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친구들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이한은 친구들의 격렬한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왜?”
“왜냐니... 안 된다면 안 돼!”
닐리아는 손을 휘저으며 예지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다.
가이난도도 동의했다.
“이한. 예지 잘못 하다가 인생 망한 마법사들이 많대. 그런 물약에 의존하면 안 돼.”
“너 예지력 물약 완성되면 시험 전에 달라고 했잖아?”
가이난도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이한은 연금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저런 비전문가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었으니까.
“안 돼.”
“안 됩니다.”
“......”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기껏 만들었는데.’
“워다나즈. 난 조금 생각이 다르다.”
“맞아. 자주 마신다면 위험할 수 있겠지만, 가끔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꽤 좋지 않겠나?”
“고맙... 아니.”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살짝 광기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하자 이한은 멈칫했다.
‘이 자식들 눈빛이 무서운데.’
“왜 그러지? 워다나즈? 지금이라도 갖고 올까?”
“아, 아니. 아직 완성도 안 됐다.”
* * *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심화>를 가르치는 알펜 나이튼 교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원래 주말이 가까워지면 학생들이 산만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좀 산만했던 것이다.
“다들 조용히 하게.”
“그러니까 밖에 나가게 되면...”
“아니라니까. 불을 지르는 건 하책이야.”
“하지만 언제 불을 질러보겠어?”
언제나 말을 잘 듣던 학생들의 반항에, 노교수는 실망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다들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강의 대신 간단한 추가시험을...”
“죄송합니다 교수님!”
“입 안 다무냐 너희!”
시험에 자신 없는 학생들이 재빨리 떠드는 친구들을 제압했다.
몰래 카드 게임을 진행하던 가이난도는 얼굴에 매직 미사일을 맞고 나뒹굴었다.
강의실이 조용해지자 알펜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의를 다시 진행했다.
“마법의 준비 과정에 있어서 정밀한 계산은 필수적이며, 이런 학습이 되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하게. 제군들도 2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마법을 주도해서 연구하게 될 텐데...”
언제나 노교수가 말하는 것이었지만,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만이 마법이 아니었다.
시약을 준비하고 마법진을 작성하고 마력의 흐름을 계산하는 것.
이런 밑작업을 할 수 없는 마법사는 대성할 수 없었다.
“오늘 공부할 청사진은 그 유명한 가니스탈라스 성의 성문일세. <세 마법사의 기적>이라고도 불리지. 워낙 유명한 성문이라 다들 알고 있겠지만...”
가이난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왜 세 마법사의 기적이에요?”
노교수는 제자의 한심한 질문에도 화를 내지 않고 품위 있게 설명해줬다.
“가니스탈라스 성주의 금고는 그 당시 연달아 터진 반란과 습격에 완전히 비어 있었지. 그래서 성문을 새로 지을 때도 평소의 예산과 비교하면 1/10도 안 되는 금화를 내놓았지.”
쾅!
이한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격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
“그... 그렇게 화낼 일이야?”
가이난도는 친구가 평소 보여주지 않는 모습에 당황했다.
그러나 알펜 교수는 이한의 격분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화낼 일이 맞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지. 주변의 다른 이들이 성주를 도와줬다면 훨씬 더 빨리 끝났을 일인데... 여하튼, 성의 세 마법사는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완성시켰네.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 자. 오늘 공부할 청사진은 바로 그런 성문의 청사진일세.”
알펜 교수의 역사 이야기에 학생들은 흥미롭게 설계도를 받아들였다.
물론 이한은 떨떠름했다.
‘아니 이걸 미담처럼?’
성주가 예산을 1/10으로 깎았는데 마법사들이 피와 땀과 지혜로 어떻게든 완성시켰으니 너희들도 그걸 보고 배워라 아닌가.
얼핏 들으면 미담처럼 들렸지만 이한은 이런 미담의 구조에 숨은 사악함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언제나 뛰어난 앞사람이 평범한 뒷사람들을 악의 없이 괴롭히는 것이다.
세 마법사들이 예산의 1/10으로 성문을 완성시켰으면 ‘아 예산의 1/10밖에 주지 못했던 그 당시 상황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반성합시다’해야지 ‘우리도 저 지혜를 배워볼까요’라니.
이한은 속으로 계속 투덜대며 깃펜을 움직였다.
“워다나즈 군.”
“!”
노교수의 부름에 이한은 순간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줄 알았다.
“예?”
“워다나즈 군은 그걸 볼 필요 없네.”
“아, 아니... 어째서입니까? 저는 가니스탈라스의 세 마법사가 보여준 기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찔린 이한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빠르게 둘러댔다.
그 모습에 알펜 교수는 흐뭇해했다.
예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사치스럽게 시약을 낭비하는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대국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감동적인 생각이군... 하지만 괜찮네.”
“어째서죠?”
“그야 워다나즈 군은 중간고사 때 이미 본 시험 내용이니까.”
“......”
“......”
이한뿐만 아니라 옆에서 청사진 그리면서 계산하고 있던 요네르도 어이가 없어서 깃펜을 놓쳐버렸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 그렇군요.”
경악해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이한은 확실히 프로다웠다.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의 자세를 보였다.
아직도 중간고사 때 혼자 다른 시험을 본 걸 떠올리면 교수가 미친놈 같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은 미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원래 교수의 특권이지.’
“따라오게.”
“예.”
친구들이 청사진을 공부하는 동안 이한은 알펜 교수의 뒤를 따라 강의실을 나섰다.
에인로가드의 본관 창문 밖으로 차가운 겨울 하늘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눈 오면 교수님한테 던져도 되나?’
끼익-
알펜 교수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이한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눈덩이를 어떻게 던질까 고민하고 있던 이한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 방은 노교수가 평소 쓰던 방과 달랐다. 안락한 가구나 생활감이 느껴지는 잡동사니 대신, 커다란 통신용 아티팩트 하나만 자리잡고 있었다.
거울처럼 생긴 아티팩트는 이미 해골 교장의 방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오고닌에게 마법을 배울 때 저런 아티팩트로 대화했던 것이다.
지지직-
-나이튼 행정관 각하.
거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알펜 교수에게 인사했다. 노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이제 행정관이 아닐세. 교수라고 부르게.”
-아. 죄송합니다.
‘뭐하는 사람들이지?’
이한은 흥미로워하며 거울 너머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알펜 교수가 왜 이 사람들과 이한을 연결시킨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들었네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겠네. 자네들이 이번 주머니칼 요새의 건설을 수주 받은 게 맞지?”
-예. 맞습니다. 혹시 이 분이...
“그래. 맞네.”
알펜 교수의 대답에 거울 너머의 사람들은 기대와 호기심이 섞인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이한은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건설가들이잖아?’
석공 길드, 목공 길드 등 건축과 관련된 이들이 장비를 하나씩 차고 거울 너머 서있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영광이죠! 몇학년 학생이십니까? 3학년? 4학년?
거울 너머 사람들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에서 마법사는 언제나 고급 인력이었고, 그 중에서 건축물에 들어갈 마법을 계산해서 완성시킬 수 있는 마법사는 더욱 적었다.
전장을 떠돌아다니며 독학으로 마법을 배웠거나 산 속에서 혼자만의 감각으로 마법을 익힌 마법사는 이런 공동 작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만큼 에인로가드 출신 학생들은 이런 작업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의 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어느 누구든 데려오고 싶어하리라.
노교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1학년일세.”
-......
-...???
사람들은 당황했다.
이한도 당황했다.
“어. 교수님. 제가 하기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참 겸손하기도 하군.”
‘에인로가드 교수들은 왜 다 거절이란 개념을 이해 못하는 걸까?’
교수의 반응에 이한은 씁쓸해했다.
왜 매번 이한이 거절해도 겸손하다고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거절하는 걸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워다나즈 군은 도전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네.”
“어째서 그런 판단을?”
“중간고사 때 답안지를 내가 직접 봤지 않나.”
“......”
이한은 말문이 턱 막혔다.
상대가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행정관 각... 아니, 교수님. 정말 괜찮은 건가요?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지. 다들 날 믿어주게.”
“아니...”
노교수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름을 걸자 이한은 매우 압박감을 느꼈다.
저러다가 이한이 실수라도 하면 어쩌라고 저런단 말인가?
-으음. 각하, 아니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런데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1학년이 이런 건설에 참가할 수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보통 3학년은 되어야 맡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네. 하지만 원래 에인로가드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지 않나. 우리가 아마 착각한 모양이야.
-하긴 저번에는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식사도 자기 힘으로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는 헛소문도 있었었죠?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워낙 볼 일이 적으니 그런 소문이 도나봐요.
“......”
이한은 우울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슬픈 일이었다.
“교수님. 제가 정확히 이 요새 건설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 겁니까?”
“음. 아무래도 마법에 관한 계산을 주로 맡게 될 걸세.”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보통 아티팩트들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이 아티팩트들의 마력량을 계산하고, 그만큼 공급 가능한 마력원을 확보하고, 아티팩트들이 서로 오작동 일으키지 않게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마법사의 일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계속 계산을 해야 하는 지독한 일이었다.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군.’
“...제가 제한시간 내에 다 할 수 있을까요?”
“음... 기말고사 때까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네만.”
교수의 말을 듣던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기말고사 때까지라니요? 기말고사 전에 끝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워다나즈 군. 무슨 농담을... 허허. 당연히 이런 일을 맡게 된 이상 기말고사를 대체해서 하는 거지.”
노교수는 이한의 말에 웃었다.
아무리 자신 있어도 이런 규모의 일을 기말고사 전에 끝내고 기말고사를 또 보려고 하다니.
과연 천재다운 자신감이었다.
물론 알펜 교수는 교수로서 책임감 있게 제자를 무리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기말고사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사실에 이한은 살짝 안도했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젠장. 좋아할 일이 아닌데.’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이유는 이미 이한이 중간고사 때 기말고사 범위를 넘어서 시험을 봤기 때문이었다.
알펜 교수에게 전혀 고마워 할 필요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 금화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다음 독수리 때 보내주면 고맙겠네.”
“무슨 금화입니까?”
이한의 질문에 알펜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외부의 의뢰를 맡았으니 보수를 받아야지. 워다나즈 군이 내년 마법을 연구할 때 도움이 될 걸세.”
“...요새 서류 좀 주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