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이한은 잠깐 멈칫한 뒤 바로 대응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는 참 미친놈들이 많네요.”
“고나달테스가 부순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고나달테스가 요즘 유난히 신경질적이야.”
버두스 교수는 렌치처럼 보이는 아티팩트를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저번에 날 가둔 것도 그렇고. 자꾸 화를 내더라구.”
“거 참.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사실 이유는 알아.”
“오.”
이한은 놀랐다.
버두스 교수가 해골 교장이 분노하는 이유를 안다고?
‘그걸 파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사실 진짜 이유는 따지고 보면 버두스 교수의 선량한 제자가 실수로 해골 교장의 물건을 건드려서긴 한데 그거까지 알 수 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리고 그거 말고도 버두스 교수는 해골 교장의 성질을 긁을 일을 많이 하긴 했다.
하지만 교수 본인이 그걸 파악할 능력이 있었다니.
과연?
“연말이라서 그렇지.”
“예?”
“한 해가 끝나면 제국의 관료들이 귀찮게 하거든. 왜 여기에 돈을 썼냐, 왜 저기에 돈을 썼냐.”
“아하.”
이한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에인로가드는 학생들이나 학생들의 가문에게 입학금이나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제국의 다른 마법학교들이 어지간한 귀족 가문들도 깜짝 놀랄 만큼 막대한 입학금이나 수업료를 받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물론 에인로가드의 운영 자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았다. 해골 교장은 에인로가드의 영주인 만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이한도 몇 번 자리에 같이 있었던 만큼 그 고충을 일부나마 알았다.
여러 명사나 대귀족 가문들의 기부금, 황제의 개인적 후원, 해골 교장이 자기 금고에서 꺼낸 이상하게 수상쩍은 느낌이 나는 금화 주머니(보통 제국 신문에 흉악한 범죄자들 누구누구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같이 올라오곤 했다) 등등.
그 중에서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제국에서 정식으로 나오는 지원금이었다.
관료들은 어떻게든 깎으려고 하고 해골 교장은 어떻게든 늘리려고 하는 치열한 경쟁의 영역!
당연히 연말이 되면 제국 재무관들이 어떻게든 기를 쓰고 내년 예산을 깎으려는 일이 벌어졌다.
‘더더욱 조심해야겠군.’
이한은 해골 교장의 물건을 도둑질할 일이 생긴다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징벌방 하루 있을 일을 일주일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오늘 강의 때 할 거. 겨울 대비 옷붙이 만들 거야.”
궤짝을 열어보니 안에는 각종 시약들이 즐비했다.
화염 속성을 부여하거나 냉기나 바람을 튕겨내거나 등등.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추워지는 에인로가드의 날씨였다.
학생들은 누더기를 덧대서 외투를 두껍게 만들거나 쉽게 식지 않는 뜨끈한 연금술 액체를 유리병에 넣어 가지고 다니거나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열 부여> 같은 마법이 있긴 했지만 계속 교내를 왔다갔다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것도 사치에 가까웠고...
이럴 때 요긴한 건 아예 물건 자체에 마법을 새겨 넣어버리는 간이 아티팩트였다.
주문을 따로 걸 필요 없이 훨씬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버두스 교수가 생각할 수 있나?’
“이걸 교수님께서 생각하신 겁니까??”
“그렇지? 너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어!”
버두스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재미없는 걸 내가 골랐겠어? 당연히 아니지. 가르시아 교수가 시켰어! 안 하면 내 작업대를 부숴버린다지 뭐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지?”
“에이. 교수님께서 잘못 들으신 거죠. 가르시아 교수님은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실 분이신데.”
“아냐! 제대로 들었다니까!”
버두스 교수는 방방 뛰었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 * *
“...그래서 오늘은 너희들을 위해 겨울 대비 옷붙이를 만든다.”
버두스 교수가 툴툴대며 말하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동시에 이한을 쳐다보며 외쳤다.
“혹시 네가 교수님을 협박한 거냐 워다나즈???”
“......”
이한이 할 말을 잃은 사이 버두스 교수가 해명했다.
“아냐. 가르시아 교수가 협박했어.”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교수님. 어떻게 가르시아 교수님이 협박을 해요.”
앙라고의 말에 지젤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있지... 않나?’
가르시아 교수님이 손꼽힐 만큼 선량한 사람이긴 했지만 사실 선입견을 빼고 보면 누구든 협박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이긴 했다.
“진짜라니까! 진짜!”
버두스 교수가 펄펄 뛰자 이한은 다시 진정시켰다.
“교수님. 진정하세요. 오늘 학생들이 완성하지 못하면 교수님의 작업대가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학생들이 마법 공부를 하루 25시간 하는 건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지만, 자기 작업대는 소중했던 버두스 교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자. 겨울에 걸치고 다니는 것들 중에 마법을 새길 수 있는 건...”
버두스 교수는 모자, 목도리, 외투, 망토, 조끼, 스웨터, 셔츠 등 각종 마법을 새길 수 있는 의류들을 설명했다.
“장갑은요?”
“새길 수 있지.”
“오. 장갑도...”
친구가 메모하려고 하자 이한이 제재하며 다시 물었다.
“저희 수준으로도 가능합니까?”
“어. 너희가 몇 서클 마법 썼었지? 4서클 쓸 수 있나?”
“워다나즈는 아마 가능...”
“닥쳐 멍청아.”
자기 아티팩트는 0.1초 만에 암산으로 계산을 끝내지만 학생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손가락을 꼽아야 계산이 가능한 버두스 교수는 간신히 생각을 마쳤다.
“안 되겠네.”
“하긴 장갑은 작으니까 어렵겠죠.”
“어렵진 않고 너희들이 멍청한 거지.”
“......”
흰 호랑이 탑 학생 몇몇은 ‘교수님 눈더미에 몰래 처박을 수 없냐?’같은 대화를 속삭였다.
그러는 사이 버두스 교수는 가능한 옷붙이들 설명을 끝내고, 거기에 걸만한 마법들도 마저 설명했다.
“<잠열 부여>, <방풍(防風) 부여>, <냉기 저항 부여>, <설피(雪皮) 부여>, <응결 저항 부여>... 이 정도면 되겠지?”
“저희가 안 배운 것도 있는데요?”
“응? 이번 기회에 새로 배우면 되잖아.”
“......”
흰 호랑이 탑 학생 몇몇은 ‘진짜 잘 하면 눈구덩이에 빠뜨릴 수는 있지 않을까?’하고 계획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잠깐.’
버두스 교수의 강의 준비를 같이 도왔던 이한은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교수님. 반영구적인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아니더라도 나름 마법을 오래 갈 수 있도록 새기는 건데, 일반적인 옷의 내구도로 견딜 수 있습니까?”
“못 견뎌. 그래서 특수한 천이나 가죽을 써야 해.”
“아. 미리 준비해놓으셨습니까?”
이한은 살짝 놀랐다.
버두스 교수가 강의실에 미리 그런 걸 갖다놨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없는데?”
“예?”
“없어. 너희들이 구해와야 해.”
“......”
“......”
때마침 밖에서 찬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마치 귀신이 내는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소리였다.
“지금 그걸 어디서 구하죠?”
질문을 받은 버두스 교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희 선배들은 다 알아서 쟁여놓던데 너희는 안 해놨어? 작년에 쟁여놓은 것 중에 남은 건?”
“저희 1학년인데요.”
“나도 알아. 그래서 작년에 쟁여놓은 것 중에 남은 건?”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야.’
버두스 교수와 학생들의 대화를 축음기의 백색소음처럼 사용하며, 이한은 책을 확인했다.
쓸 수 있는 가죽이나 천들은...
“교수님. 쌍두우 가죽은 어떻습니까?”
“아까 말한 마법들을 걸기엔 충분해.”
“음. 두 상자 갖고 있긴 한데 이걸로는 부족하겠죠? 바살라 포(布)는 안 되려나.”
“그것도 되긴 해. 겨울에 채취한 바살라의 줄기 껍질만 되긴 하는데.”
“아. 겨울 산이라고 들었습니다. 양모는 어떻죠?”
“어지간한 양은 안 돼.”
“산맥파괴양의 털로 만든 건요?”
“뭐? 그런 양모가 있어? 나 줘!”
버두스 교수는 산맥파괴양 양모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런 고급 천은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누더기에 쓰기 아까운 물건이었다.
이한은 가볍게 무시하고 갖고 있는 천들을 대조해보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앙라고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걸었다.
“워다나즈. 야. 워다나즈.”
“?”
“지금부터 교장 선생님 창고를 털러 가는 거지? 같이 가자.”
“...아니. 내가 모은 건데.”
이한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른 탑 학생들마저 웃음기가 번졌다.
“그래. 그래. 워다나즈. 모았겠지. 겉으로는 그런 걸로 하자고.”
“그래서 언제 갈 건데?”
“......”
이한은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강도 비슷하게 된 건가 싶어서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모았어 미친놈들아.”
“아니... 그걸 어떻게 모으는데?”
“잠깐. 워다나즈 너 혹시... 알았다. 유급한 거지? 사실 3학년...”
딱!
“일해주고 모았다 이 자식들아.”
지팡이로 헛소리를 한 친구의 머리통을 때린 이한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일... 일해주고?”
“그래.”
“교수님 일? 그걸로 저만큼 모으는 게 가능해?”
친구들은 웅성거렸다.
딱히 이한이 타고난 강도라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저만한 분량의 천을 갖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같이 입학해서 1년 있었는데 혼자 몇 년 산 게 아니라면 저만한 양을 어떻게 모은단 말인가?
“선배들한테도 받았어.”
“?”
“????”
학생들은 모두 다 의문에 빠졌다.
선배들이라니.
...선배들을 만날 수가 있나?
그것도 거래가 될 정도로 자주?
‘야. 워다나즈 진짜 3학년 아니냐?’
‘근데 2학년은 왜 빼?’
‘2학년보다는 3학년 같잖아.’
버두스 교수가 이한을 재촉했다.
“재료 있으면 빨리 시작해. 오늘 안에 만들어야 가르시아 교수가 내 작업대를 안 부술 거야.”
“알겠습니다. 교수님.”
“맞아. 산맥파괴양 양모는?”
“너희, 탑 갔다올 건데 좀 따라와라.”
이한은 다시 못 들은 척 하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 * *
열심히 궤짝을 들고 옮기던 앙라고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야. 워다나즈. 근데 불사조 탑인데 왜 우리가 옮기냐?”
“너희는 재료 안 쓰냐?”
“...어... 사, 사제님들도 쓰잖아.”
“그래서 너희는 재료 안 쓰냐?”
“...옮기면 되잖아...”
지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궤짝을 옮기며 조용히 침묵했다.
상황적으로 불리할 때는 얌전히 기회를 보는 게 전략적으로 옳았다.
“흠. 양이 좀 부족할지도 모르겠는데. 더 갖고 와야겠다. 로웨나. 여기 땅 2m 정도 파면 상자 몇 개 있거든. 그거 꺼내갖고 와.”
“앗. 옙.”
닐리아는 순간 머릿속에 도토리를 이곳저곳에 숨기는 다람쥐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저렇게 파놓은 거야?”
“보관할 장소가 부족해서. 휴게실이나 개인실은 한계가 있더라고. 음. 창고를 구해야 하나.”
이한은 왜 선배들이 약탈이나 절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 으슥한 곳에 창고를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개인실이나 휴게실 정도면 공간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량이나 물자만 비축해도 공간이 빠르게 부족해졌다. 거기에 이한처럼 공부할 마법이 많은 사람은 준비물들도 늘어났다.
‘저번에 찾은 기지는 접근성이 안 좋고... 바실리스크 키우던 오두막에 일단 보관해놔야 하나.’
양을 가늠한 닐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잠깐. 양 충분하지 않아? 왜 더... 아. 알겠다.”
닐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더니 팔꿈치로 툭 쳤다.
“그렇지. 친구들한테...”
“나눠주려는 거구나!”
“...팔아야 하니까.”
잠깐 서로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뭐 나눠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