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강의가 끝나고, 다들 곧 올 주말을 기대하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이한은 쉴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볼라디 교수의 과제인 <워다나즈의 수옥탄과 그 기초 원리에 대하여>와 <수옥탄 마법의 한계와 그 발전 방향성에 대하여>도 써야 하는데 알펜 교수의 외부 과제까지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남은 일은 주말에 해야지’하고 미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친구들하고 단체로 해골 교장의 별장으로 외출하려면 주말을 모두 써도 모자랐으니까.
“워다나즈 님. 저희 아글타콰 님을 기릴 겸 호수로 낚시나 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안하군. 샤루칼 사제. 써야 할 책이 있어서.”
상어 수인 사제는 아쉬워하며 낚싯대를 들고 떠나갔다.
“워다나즈 님. 저희 플레맹 님을 기릴 겸 버섯을 캐러 가지 않으시겠어요? 꿀빵버섯 군락을 찾았거든요. 다른 분들이 찾기 전에 서둘러 가는 게 좋겠어요. ...물론 다른 분들이 찾으신다면 그건 그것대로 플레맹 님의 뜻이긴 하지만요!”
“미안하군. 시아나 사제. 써야 할 보고서가 있어서.”
시아나 사제는 아쉬워하며 바구니를 들고 떠나갔다.
“워다나즈 님.”
“미안하군. 티질링 사제. 해치워야 할 교수가... 앗.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해치워야 할 문제가 있어서.”
이한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변 낙서를 종이로 덮었다. ‘교수를 생매장하는 101가지 방법’같은 낙서를 티질링한테 보여줘서 좋을 게 없었다.
“방금 분명...”
“잘못 본 거겠지. 하여간 지금 바빠서 나가는 건 무리야.”
“나가자고 할 생각 없었습니다만...?”
티질링 사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간식을 내밀었다. 달콤하게 구운 옥수수빵과 양철 잔에 담긴 뜨끈한 코코아였다.
“혹시 다른 사제님들이 나가자고 하셨습니까? 설마 그러시진 않았...”
“그랬는데.”
“...무슨 이유가 있었겠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악마 혼혈 사제는 우아하게 말의 방향을 바꿨다. 이한은 살짝 감탄했다.
“정말 고맙군. 참. 이거 근데 내가 오늘 아침에 구운 옥수수빵 아닌가?”
“아. 네. 양이 많아서 다시 구워왔습니다.”
“잠깐. 이 코코아는 설마 저번에 내가 다들 피곤할 때 마시라고 한 자루씩 줬었던 그건가?”
“저는 굳이 단 걸 마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끓여왔습니다...?”
‘가이난도가 들으면 기겁을 하겠군.’
사람이 굳이 단 걸 마실 필요가 없다니.
가이난도의 지론과 정반대되는 주장이었다.
“사제께서 먼저 먹으면 나도 좀 먹도록 하지. 아니. 애초에 나도 내 식량이 있다니까. 나만큼 물자 많이 갖고 있는 사람도 드문데.”
이한은 어이없어하며 티질링 사제를 타박했다.
사람이 검소한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대충 때우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티질링 사제는 이한의 말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게 있어서 물었다.
“저 타르트 상자는 드시려고 꺼내놓으신 겁니까?”
“응? 아니. 저건 돈 받고 팔 거야. 다른 먹을 거 많은데 뭐하러 저런 비싼 걸로 배를 채우겠어.”
“그럼 저 롤케이크를 드시려고 꺼내놓으신 겁니까?”
“저건 가이난도가 이번 주 안에 과제 다 하면 주기로 한 거라서 가이난도 갖다 줄 건데.”
“...그럼 여기 위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저 빵밖에 없지 않습니까?”
티질링 사제는 딱딱하게 굳은 에인로가드 기본 보급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아니. 난 치즈하고 고기하고 양상추 넣어서 같이 샌드위치로 먹어.”
“그렇습니까? ...잠깐. 안 보이는데요.”
“...원래는 같이 먹어. 오늘은 좀 바빠서...”
“......”
티질링 사제는 ‘그래놓고 나한테 훈계를 하다니’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한은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같이 뭘 좀 들도록 하지. 다른 사제들 좀 불러와주겠나? 기왕 차리는 김에 같이 차려줘야겠군.”
“워다나즈 님은 저희 신전 주교님 같으실 때가 있습니다.”
“앗. 주교님께서 혹시 부유하신가?”
“아니오? 청빈하십니다만.”
이한은 아쉬워했다.
‘잠깐. 그럼 뭐가 비슷하단 거지?’
* * *
이한은 기숙사 휴게실에 있던 사제들과 같이 간단하게 해먹었다.
“샌드위치가 너무 차가운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음. 잠시만. 오늘 남은 재료가...”
이한은 기숙사 휴게실에 있던 사제들과 같이 쌀과 닭고기, 양파와 마늘 등을 냄비에 던져 넣고 기름에 볶아 필라프를 해먹었다.
티질링 사제는 아까 이한이 먹으려던 차갑게 굳은 빵이 생각났는지 빤히 쳐다봤지만,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사람이 바쁘면 가끔 끼니도 거를 수 있는 거지.’
똑똑똑-
“!”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잡고 전투 준비를 했다.
볼라디 교수가 봤다면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거렸을 것이다.
“...그, 그냥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요.”
“그래. 그리고 모든 습격들이 이렇게 시작되지. 누구지? 대답하고 바로 5m 뒤로 물러서라.”
-주인님의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왔습니다.
“10m 뒤로!”
데스 나이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한의 목소리가 더더욱 날카롭고 사나워졌다.
사제들도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바로 그릇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들었다.
“니기소르 사제님. 그건 지팡이가 아니라 숟가락입니다.”
“아차. 미안하오. 맛있어서...”
니기소르 사제는 머쓱해하며 지팡이를 다시 들었다.
그러는 사이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한이 시키는 대로 뒤로 물러난 데스 나이트가 침착하게 말했다.
-학생 여러분들이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만, 정말로 오늘은 아무런 함정도 없습니다.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이한은 물론이고 사제들도 피식 웃었다.
그 반응에 데스 나이트는 살짝 상처받았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야 주인의 후계자인 만큼 성격이 배배 꼬인 것도 이해가 갔지만, 사제들은 너무하지 않은가!
-믿기 힘드시면 확인해보십시오.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한은 샤르칸을 보내고 고나달테스를 보내서 주변을 염탐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물 구슬을 만들어서 데스 나이트 근처에 쏘아보고 각종 공격 마법을 날려보기도 했다.
데스 나이트는 표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눈빛으로 우울한 감정을 드러내며 자기 뼈 위에 튄 얼음 조각을 털어냈다.
-확인 다 하셨습니까?
“아직 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선물을 전하러 왔다고.
데스 나이트는 들고 있는 커다란 나무 궤짝을 흔들었다.
-주인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
이한은 그 궤짝을 보는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저런 사악한 작자 같으니.’
가르시아 교수가 말했던 그 함정이 벌써 찾아온 것이다.
해골 교장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학생을 괴롭히는 수많은 함정 중 하나.
바로 언데드 전사가 숨어 있는 간식 상자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이죠.”
이한이 수긍하자 데스 나이트는 천천히 다가왔다.
데스 나이트가 바로 앞에 멈추자, 이한은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새벽별을 뽑아들고 나무 궤짝을 반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촥!
-...?!!!
“하! 제가 속을 줄 알았습니까!”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궤짝 사이에서 내용물들이 흘러나왔다.
교장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사악한 언데드 전사...가 아니라, 옷이었다.
“???”
-???
이한은 반으로 잘린 외투를 보고 해골 교장이 왜 이런 선물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번 주말에 해골 교장은 제국의 음유시인, 이파두르와 이한을 데리고 같이 외출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의 유명인사를 데리고 나가는 일인데 당연히 대충 입힐 수 없었다.
에인로가드에서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망토나 외투는 사실 누더기와 큰 차이가 없었으니...
“...이런 옷을 저한테 입히려 하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알, 알겠습니다.
데스 나이트는 묘하게 감탄하며 돌아갔다.
역시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그토록 무시무시한 주인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 * *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비싼 옷은 또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구나.
토요일 아침.
인간 모습으로 변신을 마친 해골 교장은 마차 안에서 떽떽댔다.
이한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이파두르 님. 빨리 오십시오.’
음유시인이 오기 전까지는 해골 교장이 계속 투덜댈 것 같았다.
“원래 제가 대귀족 출신이라 품위에 맞지 않는 옷은 잘 못 입습니다.”
에인로가드에서는 잘 입었잖느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방학 때도 너 딱히 차려 입고 다니지 않았...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데 혼자 호화롭게 차려 입을 수는 없었습니다.”
거짓말 같은데. 그냥 트집 잡고 싶었던 거 아니고?
해골 교장은 원래 예정보다 더 비싼 옷을 샀다는 것이 아직도 억울했는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이파두르와 같이 나가는 것인 만큼 제자가 비싼 옷 달라고 징징대도 혼낼 수가 없었다.
이 제자가 그걸 이용해서 일부러 비싼 옷에 취미도 없는데 뜯어낸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파두르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해골 교장은 손수 문을 열어주며 오랜만에 성대를 사용해 말했다.
“아니오. 경. 우리가 일찍 온 거니 신경 쓸 것 없소. 자, 어디로 가보시겠소?”
“괜찮으시다면 필로네 마을로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근처에 노래에 뛰어난 사람들은 다 만나보고 싶으니 말입니다.”
늙은 거북이 수인은 느릿하지만 고집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골 교장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러자 마차의 문이 닫히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교장의 마차 안은 탑의 신입생들이 수십 명 더 들어와도 될 만큼 넓었다. 이파두르는 그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조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편하게 둘러보시오. 안내해드려라.”
데스 나이트가 이파두르를 안내하는 동안, 이한과 해골 교장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서 마차 밖을 쳐다보았다.
“음악 마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진전이 있으셨습니까?”
이한은 침묵도 깰 겸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활기차게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건 이한 같은 아랫사람의 역할이었으니까.
해골 교장은 못 들은 척 마차 밖을 쳐다보았다.
“교장 선생님? 음악 마법...”
“야! 저 밖을 봐라. 이 계절에 나비라니! 생명의 순환이란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더냐!”
“...음악 마법 이야기하기 싫으십니까?”
이한의 말에 해골 교장은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하기 싫다. 이래서 원시 마법이란... 측정할 때마다 달라지는 게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사소한 기분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달라지는데도?”
“하지만 신성 마법도 마법이잖습니까.”
감정 같은 불안정한 요소가 들어가는 마법들은 이미 있었다.
당장 신성 마법이 그런 계열에 들어갔다.
사제들의 믿음이나 컨디션에 따라 그 효과가 꽤나 들쭉날쭉한 것이다.
해골 교장은 이한의 말에 매우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지. 신성 마법이 그래서 마법이 아니란 거다. 네가 뭘 좀 아니 내가 기쁘구나!”
“...신성 마법이 마법이 아니란 게 아니라...”
찰떡 같이 말했는데 개떡 같이 알아듣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나는 미래가 뻔히 보인다. 아마 노래 잘 부르는 놈들 중 몇 놈은 마법 비슷한 걸 쓸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걸 기록해서 학생들에게 따라해 보라고 하면 또 별 볼 일 없을 거다. 원시 마법은 그걸 쓸 줄 아는 마법사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학문으로 보면 낙제나 마찬가지야. 전승이 괜히 끊기는...”
해골 교장이 투덜투덜투덜대는 동안 이한은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저 멀리 빠르게 멀어지는 친구들이 허겁지겁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웅하는 건가?’
왜 저렇게 절박하게 배웅하나 고민하던 이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이번 주말에 해골 교장의 별장을 같이 털러 가기로 했던 것이다.
‘...다음 주에 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