로 좀 깊숙이 들어가자. 경기 끝나도 상대방이 모르게.”
-......
* * *
그랑덴 시 격구 클럽 선수들의 분투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탈것의 코, 귀, 눈을 모두 가리고, 주인과의 믿음만으로 어떻게든 진정시킨 다음 점수를 따라붙으려고 애쓴 것이다.
그러나 번개걸음 교수가 이끄는 1학년 학생들은 뛰어난 공격력을 가진 학생을 기용해 역습을 주도하면서 수비 라인을 단단하게 낮춰서 끝까지 틈을 주지 않고 버텼다.
아무리 강한 공격력을 가진 격구 클럽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뒤집는 게 힘들었다...
“...라고 써.”
“오케이.”
앙라고와 클트란은 열심히 깃펜을 놀려가며 기록을 남겼다.
이런 경기 기록과 감상은 의외로 격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잘 팔렸다.
뒤를 지나가던 번개걸음 교수가 기분 좋은 감정을 숨기고 한 마디 했다.
“탈것의 눈과 귀와 코를 가렸다는 문단은 지워라. 읽는 사람들이 의아해 할 테니까.”
“아하! 감사합니다.”
그랑덴 시 격구 클럽 선수들의 찬사를 넘치도록 들은 번개걸음 교수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상태였다.
-정말 놀랐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전술이 실로 놀라웠습니다!
-내년 에인로가드 격구 클럽의 결과가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저희는 그리폰을 상대하는 훈련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폰을 한 번 길들여보는 건 어때?
“오늘 격구 클럽 선수들에게 받은 은화는 금고지기한테 맡아놓으라고 하마. 내년에 너희들이 연구 신청할 때 지원비로 써라.”
“감사합니다, 교수님!”
학생들도 승리가 기뻤는지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옆에서 근육통에 골골대던 이한은 멈칫했다.
“...어, 잠깐. 친선 경기인데도 은화가 나오나?”
“승자한테 감사하는 의미지. 워다나즈. 너 진짜 공부 그만하고 격구에 관심을 좀 가져야 한다니까.”
앙라고는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경기를 보니 워다나즈 같은 놈을 그냥 마법에 헌신하게 하는 건 제국 격구계에 커다란 손해였다.
워다나즈가 성질 더럽고 난폭한 놈이긴 해도, 제국 격구계를 위해서라면 원한을 잊고 앙라고는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이한은 때리려다가 근육통 때문에 참았다. 그 모습에 앙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도 오늘 경기 때문에 느끼는 게 있었나보군.”
“...이미르그. 이미르그? 저 자식 좀 한 대만 때려줘.”
이한의 부탁에 거인 혼혈 친구는 당황해서 쩔쩔맸다.
번개걸음 교수는 오늘 경기를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참가했던 학생들이 개선해야 할 부분들을 지적한 다음, 이한에게 불러서 말했다.
“참. 선수들이 널 오늘 최고의 선수라고 하더군.”
“예. 감사합니다.”
이한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격구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면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뻐했겠지만 이한은 지금 근육통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 여기 받아라. 영예의 메달이다.”
“그냥 은화를 더 주시면 안 ㄷ...”
이한은 날짜와 장소, 그리고 그랑덴 시 격구 클럽의 문양과 에인로가드의 문양이 새겨진 메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순은으로 되어 있었다.
“통째로 은입니까?”
“응? 그렇지. 이런 명예로운 메달을 가짜로 만들 순 없잖냐.”
이한의 눈가에 뒤늦게 감동의 눈물이 고였다. 그걸 본 번개걸음 교수도 흐뭇해졌다.
‘녀석. 아닌 척해도 오늘 이긴 게 기뻤나보군.’
* * *
도플갱어, 욘라모 교수는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외부를 향한 변환 마법과 변신 마법은 그 원리는 비슷해도 시전해보면 크게 다르다는 게 느껴질 겁니다. 그만큼 마법사 자기 자신을 변환시킨다는 게 쉽지 않지요.”
외부의 물질을 바꾸는 것과, 마법사 자신의 육신을 바꾸는 건 원리가 같아도 그 난이도가 달랐다.
마법사 자기 자신을 바꾸려면 자신의 형체가 바뀌어도 자아(自我)를 잃지 앓을 수 있는 견고한 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끔 불행한 변환 마법사 몇 명이 너무 오랫동안 변신하거나 자주 변신해서 자신을 잃을 때도 있긴 한데...”
욘라모 교수는 학생들이 겁먹은 표정을 짓자 아차 싶었다.
가르시아 교수처럼 사교적인 사람과 달리 욘라모 교수는 아직도 학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겁을 먹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잃고 다른 존재가 되는 것도 꼭 나쁜 건 아니니 말입니다.”
“......”
“......”
학생들은 더 경악했다.
몇몇은 ‘변환 마법 이거 너무 위험하지 않아?’하고 소곤거릴 정도였다.
“변신 마법이 안 맞으면 굳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변신까지는 하지 않는 변환 마법사들도 많으니까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한 군. 와서 학생들이 겁먹지 않게 변신 좀 해보면 어떻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학생들이 점점 더 겁을 먹는 것 같자 욘라모 교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한을 끌어들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은 이한이 변신 마법을 먼저 써준다면 학생들의 두려움도 줄어들 게 분명했다.
“...예? 교수님. 저 변신 마법 쓸 줄 모르는데요.”
“어? 저번에 마법책 받았잖습니까? 아직도 못 익혔어요?”
욘라모 교수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물었다.
저번 변환 마법사들의 축제 때 분명 마법사들이 이한에게 마도서를 하나씩 주려고 줄을 서지 않았던가.
-제 가문의 마도서, <애벌레부터 드래곤까지>를 선물하게 되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다른 사람들은... 아차. 흠흠.
이런 말까지 들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못 익혔습니다.”
이한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사과했다.
욘라모 교수가 자신을 질책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젠장. 억울하다. 익혀야 하는 건지 몰랐는데.’
억울했지만 이한은 반박하는 대신 최대한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 앞에서는 논리적인 반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효과적인 건 오로지 가식적인 표정뿐이었다.
“아, 아니... 탓하는 게 아닌...”
다른 야심찬 교수와 달리 욘라모 교수는 그냥 별 문제 일으키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걸 원했다.
그런 만큼 해골 교장의 직속 제자로 대우받고 있는 학생을 도발해서 원한을 쌓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말실수였는데!
먼 미래에 이한이 교장의 오른팔이 되어 변환 마법 학파의 예산을 깎는 미래를 떠올린 욘라모 교수는 서둘러 달랬다.
“변신 마법이 어렵습니다.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과할 필요도 없지요. 그냥 이한 군이라면 지금쯤 익혔겠지 싶어서...”
“...죄송합니다...”
“......”
더 어두워지는 상대의 표정을 본 욘라모 교수는 울고 싶어졌다.
욘라모 교수는 포기하고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그래서... 변신 마법의 기초를 좀 해볼 겁니다.”
참으로 우울한 분위기에서 본격적인 마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오. 이거 보여? 반짝인다!”
“워다나즈. 이거 봐! 나는 메이킨이다!”
“...당장 안 풀면 네가 잘 때 네 입에 딸꾹질 물약을 부어줄 거야.”
“미, 미안. 메이킨. 가이난도가 따라했을 때 재밌어 보여서...”
“......”
“......”
변신 마법의 기초는 스스로의 머리카락 색이나 손톱의 색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됐다.
비교적 난이도가 쉬우며 실패하더라도 후유증이 훨씬 덜했던 것이다.
친구들은 머리카락의 색을 바꿔가며 기초를 연습했다.
‘음. 돌아가면 가이난도가 두들겨 맞겠군.’
가이난도가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을 따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요네르가 공격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에, 이한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요네르?”
“뭐. 왜.”
“...<하급 금속 친화 물약>을 마시고 주문을 걸면 강철 변환으로 제압하기 더 쉬울 거야.”
요네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한은 속으로 가이난도한테 사과했다.
‘그나저나...’
이한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의아해했다.
보통 이한이 다른 학생들보다 진도가 느린 일은 드물었는데 머리카락 색이 잘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한 군. 마력을 더 써야 해요.”
“아. 그렇습니까?”
이한은 교수의 말을 듣고 그렇겠다 싶었다.
외부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생각해봤을 때, 자기 자신한테 쓰는 마법도 마력을 좀 늘려야 하리라.
“더.” “더.” “더 늘려요.” “더!”
“...죄, 죄송합니다.”
“화, 화낸 거 아닙니다. 알죠?”
‘둘이 뭐하는 거지?’
옆에서 손톱들 위에 ‘가이난도는 죽은목숨임’ 글자를 띄워보려고 연습하던 요네르는 서로 굽신거리는 희한한 사제(師弟)의 모습에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