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잠시 후.
우레걸음 교수는 불평하며 오두막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워다나즈 네 녀석은 모르겠지만, 원래 에인로가드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법이다.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듯이...”
“죄송합니다. 교수님.”
“크흠. 창고 정리 잊지 마라.”
결국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 제자를 이기지 못한 우레걸음 교수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제자면 모를까 이한 같은 제자는 우레걸음 교수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워낙 평소에도 일을 많이 하는 귀중한 제자다보니...
“자. 그럼 정령 찾으러 가시죠.”
“대체 왜 그렇게 정령에 집착하는 거냐? 응?”
우레걸음 교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마법사의 영역이 훨씬 넓어지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한은 해골 교장처럼 정령 없어도 잘 살 제자였다.
“교수님 정령 몇 명하고 계약하셨죠?”
“...그건 지금 주제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
“빨리 가시죠.”
이한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정령과 친한 사람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을 기세였다.
우레걸음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 *
“다들 비켜라.”
드워프 교수는 쇠뇌를 꺼내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퉁 소리와 함께 볼트가 주변의 공간을 찢어발겼다.
콰직!
거대한 떡갈나무를 몸의 핵으로 삼아, 마치 나무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오염체가 일격에 쓰러졌다.
이한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쇠뇌에 걸린 마법들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볼트도 평범한 볼트가 아니었다. 짧은 화살처럼 생긴 볼트의 심지에는 길쭉한 플라스크가 들어가 있어 연금술 용액이 찰랑거렸다.
‘하나 정도 얻을 순 없나?’
“이상하군.”
“예?”
이한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켰나 싶어서 움찔했다.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아. 자연 발생이라면 이렇게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는단 말이지.”
우레걸음 교수는 뛰어난 연금술사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레인저이기도 했다.
그리고 레인저만큼 맡고 있는 영역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도 드물었다.
지금 숲은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마치 한밤처럼 캄캄하고 어두웠다. 암흑 원소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원래 오염체가 이렇게 빠르게 증가하진 않는데...
“그렇다면 혹시 교장 선생님...”
“너희 선배들의 실수겠지.”
“아하. 선배님들의 실수겠군요.”
“너 방금 교장 선생님 이야기하지 않았냐?”
“글쎄요?”
이한 옆에 있던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우레걸음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충분히 이럴 만한 분이시긴 한데, 이런 짓은 하지 않으셨을 거다. 오염체 같은 건 너무 뒤처리가 귀찮거든.”
“방금 이럴 만한 분이라고 하셨나요?”
시아나 사제가 귀를 의심하며 이한과 요네르에게 물었지만, 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럴 만한 분이시긴 하잖아.”
“!?”
시아나 사제가 경악하는 동안 이한은 궁금한 걸 물었다.
“뒤처리가 귀찮다는 건 주변 오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우레걸음 교수는 기특하다는 듯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학생들의 일에 끌어들인 건 괘씸해도 이렇게 하나를 안 가르쳐줘도 열을 아는 모습을 볼 때면 그 괘씸함도 사라지곤 했다.
“교장 선생님의 습격은 매해 그 수법이 달라지지만 보통 뒤처리가 깔끔하시지. 안 그러면 자신께서 처리해야 되니까. 이건 아마 학생들의 실수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군요.”
“아마 흑마법 학생들이겠군.”
“예?”
이한은 살짝 발끈했다.
다른 학파 선배들과 달리 언제나 어깨가 축 쳐져있는 흑마법 학파의 선배들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 이런 문제 생기면 무조건 다 흑마법 학파입니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 아니...”
그제야 이한이 흑마법도 듣고 있다는 걸 떠올린 우레걸음 교수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
“흑마법 학파 학생들이라고 무조건 의심하는 건 아니고. 자. 봐라. 암흑 정령 오염체들이잖느냐.”
“......”
이한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바로 목소리를 낮추고 우레걸음 교수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다 같이 교수님에게 배운 적 있는 에인로가드의 학생인데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너그러움을 한 번 보여주신다면 선배님들도 잊지 않을 겁니다.”
“......”
‘사실 별로 안 친한 거 아닌가?’
바로 흑마법 학파 선배들을 범인으로 확정짓는 이한의 모습에, 우레걸음 교수는 사실 이한이 흑마법 학파 선배들과 별로 안 친한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 *
“이, 일렌딜 선배님. 이거 지금 위험한 거 아닙니까?”
2학년 학생들은 드라이어드 혼혈 선배를 보며 질린 얼굴로 말했다.
드라이어드의 피가 영혼에 섞인 이 학생은 이 중에서 가장 학년은 높았지만, 차림새는 가장 남루했다.
떨어진 나뭇잎들을 주워서 엮은 것 같은 외투를 걸치고 온몸 곳곳에는 진흙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탓에 거지인지 마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으음. 미안하게 됐어. 다들.”
“......”
“......”
일렌딜의 태연한 말에 후배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지금 선배가 숲에서 하고 있던 일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원시 호문쿨루스에 암흑 원소를 주입해, 인공적인 암흑 정령에 가까운 존재를 만들어내겠다!
물론 잘 됐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호문쿨루스는 예상을 뛰어넘어 자기 멋대로 성장하더니 탈출해서 숲 곳곳에 암흑 원소를 폭주시키고 있었다.
벌써 숲에서 오염체들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올해 에인로가드의 겨울이 얼마나 끔찍할지 예상이 가서 몸서리쳐졌다.
“역시 흑마법 학파의 도움을 받을 거 그랬다.”
“아니, 흑마법 학파는 안 도와줬을 걸요. 거기 사람들 괴팍하고 무섭잖습니까.”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일렌딜 선배님.”
2학년 중 한 명이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빨리 흔적 지우고 튀죠.”
“...너...”
학생들은 말을 꺼낸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 잘했다는 듯이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말 잘 했다! 그래. 빨리 흔적 지우고 도망칩시다!”
혼란스러워서 에인로가드의 기본 규칙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일어나면 흔적을 지우고 튀어라!
“으음. 그렇지만... 이대로 두면 숲이 너무 더러워져서 막아야 하는데.”
“아니 선배님. 이거 잡히면 학기 끝날 때까지 징벌방이에요! 기말고사를 징벌방에서 봐야 한다구요! 숲이 중요하세요 선배님이 중요하세요!”
“굳이 따지면 숲이 더 중요하지?”
“......”
“......”
후배들은 이 뛰어난 연금술사가 범상치 않은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걸 뒤늦게 떠올리고 한탄했다.
“선배님! 같이 가셔야 한다니까요!”
“어쩔 수 없다. 선배님 잡아! 데리고 가야 해!”
쾅!
“?”
“...?!”
익숙한 볼트 소리와 함께 공간 찢어지는 효과가 저 멀리서 보이자 학생들은 기겁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다 교수를 두려워했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전공 교수를 가장 두려워하는 법.
“우레걸음 교수님이잖아!?”
“아, 아니 여기까지 왜 오셔?? 여기는 오두막 없잖아???”
“들켰나!? 누가 밀고한 거 아니야!?”
“흩어져! 흩어져서 도망쳐! 선배님. 도망치셔야 해요!”
“응. 알겠어. 다들 도망쳐.”
에인로가드의 규칙, ‘문제가 일어나면 흔적을 지우고 튀어라’의 다음 규칙은 ‘들키면 흩어져서 도망쳐라’였다.
학생들은 그 규칙에 따라 재빨리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아니 저런 배은망덕한 놈들이!”
우레걸음 교수는 수염을 쥐어뜯으며 격노했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우레걸음 교수가 아무것도 없는 저 먼 쪽을 보며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 혹시 선배들이 있습니까?”
“그래!”
“혹시 연금술을 전공하는 선배들입니까?”
“...그래!”
“교수님! 제가 흑마법 선배들은 무고하다고 했잖습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말을 바꾸는 걸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이를 갈며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붙잡을 준비를 했다.
“내가 분명 숲에서 함부로 실험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놈들을 추적해라!”
“잠깐. 교수님...!”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가 정령 사슴을 타고 선배들을 추적하러 가자 당황했다.
기껏 정령들이 있는 곳까지 거의 다 왔는데!
“저희끼리 가시죠? 어차피 거의 다 왔으니까요.”
“그래야겠군.”
시아나 사제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들이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만큼 상당히 초조했다.
“암흑이여, 여기에 모여라.”
이한은 주변에 펼쳐진 암흑 안개를 치우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가장 이질적인 원소 속성 중 하나인 걸 증명하듯이, 암흑 원소는 그 자체로 생명에게는 적대적인 장애물로 다가왔다.
숲에 끼는 평범한 안개도 암흑 원소와 결합되면 활력을 뺏어가는 치명적인 덫이 되는 것이다.
다행인 건 이한이 흑마법 학파에서도 드문 암흑 원소 사용자라는 점.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 안개를 끌어들였다.
밖에서는 그렇게 모으기 힘들던 암흑 원소가 이 숲에서는 쉽게 모였다.
‘치워야겠군.’
그렇게 희귀한 원소였지만 역설적으로 숲에서는 쓸모가 적어졌다.
암흑 정령과 결합한 오염체들인 만큼 암흑 원소 자체는 별로 타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잠깐잠깐!”
“????”
시아나 사제는 ‘히익’하고 비명을 지르며 이한 뒤로 숨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암흑 원소 버리지 말아줘! 여기 병에 담아줄래?”
상대는 반얀나무 정령 혼혈인 푸요나 버드나무 교수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갖고 있었다. 식물 계열 혼혈이 분명했다.
“누구십니까?”
“암흑 원소부터 담아줘. 곧 사라질 테니까!”
“안 사라집니다.”
이한은 암흑 원소를 능숙하게 통제하며 상대에게 조준했다. 명백한 경계심의 행동이었다.
암흑 원소는 그 이질성 때문에 통제가 더욱 힘들었지만 몇몇 타고난 마법사에게는 예외인 법.
암흑 원소를 창처럼 지팡이 끝에 유지시킨 이한은 바로 대응할 준비를 했다.
“워, 워다나즈 님. 선배 아니에요?”
“시아나 사제. 원래 선배가 더 위험해. 교장, 교수, 선배 순으로 위험하다고.”
“그, 그렇지만...”
아직 상식에 묶여 있는 시아나 사제는 선배를 조준하는 행동이 두려웠는지 머뭇거렸다.
요네르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잠깐. 사과할게. 하지만 정말로 의도한 건 아니었어.”
“뭐에 대해서 사과하시는 겁니까?”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일렌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세 명의 1학년 학생은 그 말을 듣고 모든 걸 깨달았다.
눈앞에 범인이 있었던 것이다!
“공격해요! 공격해!”
“이한, 신호 줘!”
일렌딜은 후배들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의도고 뭐고 지금 이 모든 걸 소환하셨단 거 아닙니까!”
드라이어드 혼혈 선배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포기한 것이다.
“저기... 공격해도 되는데 암흑 원소는 담아주면 안 될까?”
“......”
“미, 미친 사람 같아요.”
시아나 사제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 * *
이한은 일단 지팡이를 내렸다.
상대가 미친 사람 같긴 했지만 그래도 기습할 사람 같진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느릿한 말투로 설명한 일렌딜은 셋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야?”
“어...”
“그게...”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무심코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령들이 오염체한테 쫓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너...”
일렌딜은 오늘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에인로가드 학생들 중에서도 숲이나 정령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아닙니다. 마법사로서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