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이운라데는 자신의 입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사실 이쯤 되면 주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졸업한 사람이 그렇게 후배를 못 믿으면, 제국의 관료들은 어떻게 믿으란 거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1학년 학생이라. 흐음. 좀 더 물어봐야겠어.”
“......”
상관의 말에 이운라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파악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워다나즈는 저번에 들은 그 워다나즈가 분명했다.
천하의 해골 교장을 황제 폐하 앞에 불려가게 만든 그...!
이운라데의 얼굴이 공포와 긴장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이 조사가 어떻게 끝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을까? 과연 괜찮을까!?’
* * *
“......”
“......”
이한과 지젤은 묵묵히 걸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어울리고 지나가는 대로 사이를, 조용히 걷고 걸었다.
둘의 얼굴은 시무룩하고 어두웠다.
이한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입을 열었다.
“...그냥 잊어버리고 필요한 거나 사자.”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고?”
“어쩔 수 없잖아.”
한 번 흘겨본 지젤은 고민하더니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잊어버리고 필요한 거나 사자.”
둘은 그랑덴 시의 서점 중 하나인 <이칼텐의 절우관> 앞에 섰다.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모습에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마치 방금 친구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어두운 표정의 둘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쓰레기터에서 아티팩트 만들기>, 이 책 맞아?”
“그 책 맞다. 기말고사 준비할 때 좋다고 하더라고.”
“<기초 황석(黃石) 사용법>. 이것도?”
“황석이 자주 버려지니까 참고해서 나쁠 건 없지.”
둘은 우중충한 얼굴로 기말고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준비했다.
기말고사에 필요한 건 시약이나 재료뿐만이 아니었다.
용기, 우정, 근성, 증오 등은 물론이고 마도서들도 있었던 것이다.
보통 이런 마도서들은 도서관에 가서 구해올 수 있었지만 에인로가드의 영리한 학생들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구해오느니 그냥 밖에 나가서 책을 사는 걸 선택했다.
적어도 밖에서 파는 마도서는 사람을 물어뜯지 않았으니까.
“잠깐. 워다나즈. <쉽게 착각하는 제국 철자법>은 왜 사야 하는 거지?”
“어, 너희 탑 애들이 자꾸 맞춤법 틀려서.”
“......”
지젤의 뺨부터 긴 귀 끝까지 붉게 물들었다.
쉬운 철자도 틀리는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을 저주하며 지젤은 다음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이악투스, 사악한 리치를 쓰러뜨리다>를 훑어보던 지젤은 무언기 이상함을 느꼈다.
“워다나즈.”
“?”
“저 사람, 수상하지 않아?”
“이 서점에서 제일 수상한 건 우리일 것 같은데...”
이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젤이 가리킨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확실히 수상하다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브로 몸을 푹 가려서가 아니었다. 커다란 도시에는 몸을 가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것만으로 의심하진 않았다.
상대에게서는 마법사 특유의 마력 패턴이 느껴졌다.
마력을 쓸 줄 모르는 일반인들의 주변과 마력을 본능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려는 마법사들의 주변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에인로가드에 막 입학했을 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세세한 점들까지 구분이 가능해졌다.
더군다나 상대가 고르는 책들은...
‘<피와 ■의 ■■>, <악마를 ■■■■ 부르는...>’
절우관의 마도서들은 이름을 건 마법사들에게서 검증을 받고 구매한 책들도 있었지만, 어디서 얻은지 모르는 수상한 책들도 있었다.
물론 시의 중앙 구역에 위치한 서점인 만큼 전체적인 규모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한 양이었다. 뒷골목의 노점도 아니고 수상한 책들을 많이 꽂아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책들만 노골적으로 훑어가며 고르고 있었다.
“수상하긴 하군.”
“그렇지? 로브 안쪽에 단검. 피가 묻어 있어. 아직 말라붙지 않은 거 보면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해.”
지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제야 이한은 상대의 로브 안쪽에 단검이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렇군.”
“...잠깐. 단검을 본 게 아니었어? 그럼 뭐가 수상하다고 한 건데?”
“마법사인 점?”
“?”
“거기에 수상한 마도서를 자꾸 모으려고 해서...”
“그것도 딱히... 아니다. 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워다나즈 너도 마법사에 수상한 마도서를 많이 모으지 않느냐’라고 말하려다가 지젤은 멈췄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지?”
“수상하긴 한데, 도시에 수상한 사람이 수십 명은 넘을 텐데 우리가 다 일일이 참견할 수는 없잖아. 피 묻은 단검은 얼마든지 이유를 붙일 수 있고.”
지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긴 손가락 끝으로 검집을 툭툭 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그렇지.”
“혹시 모르니 점원한테 말해만 놓자고.”
둘은 구매를 끝내고 절우관을 나와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팡이 장인의 가게인 <푸요의 반얀나무 지팡이>였다.
“거기에 은화는 어떻게 맡겨 놓은 건데?”
“저번에 일하면서 받은 걸 남겨놨어.”
“......”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앞에 낯익은 사람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까 서점에서 본 수상쩍은 이방인이었다.
“저거?”
“그냥 길이 우연히 겹친 거겠지.”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수상쩍은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발 사고치지 말아다오!
뚝-
상대는 <푸요의 반얀나무 지팡이> 앞에 멈춰 섰다. 주변에는 별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지젤을 붙잡고 주문을 외웠다.
“망토여, 나를 삼켜라!”
투명화 마법이 펼쳐지자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상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별다른 이상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윽-
수상쩍은 이방인은 우툴두툴한 지팡이를 꺼내고 다른 손으로는 피 묻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스스로의 팔을 ‘슥’ 긋자 칼날이 피를 머금고 마력을 불규칙하게 맥동시켰다.
‘혈마법!’
이한은 상대가 무슨 마법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물론 이한이 배운 혈마법보다 훨씬 더 난폭하고 조잡하고 위험한 구조였지만 피로 마력을 증폭시키는 원리 자체는 일치했다.
마력이 늘어나자 이방인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힘, 힘, 힘이여...”
서투르지만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주문까지.
인적 드문 남의 가게 앞에서 저런 주문을 외우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하나밖에 없었다.
이한과 지젤은 동시에 시선을 교환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도 정말 더럽게 없는 날이었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칼날에 깃들어 파괴해라!”
“크하학!”
가게를 약탈하려던 마법사는 벼락과 검에 당해 나뒹굴었다.
* * *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원래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푸요였지만, 이번만큼은 크게 감동했는지 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억세게 흔들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감사해 하실 것까지는...”
도시 경비대가 쓰러진 죄인을 끌고 갔으니, 둘도 빨리 은화 받고 뜨고 싶었다.
“잠깐 기다리게. 이렇게 도와줬는데 아무것도 대접 안 하고 보낼 수는 없지. 최근에 정말 귀한 찻잎을 얻었는데...”
“저, 푸요 님. 실은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어떻게 나온 건가?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나오기 쉽지 않을 텐데?”
푸요가 의아해하며 묻자 이한은 재빨리 대답했다.
“무슨 찻잎이 들어왔습니까?”
“아. 그러니까 제국의 북해 빙하 위에서 캐온 찻잎일세.”
지젤이 ‘빨리 대화 끝내 나가야 한다고’ 시선을 보냈지만 이한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앞으로 푸요와의 인맥을 생각해보면 괜히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둘은 푸요에게 차를 대접받고, 지팡이도 검사 받고, 마법사용에 대한 조언도 좀 듣고, 푸요가 최근 손질한 지팡이 용 원목도 한아름 선물 받았다.
“......”
“...조진 거 같은데.”
지젤이 중얼거렸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나뭇짐을 등에 올렸다.
“가자. 아직 사야 할 게 많으니까.”
“내 생각에, 우리는 끝났어. 아마 다음 가는 길에도 강도가 있을 걸.”
“앙라고나 할 소리 하지 말고. 미신에 굴복할 셈인가?”
지젤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이한의 뒤를 쫓았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운명이 그들을 괴롭힌다 하더라도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법.
“그래. 다른 놈들도 사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좀 못 사도...”
콰당탕탕!
“아아악!”
“벽이 무너졌어! 모두 조심해!!”
“젤린! 젤린이 잔해에 깔렸어! 빌어먹을. 피가 너무 심해! 시센자 님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이한은 나뭇짐을 던지고 옆 길드의 건축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젤은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쫓아서 달렸다.
“다들 비키십시오!”
“당신은 누군데... 헉, 마법사! 에인로가드의 마법사이십니까?”
변명할 시간도 없었기에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손짓했다. 지젤이 바로 강화된 근력을 사용해 잔해를 차서 날렸다.
공간이 생기자 이한은 누운 환자를 물로 씻어낸 다음 바로 주문을 외웠다.
“붙어라, 붙어라, 붙어라, 붙어라...”
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붙어가기 시작했다. 지젤은 잔해를 치우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한이 1학년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치유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속도로 저런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물어라!”
“끝, 끝났어?”
“운이 좋았어.”
이한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디가 말했을 때는 무시했었지만, 오늘은 정말 재수없는 날일지도 몰랐다.
저택에 도착했더니 안의 죄수들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나, 죄수를 붙잡았더니 강도를 만나지 않나, 강도를 해치웠더니 사고를...
‘점이라도 쳐보고 날짜를 정할 거 그랬군.’
이한은 후회하며 지팡이를 치웠다.
“감,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당신은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서 지나가던 도시 경비대원이 투구를 벗고 고개를 꾸벅이며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왼쪽 분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오른쪽 분은 모라디 가문의 지젤입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 님들. 다시 한 번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
“저희가 그렇습니다.”
이한과 지젤은 반쯤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 * *
“아직 아무도 없다!”
“뛰어, 뛰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 학생들은 짐을 들고 저택 상층 복도까지 뛰었다.
다행히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택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차원 관문도 멀쩡히 작동했다.
“들어가!”
“다들 고생 많았다!”
창고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귀환한 친구들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도 안 쫓아왔지?”
“야. 워다나즈가 강도 잡았다는데 대체 뭔 소리냐? 왜 강도를 잡아?”
“강도? 난 석공 길드원 살렸다고 들었는데?”
“...???”
“?????”
학생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스러워했다.
“헛소문이겠지?”
“그렇겠지. 워다나즈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하고 돌아다닐 리가 없잖아.”
“맞아. 모라디도 같이 있는데. 그 모라디가 남 도와주겠다고 실수할 사람은 아니지. 앙라고도 아니고.”
“야.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