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헹가래가 끝나고, 내려온 이한은 거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도와드려야 할 일이 뭡니까? 혹시 양이 또 도망쳤습니까?”
말이 양이었지 앞에 ‘산맥파괴’가 붙으면 그건 사실 양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산맥파괴양을 직접 본 입장에서 이한은 바실리스크가 다 자라도 산맥파괴양한테는 질 것 같았다.
‘일단 체급 차이부터가 너무 나는데.’
-아니다. 양은 안 도망쳤다.
-와이번을 하나 잡아서 넣어주니까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더라. 심심했던 게 분명하다.
산맥의 지배자이자 공포를 잡아서 넣어줬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여기서 ‘와이번이요?’하고 물음을 던졌다가는 거인들이 구경시켜준다고 끌고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일이 없...”
-따라와라! 마법사한테 보여주고 싶다!
-우! 내 어깨 위에 올릴 거다!
-아니다! 내 어깨 위에 올릴 거다!
“하하. 여러분. 저를 두고 다투시는 건 좋지만 제발저를놓고다투시면안되겠습니까?”
거인들이 다투며 이한을 당기려고 하자 이한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거인식 가위바위보(가위, 바위, 보 중 하나를 내서 서로의 얼굴을 갈기는 놀이였다)에서 이긴 거인이 헤벌쭉 웃으면서 이한을 태우고 걸음을 옮겼다.
-녀석들. 저렇게 친해지다니... 잘 다녀오도록 해라.
“곧 기말고사라는 것도 잊지 말고.”
뒤에서 들리는 이쿠루샤와 볼라디 교수의 말에 이한은 못 들은 척 귀를 막았다.
이한을 태우고 있던 거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귀를 막나?
“원래 듣기 싫은 소리가 있으면 이렇게 귀를 막으면 좋습니다.”
-오오. 앞으로 이쿠루샤가 말하면 귀를 막아야겠다!
* * *
3학년 학생, 모라디 가문의 발파탄은 후회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 있어도 부여 마법 학파 놈하고 같이 동행하는 건 실수였던 것이다.
‘아직도 멀었어, 발파탄! 저번에 검을 뺏길 뻔해놓고 아직도 이렇게 느슨하게 굴다니. 3학년이나 되어가지고!’
발파탄은 자책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같은 3학년 학생 안파곤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냐?”
“닥쳐. 좀. 대체 부여 마법 듣는 놈들은 다 왜 싸가지가 없는 거냐? 선배들이 뭐라고 안 하냐?”
“무슨 소리냐? 내가 가장 예의바른데.”
“......”
발파탄은 그 말에 몸서리쳤다.
안파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더 소름끼쳤던 것이다.
‘부여 마법을 전문적으로 파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사실, 흰 호랑이 탑은 따지고 보면 부여 마법 전공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탑이었다.
시전자나 타인의 육신을 조정하는 강화 마법도 부여 마법에 속했으니까.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면서도 진득하게 부여 마법 자체를 깊게 파고드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강화 마법 응용으로 빠지고, 순수한 부여 마법은 다른 탑 학생들만 주로 선택했던 것이다.
마법이 어려운 것도, 혹은 순수 부여 마법으로 가는 순간 반쯤 아티팩트 장인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도 있겠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상당수는 ‘부여 마법 학파 교수하고 학생들하고 어울리느니 차라리 죽지’라는 설득력 있는 지론을 펼치고 있었다.
발파탄도 그 중 하나였다.
‘미친 교수가 제자를 미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미친 제자가 미친 교수에게 모이는 것인가?’
솔직히 버두스 교수나 버두스 교수 밑에서 아티팩트 만들고 있는 부여 마법 학생이나 발파탄 눈에는 비슷비슷한 놈들이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말을 건 내 잘못이라고 하자고.”
“당연히 네 잘못이지.”
발파탄은 무심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뽑을까?’
아무리 발파탄이 흰 호랑이 탑에서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편이라 하더라도, 부여 마법 학생들이 가진 성질을 긁는 재주는 그걸 뛰어넘었다.
‘참자.’
그러나 발파탄은 참았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굳이 안파곤 같은 놈을 이 산맥의 동행 삼은 것이기도 했고...
“잠깐 쉬자고. 해가 머리 위에 올라오기 전에만 도착하면 되니 아직 시간은 넉넉해.”
“네 계산은 못 믿겠는데.”
‘그냥 진짜 뽑을까?’
안파곤은 지팡이를 휘둘러 방위를 계산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쉬어도 되겠군.”
“......”
“......”
두 학생은 아무 말 없이 앉아서 먹고 마셨다.
안파곤은 투명한 유리병에 든 회복 포션을, 발파탄은 가죽 수통에 담은 적두사자의 생피를 마셨다. 둘 다 회복에 유리한 물건이었다.
발파탄은 힐끗 목적지인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에인로가드의 산맥 봉우리 중에서 오늘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거인의 돌팔매 봉우리였다.
안파곤은 연구에 필요한 봉우리 정상의 음석청(陰石淸)을, 발파탄은 이번에 새로 얻은 가죽의 무두질에 필요한 서리돌나무의 껍질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원래라면 동행할 이유가 없었지만 발파탄은 물어볼 게 있었고 안파곤은 쓸만한 전위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거인이 출몰하는 지역이었으니까.
“음... 그러고 보니 말이다.”
발파탄은 목을 축인 다음 본론을 꺼냈다.
저 짜증나는 부여 마법 놈의 말을 들어줬으니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내가 알기로 부여 마법 듣는 1학년 중에 특이한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이번 축제에서...”
안파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그런데 왜 다른 부여 마법 듣는 놈들은 물어봐도 모르지?”
“내가 말을 안 해줬으니까.”
“......”
‘쓰레기 새끼 아냐 이거...’
발파탄은 경악했다.
쓸만한 후배가 있으면 학파의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주는 게 정상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기분 때문이 아니라, 그 후배를 위해서라도 이름을 널리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미리 어떤 후배인지 알고 호감을 가지는 것과 전혀 모르는 건 그 대우가 달랐다.
“왜 말을 안 해주냐?”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됐다.”
발파탄은 부여 마법 학파에 깊게 들어가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이 자식들하고는 깊게 엮일수록 두통만 올라왔다.
“하여간 그 후배. 맞지? 이번에 칼 들고 미친듯이 날뛰던. 강화 마법을 쓴 건가?”
“모르는데.”
안파곤은 정말로 몰랐다.
아마 후배가 사용한 건 강화 마법이 아니라 흑마법 쪽 아닌가 추측했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애초에 축제가 끝나고 나서 사이 좋게 징벌방에 가기도 했고...
“하. 이 치사한 자식. 그걸 또 숨겨? 좀 알려줘라.”
“모르는 걸 어떻게 알려주지? 혹시 머리통을 탑에 두고 왔나?”
발파탄은 한 번 더 참았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았던 것이다.
“알겠어. 그 후배. 흑마법 학파 놈들한테 물어봤는데 자꾸 말을 아끼더라고. 흑마법도 듣고 있는 거 같은데...”
“맞다.”
“뭐? 흑마법을? 정말 특이하네.”
처음에는 이한이 검술에 뛰어나고 부여 마법에 매우 뛰어나서 그런 위용을 보여준 줄 알았는데, 흑마법 이야기까지 듣자 발파탄은 놀라워했다.
“그 후배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워다나즈 가문이란 소문이 돌더라고. 아니지? 가이난도 아닌가? 찾아보니까 황자라던데?”
“......”
안파곤은 마치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는 것처럼 발파탄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워다나즈 가문과 황족을 착각한단 말인가.
“후... 들어봐라. 먼저,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의 대귀족 가문이다. 마법으로 유명한 대귀족 가문이지만 황족은...”
“...이 자식이 진짜! 누가 그걸 모르겠냐! 후배의 이름이 뭐냐고 묻는 거잖아!”
폭발한 발파탄이 결국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좋게 물어보려고 해도 이 자식의 태도는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그냥 묻어버린 다음 묻자!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대비하고 있었다.”
안파곤은 바로 아티팩트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두터운 역장이 안파곤을 보호했다.
발파탄은 더욱 더 폭발했다.
“어디 한 번 이것도 대비해봐라. 변화해라, 내려쳐라!”
주문이 터지자 발파탄의 손이 갑자기 거대한 괴조의 앞발처럼 변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발톱 끝에 섬뜩한 예기(銳氣)가 서리더니 노련한 검사도 피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서걱!
두터운 역장을 그대로 찢어발기며 앞발이 들어왔다.
그러나 안파곤은 침착하게 다음 아티팩트를 꺼냈다.
에인로가드 3학년쯤 되면 전투 마법 전공이 아니더라도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흐릿한 분신들이 생겨나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퀄리티가 그리 높지 않아 조금만 집중하면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 충분했다.
발파탄은 다시 포효했다.
“거인의 주먹이여, 적을 쳐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이뤄진 거대한 주먹이 안파곤의 분신들이 있는 곳을 덮쳤다.
분신의 정체를 하나하나 구분할 필요 없이 전부 쓸어버리면 된다는, 흰 호랑이 탑 학생다운 전투방식이었다.
와지끈!
안파곤은 그 야만스러움에 질색하며 떨어지는 나뭇가지들을 피했다. 거대한 공격을 갈긴 탓에 주변 나무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거인의 손가락이여...”
“...잠깐, 뒤에! 뒤에를 봐라, 머저리야!”
“추잡한 새끼. 뭐라는 거냐? 일단 두들겨 맞기나 해라!”
“병신머저리야! 뒤를 보란 말이다!”
발파탄은 공격을 대비하면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거대한 거인들이 몽둥이를 끌며 질질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두 3학년 학생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리 에인로가드에서 마법을 수련했고, 밖에 나가면 마법사로 존중받는다지만 거인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둘은 3학년 학생인 만큼 거인이 얼마나 까다로운 존재인지 잘 알았던 것이다.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았다. 괜히 소란을 피우다가 거인이 화라도 내면 정말 귀찮아졌다.
“숨... 숨소리 죽여. 투명. 투명화 물약!”
“만족하냐? 만족해야 할 거다. 네가 나무를 모조리 부숴버려서 들킬 테니까!”
“닥쳐. 거인이고 뭐고 너부터 끝장내기 전에.”
떠드는 사이 거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인은 이한을 보며 물었다.
-여기 나무들 누가 부쉈다. 마법사들 같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교수님들 아닐까요?”
-이 나무들 다시 심고 싶다.
“알겠습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심기 정도면 차라리 쉬운 편에 속했다.
탈출한 양을 찾아서 어떻게든 끌고 오는 것에 비하면 나무 심기 정도면...
-나무 부순 사람 잡고 싶다.
“저런. 교수님들을 잡고 싶으십니까? 쉽지 않을 텐데요.”
이한은 부서진 나무들을 둘러보며 대충 대답했다.
그러나 거인들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나무가 부서진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마법사 도와준다. 우리 찾는다!
‘어?’
어떻게 나무를 심을까 고민하던 이한은 거인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얼마 안 됐다고?’
이 이른 아침에 산맥 높은 곳까지 와서 나무를 부수고 간 사람이 있다니.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무를 잘라서 가져간 것도 아니고... 화풀이인가?’
이한은 순간 해골 교장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나무를 우다다다 부수는 광경을 상상했다.
웃기긴 했지만 교장이나 교수가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건... 날카롭게 잘려나갔군. 부여 마법인가? 이건 거대한 힘으로 친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본 이한은 여기서 마법으로 된 싸움이 있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제 생각에는 여기서...”
사락-
“?”
이한은 쪽지 한 장이 슬며시 손바닥 위로 날아오자 멈칫했다.
-사ㄹㅕ줘 후배
발파탄, 모라디
“......”
진짜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