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친구들은 이한이 자신들을 테스트하는 줄 알고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한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친구들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니까?”
“니가...”
“억지로 시켜서...”
“싸우고 있었지...?”
친구들의 한 서린 대답에 이한은 멈칫했다.
“내가 억지로 시켜서 싸우고 있었다고?”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한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억지로 시킨다고 들을 놈들이냐?”
“......”
“......”
친구들은 억울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억울한 건 저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맞긴 한데...
맞긴 한데...!
“진짜로 이한 네가 시켰어!!”
가이난도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걸 보라고!!”
“?”
이한은 가이난도의 눈 주변에 생긴 푸른 멍을 보고 물었다.
“싸우다가 생긴 건가?”
“아니. 이건 아까 흰 호랑이 탑 놈이 공격 피하다가 나 때린 거야. 그거 말고 여기 옷. 옷이 찢어졌어.”
“그렇군. 싸움이 별로 격렬하진 않았나봐?”
이한의 말에 학생들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니다!”
“저 황자 새끼가 운이 좋았던 거지!”
“지금 붕대 안 보이냐!”
뜨거운 외침에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알겠다. 알겠어. 잠... 윽.”
이한은 뒤늦게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몽유병 때 있었던 일을 뒤늦게 떠올리는 것처럼 끊겼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감각이 몰려왔다.
수상쩍은 샘물을 마시고, 갑자기 온 정신이 확신감으로 가득차고, 친구들을 불러서 여기로 달려오고...
“허. 내가 왜 그랬지?”
“......”
“......”
학생들 중 몇몇은 욕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욕을 했다가 아까의 워다나즈가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으니까.
요네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한. 괜찮아?”
“그래. 지속시간이 완전히 끝난 모양이야. 미래를 안다는 게 확실히 위험하긴 하군...”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보는 건 역시 달랐다.
한 번 미래에 홀려보고 나니, 그 맹목적인 감각이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가장 합리적인 미래를 향해 최적의 경로로 움직이는 게 뭐 그리 잘못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주변 친구들이 붕대와 부목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미래를 예지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 맞는 것 같다. 워다나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마법사는 더욱 더 겸손할 필요가 있겠어.”
평소에 마법에 별 관심도 없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길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예지 마법에 대한 두려움은 확실히 생긴 모양이었다.
요네르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보면...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했잖아! 그 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메이킨. 나 발목이 부러졌는데.”
“메이킨. 나 아까부터 목이 옆으로 안 돌아가.”
친구들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요네르가 앞을 가리켰다.
“다들 뒤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강한 적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선배들이 남겨놓은 보물들이 있다잖아.”
“확실히...”
부상에 신음하던 학생들도 또 솔깃해서 넘어갔다.
에인로가드에서 일 년 가까이 보낸 만큼 학생들의 상식도 꽤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발목이 부러지고 목이 삐어서 안 돌아가도 일단 전리품부터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친구들의 분위기가 반전된 걸 깨달은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한에게 슬쩍 속삭였다.
“그런데 안에 뭐가 있는 거야?”
“나도 모르는데.”
“...응?”
“나도 몰라. 안 들어가봤잖아.”
“......”
예지력 강화 이한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조각상을 쓰러뜨리고 지하 통로를 돌파해 선배들이 남긴 걸 찾는 것이다’라고 직감적으로 판단했지만, 약효가 끝난 이한은 그 판단을 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선배들이 먼저 본 시험에 대해 남긴 기록이 있지 않을까?”
“그건... 좀 아쉬울 것 같은데.”
“뭐? 그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이한은 요네르의 발언에 경악했다.
학생에게 공부와 관련된 정보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기 있으면 좋겠다. 돼지고기.”
“난 술이 좋겠는데.”
“그럼 술에 절인 돼지고기?”
“아냐. 멍청이들아. 고기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잖아. 단 게 최고야! 케이크지.”
“황자 넌 아까 낮에도 사탕 먹었잖아?”
“아닌데?”
“아냐. 먹었어. 우리 앞에서 흔들면서 자랑했잖아.”
“...아닌데?”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건 쟤네들이 이상한 거지.”
‘이한 너도 좀 이상한 편이야...’
요네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고생한 친구를 위해 속으로만 삼켰다.
* * *
끼이익-
다행히 조각상이 사라진 뒤로는 별다른 함정이 없었다.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배들의 창고로 쓰였던 만큼 커다란 지하 공간은 건조한 먼지 냄새가 났다.
“바람이여...”
황녀는 바람을 불러와 먼지를 치웠다. 옆에 있던 가이난도는 콜록이며 아덴아르트를 노려보았다.
“선반부터 확인해.”
“잠깐. 함정 조심하고.”
살코의 말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되물었다.
“어떤 마법으로 확인해야 좋지?”
“잠시만 기다려봐라.”
든든한 리더의 대답에 학생들은 존중의 시선을 던졌다.
리더가 가져야 하는 자질 중 하나는 바로 능력.
난관에 맞서서 바로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만이 리더가 될 자격이 있었다.
“워다나즈. 저기 선반에 마력이 느껴지나?”
“딱히 안 느껴지는데?”
“음. 고맙다.”
살코는 돌아오더니 친구들에게 말했다.
“함정 없다는군.”
“......”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선반에 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이건...
유능한 게 맞...나?
“으음.”
이한은 실망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깥 선반에도 있었던 선배들이 담근 술 몇 병과, 이미 기간이 지나버린 물약들 몇 개. 그리고 낙서나 노트 조금.
미친 해골을 쓰러뜨리기 위한 대계가 곧 완성될...
큭큭큭... 우리가 꾸미고 있는 걸 절대 상상하지도 못할 것...
‘영양가가 없잖아.’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한이 원하는 건 곧 있을 여러 강의의 시험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였지 이런 한탄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한동안 사람들이 쓰지 않은 창고에 쓸만한 게 있을 확률은 원래 낮았으니까.
하지만 조각상과 목숨 건 결투를 하고 들어온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적어도 바깥보다는 더 쓸만한 게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
발걸음을 옮기던 이한은 창고의 안쪽만 유난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먼지 쌓인 공간과 달리, 이쪽은 각종 마법진으로 보호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지?’
이한은 의아해하며 안쪽을 확인했다.
먼지를 막는 마법진부터 시작해서 각종 결계들이 안쪽 공간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처음 보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아티팩트였다.
사람 키를 가볍게 넘어가는 둥근 모양의 아티팩트는 마치 얼기설기 잡동사니를 엮어서 만든 관문처럼 보였다.
‘무슨... 아티팩트지?’
-9/7
-아티팩트가 도저히 작동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졸업하기 전에 이걸 완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걸 물려주신 선배한테 면목이 없다.
-9/13
-미친 해골의 창고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오리하르콘 걸쇠가 구동부의 폐쇄 문제를 해결해줬다! 하하! 두고 보라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서 미친 해골의 낯짝에 대고 성공했다고 말해줄 테니까!
-9/15
-나는 에인로가드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쓰레기다.
-9/18
-친구들과 함께 미친 해골의 브랜디를 좀 나눠 마셨더니 기운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에인로가드. 빌어먹을 마법. 내가 벌써 황금 학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무쇠대가리였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정말 이걸 완성시킬 수 있을까?
-9/22
-공간 마법은 제국 마법의 역병 같은 존재다. 애초에 이런 걸 연구해서는 안 됐다.
-10/2
-관련 마법식을 완성했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마력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여기서 어떻게 더 마력량을 줄인단 말인가? 부족한 마력량을 어디서 구해오지? 선조님한테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10/25
-3주일 동안 고생한 게 모두 허사가 됐다. 베히모스의 심장으로도 마력량은 충족시킬 수 없었다. 아, 미친 해골처럼 에인로가드의 모든 마력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면!
-11/10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친구들과 같이 미친 해골의 창고를 하나 불태우니 위로가 좀 됐다. 어쩌면 우리도 마법이 많이 늘은 만큼, 다같이 힘을 모으면 미친 해골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17
-제기랄. 더 지독한 징벌방이 있었다니. 미친 해골한테 괜히 덤볐다.
-11/20
-차원 관문 아티팩트를 부수려다가 말았다. 역시 선배한테 물려받은 걸 부술 순 없었다. 가동이 불가능한 쓰레기지만 망가지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놓았다.
만약 후배 중에 이 아티팩트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물론 부수겠지. 나도 부숴서 필요한 걸 챙겼으니까. 하지만 이건 대대로 물려받아서 완성시킨 정말 대단한 아티팩트다...
“...?!!!!”
옆에 꽂힌 일지를 다 읽은 이한은 깜짝 놀랐다.
‘차원 관문... 아티팩트라고??’
마법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의 학문이라는 착각은 마법을 3개월만 배워도 금세 사라졌다.
마법은 현실보다 더 지독한 규칙과 이론으로 굴러가는 학문이었지 규칙과 질서를 무시하는 지름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알게 해주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공간 이동이었다.
시공간 마법은 제국 내에서 학파가 만들어지지 않을 정도로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했고, 공간 이동은 그 중 대표적인 마법인 만큼 더더욱 살벌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당장 한 걸음 앞에 물질을 이동시키는 마법만 해도 평범한 마법사가 시전했다가는 대번에 뇌가 박살나고 혈관이 파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난이도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대상을 늘릴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그런 만큼 차원 관문 아티팩트라면 그냥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말해도 별로 틀리지 않았다.
‘어쩐지 금세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해 보인다 했다.’
왜 아티팩트를 이렇게 잡동사니를 얼기설기 엮은 것처럼 만들었나 했더니, 필요한 마력을 충족시키고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발악이었던 모양이다.
한 번 시전하고 박살날 내구도라도 일단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전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발악에도 불구하고 아티팩트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한은 이 아티팩트에서 느껴지는 집념에 솔직히 전율했다.
‘...학교 밖으로 도망치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아티팩트의 설계나 기록을 보면 애초에 목적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냥 학교를 탈출하는 게 우선적인 목표였다.
그런 거라면 다른 방법이 많았을 텐데, 굳이 이런 방법을 고집했다는 게 참으로 마법사다웠다.
‘이해가 간다.’
이한은 선배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처음에야 가볍게 시작했어도 조금씩 완성되고, 또 그걸 물려받고, 도중에 해골 교장이 ‘그런 게 가능은 하겠냐’하고 비웃어주기도 하고...
시간이 길어지면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기도 하는 법.
잠깐 감상에 잠겨있던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해체해야겠군.’
선배가 남긴 것처럼, 이 가동 안 되는 아티팩트는 귀중한 재료가 많았다.
그냥 내버려두는 건 사치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
“????”
순간 아티팩트에서 나는 거대한 굉음에 창고 안에 있던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