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저렇게까지 신나할 일인가?’
키르민 교수는 이한과 랫포드가 신나게 상자를 해체하는 걸 보면서 의아해했다.
물론 교수로서는 학생이 강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주고 열정을 보여주는 게 기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재미 없는 내용에 저렇게 뜨거우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교수님. 더 어려운 상자도 있습니까?”
“워다나즈. 혹시 어디 가서 도둑질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키르민 교수는 농담 삼아 말했다.
이한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환상 마법에 대한 학술적인 탐구심입니다.”
“맞... 맞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농담이다. 농담.”
* * *
채찍과 채찍을 좋아하는 몇몇 교수들과 달리 키르민 교수는 채찍과 당근을 선호하는 부드러운 교수였다.
학생들이 재미없고 지겨운 상자들을 붙잡고 씨름했으니 그 다음은 흥미로운 걸 보여줘야 균형이 맞는 법.
“다들 지루한 상자 붙잡고 해제하느라 고생들 많았다.”
“아닙니다. 재밌었습니다.”
이한의 말에 친구들은 뒤에서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앞에서는 노려볼 수 없었으니 뒤에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학년 수석은...!
“그럼 저번에 가르쳐줬던 마법을 이어서 설명해볼까?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예, 교수님!”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루한 분석과 해제가 끝나고 실전에 가까운 강의가 찾아온 것이다.
교수는 학생 한 명을 부르더니 말했다.
“자. 해봐.”
“...굴, 굴절되어라!”
<투사체 굴절> 마법을 시전한 학생이 매직 미사일을 추가로 시전하자, 원래라면 똑바로 날아가야 할 주먹 크기의 푸른 구체가 실제와는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사가 시전하는 마법의 궤도를 예상 못하게 혼동해서 보여주는 환상 마법이었다.
“어어...!”
매직 미사일이 그대로 교수의 얼굴에 직격할 것 같자 시전한 학생이 당황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한은 살짝 기대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연히 키르민 교수는 맞아주지 않았다. 마법이 작렬하는 순간 교수의 분신이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
“...!!”
자리에 있던 학생들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눴던 교수가 사실 분신이었다니. 언제 바뀌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잘했다, 잘했어. 하지만 너무 정직해. 조금 더 속임수를 쓰는 법을 배워야 할 거야.”
뛰어난 환상 마법사들은 모두 다 속임수에 능했다.
만약 요새를 공략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강화 마법사 같은 경우 마치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처럼 정면에서 들어가 날아오는 공격들을 튕겨내고 적들을 짓눌러버릴 것이다.
하지만 환상 마법사라면 요새의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령관을 해치우고 본인이 요새의 사령관 행세를 할 것이다.
정면 승부나 화려함과는 정반대로, 허를 찌르는 기습과 속임수가 환상 마법에는 필수적이었다.
“자. 그러면 서로 둘씩 짝을 짓자. 한 명은 공격, 한 명은 수비. 공격을 맡은 사람은 상대를 어떻게든 속여서 제압하는 거야. 알겠지? 워다나즈. 어디 가지? 넌 나랑 해야지. 저번에도 나랑 했잖아.”
“예...”
이한은 시무룩해져서 키르민 교수 앞에 돌아왔다.
학생들은 교수님에게 존경심 섞인 인사를 보냈다. 키르민 교수는 그 마음 잘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줬다.
“솔직히 워다나즈 네가 쟤네들하고 겨루면 미안할 거 아니야.”
“딱히요?”
키르민 교수는 이한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로 지내다보면 자신한테 불리한 말은 못 들은 척 하는 재주가 생기곤 했다.
“배그렉 교수한테 그렇게 배웠는데 평범한 학생들은 무리지.”
“저 배운 거 별로 없습니다.”
“워다나즈 너 저번에 죽은 척 하고 나 공격한 거는 기억에서 지웠지?”
키르민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저번 강의 때 이한이 갑자기 심장마비인 척 쓰러져서 다가갔더니 바로 마법 시전을 해서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배 모 교수가 의심가는 속임수였다.
“자.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하고 시작해봐.”
“예. 늘어나라!”
이한은 <투사체 증가> 주문을 외웠다.
아까 <투사체 굴절>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어려운 환상 마법이었다.
마법사가 시전하는 투사체의 개수를 늘려주는 환상을 지팡이에 거는 것이다.
“물이여!”
이한은 물 구슬의 궤도를 어지럽게 흔들어가며 키르민 교수에게 가볍게 날렸다.
환상 마법을 연습하는 자리인 만큼 상대를 쓰러뜨릴 정도의 위력은 필요 없었다.
키르민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환상 마법 거는 척 해놓고 지금 여러 개 다 진짜로 날린 거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날아오던 물 구슬들이 일제히 쪼개져서 추락했다.
모두 다 실체를 가진 물이 맞았다.
높은 점수를 줄 만큼 훌륭한 속임수였다. 물론 저런 식으로 마력 낭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가짜겠지?’
이한은 눈앞의 키르민 교수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단순히 경험에서 온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키르민 교수의 모습에서는 아주 미세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겉모습이 어색하단 게 아니었다.
마법이 시전됐을 때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그 미세한 차이.
평범한 마법사라면 느낄 수 없었지만 이한처럼 마력에 대한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흠.”
이한은 옆에서 랫포드와 열심히 환상 마법을 겨루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을 지팡이로 냅다 찔러봤다.
“악!”
“미안하다. 교수님인 줄 알았어.”
“그걸 말이라고...”
“워다나즈. 알아차린 건 기특한데 그런 방식은 안 돼.”
키르민 교수는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만약 환상 마법사가 마을에 숨는 일이 생겼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을 전부 공격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한은 주변을 다시 훑어보았다.
교수가 어느 공간에 어떻게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만큼 광역 공격을...
“워다나즈. 광역 마법도 안 돼.”
이한은 짜증스럽게 눈앞의 교수를 쳐다보았다.
“다 안 되면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환상 마법 강의지 배그렉 교수 강의가 아니잖아?”
확실히 맞는 말이긴 했다.
이한은 살짝 반성하고 물 구슬을 교수에게 날렸다. 교수가 가볍게 방어했다.
‘위화감을 찾아야 하는데.’
자연에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마력의 흐름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흐름.
보통 그런 흐름이 마법사의 마법을 눈치 챌 수 있는 단서였다.
문제는 지금 이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의 마법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다니는 만큼 마력의 흐름이 매우 변덕이 심했다.
“박무여, 퍼져라.”
“!”
키르민 교수는 이한이 시전하는 <오고닌의 박무>를 보고 살짝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1학년 학생이 3서클 마법을, 그것도 오고닌 님의 비전 마법을 이렇게 깔끔하게 시전할 줄이야.
매번 강의용 마법진을 마력으로 부수거나 자재를 마력으로 부수거나 해도, 이런 걸 보면 워다나즈처럼 참 기특한 학생도 드물었다.
‘먼저 나를 숨겨야 한다.’
이한은 가르침대로 충실히 행동했다.
아무리 이한이 공격 역할이라 하더라도 키르민 교수가 계속 이한을 관찰하게 내버려두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잠시 시야를 흔들어야했다.
“망토여, 나를 삼켜라...”
‘잘하는데?’
키르민 교수는 이한의 형체가 일렁이는 안개 속에서 완전히 투명해지자 감탄했다.
괜히 <볼라디의 유일한 제자>란 칭호를 가진 학생이 아니었다.
이런 환상 마법 대결을 몇 번이나 가르쳐줬다고 벌써 이렇게 능숙해질 줄이야.
‘그래. 공격 때도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하지.’
촤르르륵!
갑자기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쳐졌다.
지팡이를 휘둘러대고 상대의 정강이에 발길질을 하던 학생들도 멈칫하고 시선을 돌렸다.
키르민 교수는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 잠깐...!”
쨍그랑!!
이한은 가차없이 강의실 천장의 마법등을 박살내버렸다.
불빛을 뿜어내던 아티팩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고 강의실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교수는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과 배그렉 교수를 불러서 ‘애 좀 작작 이상하게 만들어’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저걸 부수고 있네!’
하지만 안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커텐을 투과한 빛과 학생들이 뿜어내는 마법의 잔광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암흑이여, 흘러나와라!”
“...!”
그 희귀한 암흑 원소까지 동원해서 암막을 쳐버리는 집요한 의지에 키르민 교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공격 쪽의 특권을 아주 제대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워다나즈? 어둠을 불러온 건 좋은 생각이지만 본체를 찾는 건 더 불리해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찾았습니다.”
이한은 이미르그 뒤에 멈춰서더니 투명 마법을 풀고 지팡이로 가볍게 등을 쳤다.
그러자 이미르그의 모습이 키르민 교수로 변했다. 강의실이 밝아지자 옆에 있던 학생들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찾았지?”
키르민 교수는 정말 예상치 못해서 물었다.
워다나즈는 좋은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아직 정답을 찾으려면 한참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투명화 마법을 시전한 다음 <오고닌의 감정 인지> 마법도 같이 시전했습니다.”
“아. <오고닌 님의 감정 인지>? 정말 영리한 선택인걸?”
“어... 네. 오고닌 님이요.”
이한은 슬쩍 눈치를 보고 님을 붙였다.
아무래도 키르민 교수 앞에서는 명칭을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오고닌의 감정 인지>를 쓴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키르민 교수가 학생 중 한 명으로 숨어 있었다면, 다른 학생들과 달리 평온한 감정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수는 이한의 발상에 매우 만족했는지 손뼉을 쳤다.
“그래. 용케 눈치를 챘구나? 마법이 튕겨나가는 걸 보고 눈치를 챈 건가? 이미르그가 마법 저항력이 강하긴 하지만, 이런 감정 인지 계열 마법까지 다 막아낼 정도는 아니니까.”
“어... 그, 마법 자체는 성공했습니다만.”
키르민 교수는 이한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전투 상황이 아닌 만큼 키르민 교수가 학교에서 방어 마법을 여럿 걸고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환상 마법사인 만큼 보안을 위해 습관적으로 걸어놓는 마법들이 있는데...
그걸 그냥 뚫고 봤다고?
“나 원 참. 배그렉 교수가 널 참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예???”
이한은 오랜만에 정색했다.
* * *
원래 심심하면 이한을 부르던 버두스 교수의 부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이한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찾아가서 ‘교수님 괜찮으십니까?’하는 순간 버두스 교수란 늪에 깊숙이 빠져드는 꼴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지하감옥에 있을 선배가 만들어 준 평안을 즐길 뿐.
‘감사합니다. 케틀 선배.’
하지만 영원히 버두스 교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으로 강의 시간이 그랬다.
“워다나즈. 부여 마법 강의인데 왜 그렇게 표정이 밝아?”
앙라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워다나즈는 교수를 데리러 가야 하는 사람 아닌가!
앙라고라면 생각만 해도 위통이 올 것 같은데...
“아. 교수님을 강의 시간에만 만나도 된다고 생각하니 새삼 즐거워서.”
“......”
옆을 지나가던 지젤이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교수님?”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공방 방문을 두드렸다.
버두스 교수가 멀리서 손짓으로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말했다.
“앗. 작업 중이셨습니까? 다음에 올까요?”
“아냐. 강의 가야 해. 안 가면 죽인댔어.”
이한은 ‘누가요?’라고 묻지 않았다. 그저 잔잔히 미소지었다.
버두스 교수는 투덜대며 작업을 빠르게 마무리했다.
“귀찮아 죽겠네! 어떤 미친놈이 강의실 마법등을 박살내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