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다 들어갔나? 나도 들어간다.”
가려는 학생들의 숫자가 많은 만큼 한 번에 다 갈 수는 없었다.
이한은 학생들을 나눠서 차례대로 파티를 짰다. 가장 먼저 들어갈 선발대는 학생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해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에는 이한도 들어갔다.
당장 살코도 지젤도 이한이 없으면 서로 멱살 잡고 싸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계산상 계속 유지될 거야. 만약 닫히면 여기는 얼씬도 하지 말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모르는 척 해.”
“워, 워다나즈.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쩔 수 없어.”
경악해하며 머뭇거리는 친구들에게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차원 관문이 닫히면 넘어간 학생들은 알아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어떻게 구해준단 말인가.
“그럼... 간다.”
팟!
차원 관문으로 발을 디디자, 예전에 정령계나 언데드 계에 진입했던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같은 위상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차원을 거쳐 움직이는 기묘한 감각.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빠르게 끝나자 이한의 앞에는 낯선 저택의 복도가 펼쳐져있었다.
“워다나즈.”
“...다들 무사히 왔군.”
먼저 들어간 친구들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해골 교장의 별장에 들어왔는데 긴장하지 않을 학생은 없었다.
“다들 침착해라.”
“침, 침착한데?”
“나, 나도 침착하다. 워다나즈.”
‘손 떨고 있잖아...’
살코나 지젤 같은 친구들도 긴장해서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긴장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대로 하면 들킬 걱정은 없다. 자. 다들 심호흡해라. 빨리 저택의 구조를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나가는 거다.”
“저택 안에 있는 물건은 정말 내버려둡니까?”
“안 돼. 미친 짓이야.”
랫포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랫포드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 중 몇몇도 노골적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저택에 있는 보물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워다나즈. 이 때 아니면 평생 교장 선생님의 저택은 못 털지도 몰라...”
“맞아. 어차피 징벌방에 간다면 차라리 털고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이 때 아니면 평생 해골 교장의 보물을 못 훔친다는 절박함.
그리고 애초에 이런 일에 뛰어든 이상 반쯤은 징벌방에 갈 각오를 하고 있다는 다짐까지.
학생들 중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해골 교장한테 최대한 타격을 입혀보겠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럿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여전히 냉정했다.
“아니. 다들 계획대로 한다. 선배들이 남긴 말은 무시해. 최대한 들킬 가능성이 낮은 방향으로 가는 거야. 알겠지?”
여기서 가장 탈출한 경험이 많은 이한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탈출에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을.
‘최대한 빠르게 구조를 파악하고 도시로 빠져야 한다. 오래 있을수록 위험해. 게다가 보물까지 사라진다면...’
“그래. 워다나즈 말을 들어라. 놈은 이 중 가장 많이 탈출한 놈이다. 교활하기로는 따라올 녀석이 없지.”
“다른 건 몰라도 워다나즈의 범죄 솜씨는 인정하겠어.”
“다들 고맙다. ...잠깐. 지금 방금 나 욕한 건가?”
이한의 질문에 살코와 지젤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오해가 있네.”
“욕한 것 같은데... 하여간 움직이자고. 다들 가까이 붙어라.”
친구들을 가까이 모은 다음 투명화 마법을 펼칠 준비를 하던 이한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용병들이 나타난 것이다.
* * *
제국의 편견 많은 사람들은 용병들이 범죄자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멀쩡하게 무기를 들고 의뢰주의 말을 듣다가도, 밤이 되면 무기를 거꾸로 겨누며 의뢰주를 약탈하는 자들이라고.
물론 용병들은 그런 편견에 펄쩍 뛰며 부정했다.
-제국 북쪽의 혹한이 몰아치는 설산에서부터 제국 남쪽의 타오르는 사막까지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병사들에게 무슨 그런 음해를!
-물론 내 동료 중 한 명이 의뢰주를 공격하다가 붙잡히긴 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일 뿐!
-맞아, 맞아! 저번에 내 동료도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히긴 했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지!
불행히도, 해골 교장이 부리는 데스 나이트들에게 붙잡힌 용병들은 이런 예외적인 일부에 들어가는 이들이었다.
원래 제국 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살았지만 몇몇 오해와 불운이 겹쳐서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게 된 이들.
그렇기에 이들은 데스 나이트들에게 붙잡혔을 때 격렬하게 항의했다.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네놈의 주인을 찢어 죽여 주마, 언데드!
-이 비열한 주문쟁이 새끼, 무덤 흙이나 파헤치며 도둑질하는 흑마법사 요술쟁이 새끼!
그 다음 데스 나이트들이 주인의 신분을 밝히자 용병들은 좀 더 점잖게 항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마법사를 상대해야 한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그 다음 데스 나이트들이 창고의 문을 잠그고 반항하는 자들에게 무기를 휘두르자 용병들의 항의는 훨씬 더 세련되어졌다.
-얼,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지금보다 더 준비해야 합니까? 어느 마법사든 간에 이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목에 화살 한 방만 박아 넣으면 마법사는...
물론 아무리 항의가 세련되어졌어도 데스 나이트들은 쉽게 용병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닥쳐라. 아직 멀었다. 너희가 노리는 상대 중에는 너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전투에 노련한 마법사도 있다. 더 정진하도록.
-아, 아니...!
시간이 지나자 데스 나이트들은 기준에 맞는 용병들만 골라서 별장으로 옮겼다.
시험에 통과한 셈인데도 용병들의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대체 우리들로 뭘 하려고 이러는 거지? 설마 다른 마법사를 암살하려는 것 아닌가?
-빌어먹을, 만약 암살이라면 성공하더라도 우리를 살려둘 리가 없어!
-탈락한 놈들은 벌써 마법사 놈의 저주를 받아 석상이 됐을지도...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하물며 범죄를 저질렀다가 붙잡힌 난폭한 용병들이었다.
이들이 데스 나이트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탈출을 준비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탈출은 쉽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네가 딴 자물쇠가 만 개가 넘는다면서 저런 허술한 정문 하나 못 연다고?
-썅, 네가 직접 해봐라! 뭔 지랄을 해놨는지 절대 안 열린다고! 무슨 철을 박아 넣은 것 같다!
-담, 담벼락을 기어올라서 몸을 던졌는데 무슨 벽이 있는 것마냥 튕겨나갔어.
-마법사 놈이 허공에도 마법을 걸어놓은 게 분명해. 미친 놈!
-땅을 파자! 땅을 파서 탈출하는 거다.
-땅도 막혔어... 지하에도 마법을 걸어놓다니. 미친 마법사 새끼!
용병들이 생각하는 모든 방향의 탈출이 다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저녁마다 찾아오는 데스 나이트들은 흙이 파헤쳐져 있거나 정문에 흠집이 가있어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용병들의 실력을 점검하고 늘지 않았으면 가차 없이 체벌했다.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연습을 하란 말이다. 쓰레기들아!
-지금 네놈들 실력으로는 마법사의 소환수도 못 뚫는다는 걸 왜 모르냐!
데스 나이트들에게 당할수록 용병들은 더욱 더 탈출에 매달리게 되었다.
여기 더 머무르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저택 안을 뒤져보자. 마법사 놈이 잊어버리고 간 게 있을지도 모른다.
-뭐든지 다 찾아봐라. 거울 뒤부터 시작해서 침대 아래까지. 샅샅이 뒤져!
-이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데스 나이트들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놈들이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다. 들어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그렇게 저택의 금지된 구역에도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밀며 수색하던 용병들.
그 용감한 수색은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기껏 올라간 계단 끝 복도에 에인로가드 학생 한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
“......”
학생들도 용병들도 조용히 얼어붙었다.
서로 켕기는 게 많은 만큼, 그대로 머리가 멈춰버린 것이다.
‘들켰나!? 저 자들은 누구지?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인가?’
‘들켰나!? 저 놈들은 누구지? 그 마법사의 부하들?’
학생들은 차원 관문으로 후퇴해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 된 이상 징벌방을 각오하고 저택 밖으로 밀고 탈출해야 할지 고민했다.
용병들은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할지, 아니면 마법사의 부하들을 제압하고 인질극이라도 펼쳐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이한이었다.
“공격해라!”
“뭐?”
“공격하라고.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이한의 주문과 함께 복도에 벼락이 치자 용병들은 자신들이 혼란에 빠져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사 상대로 선공을 뺏기다니!
‘큰일 났다!’
“저 새끼들을 잡아서 인질로... 커헉!”
한 박자 늦게 공격을 선언하려던 용병이 번개에 관통당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온몸을 바르르 떨며 일어나지 못하는 꼴이 제대로 당한 모양이었다.
“방패쟁이 앞으로!”
“방, 방패쟁이! 그래. 방패쟁이 앞으로!”
마법사 상대로 선공을 뺏겼다는 사실에 당황하던 용병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혹사시킨 데스 나이트 덕분이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도록 혹독하게 훈련시킨 덕분에 이런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대(對)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질긴 나무 방패를 들고 다니던 용병들이 앞에 서더니 재빨리 방패벽을 쳤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용병들은 원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쇠뇌가 장전되고 독 바른 단검들이 뽑혀져나왔다.
그걸 본 이한의 표정도 날카롭게 변했다.
‘역시 훈련 받은 놈들인가!’
“워, 워다나즈. 정말 이렇게 마구잡이로 공격해도 되는 거냐?”
“어차피 교장 선생님이 붙잡은 범죄자 놈들이다. 공격해!”
“뭐? 그걸 어떻게... 알, 알겠다. 공격해! 공격해라!”
이한이 선공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 용병들을 저번에 도시 외곽 창고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골 교장이 신입생들을 공격하기 위해 데려온 범죄자들.
알아본 이상 이쪽이 선공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학교에서 싸웠을 놈들 아닌가.
“박무여 퍼져라,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이한은 빠르게 지팡이를 휘둘러 복도 사이에 안개를 불러오고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해 진군시켰다.
조준은 물론이고 안개 속에서 시커먼 스켈레톤 전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진전하자 용병들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다시 한 번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이, 이건...”
“어... 어떻게...!”
용병들은 데스 나이트가 그들의 전술을 트집 잡고 학대할 때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느리고 둔하다. 게다가 준비한 방법이 하나라고? 그거 하나로 마법사를 상대한단 거냐!
노련한 용병들인 만큼 이들도 전장에서 마법사를 상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에서 그리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시전 속도는 느리지, 주변 경계는 허술하지, 공격이 날아오면 잘 대응하지 못하지...
한 번 마법을 막으면 그 다음부터는 바로 반격을 넣어서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마법사는 전혀 빈틈을 주지 않았다.
이쪽이 방어를 올리며 시간을 끌자 순식간에 이쪽의 전술에 맞춰 방어를 올리고 장기전을 준비했다.
안개 속을 전진해오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보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싸워야 하나? 이놈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지?’
‘이걸 뚫고 주문쟁이 놈들 앞까지 도착할 수 있나?’
그 순간 학생들의 마법 세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한이 시간을 끈 사이 학생들의 마법이 완성된 것이다.
콰콰콰콰쾅!
“크헉!”
“크으윽!”
마법에 대비한 방어벽을 치고 있다지만, 십 수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난사해대는 마법을 막아내는 이상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방패가 부서지거나 충격으로 날아가는 용병들이 생겨났다.
지젤은 쓰러지는 상대를 보며 살짝 이한을 쳐다보았다.
‘진짜 범죄자 맞겠지...?’
워다나즈가 상대를 공격하기 쉽게 그냥 범죄자라고 외친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아니겠지. 지금은 확인할 방법도 없고.’
“놈들이 도망친다!”
학생들은 복도 끝의 적들이 황급히 계단으로 빠지는 걸 보고 외쳤다.
이한은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붙잡아라!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
“...워다나즈. 진짜 범죄자 맞지?”
“범죄자라니까? 살코. 왜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거냐?”
“아, 아니다.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