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말이지...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골 교장은 혼자 추억에 젖어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 선배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
“......”
“......”
이한과 아산은 후다닥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연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 * *
“살아있었구나!”
대충 창고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온 둘을 발견한 친구들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아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갔다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그 정도면 여기서 징벌방으로 사라지기 충분한 시간이잖아.”
“하긴 그렇긴 하다.”
친구가 납득하는 동안 이한은 해골 교장이 시킨 일들을 설명했다.
학생들은 듣자마자 아산과 똑같이 반응했다.
“어? 우리도 살기 힘든데 신입생들을 생각해줘야 해?”
“선배들한테 받은 거 하나 없는데 신입생들도 알아서 살라고 해!”
“맞아, 맞아!”
‘훈훈하다 정말.’
이한은 친구들의 훈훈한 반응에 에인로가드의 미래가 참 밝다고 생각했다.
“여,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그래도 다음에 들어올 후배들을 아예 생각 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제인 티질링은 조금 아니라고 느꼈는지 친구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친구들이 머뭇거리자 가이난도가 나섰다.
“아냐. 안 할 수 있어! 다 같이 집중해서 후배들을 잊어버리는 거야!”
“가이난도 님은 워다나즈 님한테 가장 도움 많이 받았지 않습니까?”
티질링은 무심코 진실을 휘둘러 가이난도를 타격했다. 가이난도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니지!”
“맞긴 해.”
“넌 솔직히 워다나즈 없었으면 굶어 죽었어.”
“다른 탑 놈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검은 거북이 탑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훈수를 두자 가이난도는 펄펄 뛰었다.
휴게실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으음. 가이난도의 경우에는 맞긴 하지.”
“!?”
하지만 푸른 용의 탑 친구들도 딱히 가이난도의 편을 들어주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신입생들은 워다나즈도 없겠지?”
“좀 힘들긴 하겠지...”
“에이. 해주자. 선배들한테 받은 건 없는데 이 정도야 뭐.”
가이난도를 제외한 학생들은 알아서 이야기를 나누더니 선선히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번 주말에 확보한 대량의 물자 덕분에, 지금 1학년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이한. 나보다 많이 도움 받은 사람 없어?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아? 내 밑인 놈이 한 명은 있을 거야!”
가이난도는 이한의 외투 끝자락을 잡고 징징댔다. 이한은 무시하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부서진 물약이나 아티팩트는 나무 궤짝에 따로 담아서 들어내고, 아직 쓸만한 공책이나 깃펜, 잉크병들은 따로 정렬하고...
“이거 후배들 먹게 놓을까?”
“야... 너 진짜 착하다. 좋아. 나도 그럼 이 사탕이 든 통을 놓겠어.”
1학년 학생들은 곳곳에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 살짝 물건을 숨겨 놨다.
책 사이나 필기구 사이에 숨겨 놓으면 내년에 후배들이 받고서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
아덴아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선반에 꽂혀 있는 책 중 <사악한 마법 사용으로 처형된 마법사들>이 과연 후배들한테 좋은 책일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빼버려야 하나?’
“황녀님. 내키지 않으시면 간식 안 남겨도 됩니다. 가이난도도 안 남겨놨어요.”
이한은 오랫동안 고민하는 황녀를 보고 배려해줬다.
실제로 가이난도는 ‘진정한 간식은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낸 먹을거리다’라는 쪽지를 끼워 넣었다가 친구들한테 한 대씩 맞고 있었다.
“......”
황녀는 바로 가방을 찾아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기부했다.
“아니 어째서?”
황녀는 초콜렛 두 개를 더 기부한 다음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추종자들은 감탄스러워하며 이한에게 말을 걸었다.
“참 훌륭하시지 않으십니까?”
“어, 훌륭하긴 한데, 굳이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할 필요는...”
“무슨 소리십니까? 당연히 후배들을 생각하셔서죠.”
“그런가?”
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추종자들이 아주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이런 경우에서는 이한보다 잘 알 테니까.
‘하긴 가이난도와 달리 좀 제대로 된 황족이니까 체면도 신경 쓸 수 있겠지.’
대화를 마친 이한은 작업에 집중했다. 피 묻은 녹슨 칼을 궤짝에 치우고, 파손된 스크롤은 마법을 해제한 다음 불태우고...
“?”
이한은 선반 뒤 숨겨진 공간에 편지 하나가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글을 읽은 신입생은 자정까지 4층 홍각새 방으로 오시오.
-친절한 선배 씀
“이게 대체?”
“교장 선생님의 함정 아냐?”
“의심하는 건 좋은데 세상 모든 걸 다 교장 선생님의 함정으로 의심하는 건 좀 과한 거 같다...”
이한과 친구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 편지의 정체를 고민했다.
“애초에 4층은 쉽게 못 들어가잖아. 4층으로 오라고 하는 건 죽으란 거 아냐?”
“맞아. 심술 같은데.”
“헉...! 좋아. 나도 5층에 오라고 쪽지를...”
이한은 가이난도를 한 대 때리고 의문점을 말했다.
“편지가 좀 많이 낡지 않았나? 이 정도면 남긴 선배가 졸업했을 수도 있겠는데.”
“아. 그러네. 아쉽다. 선배가 왜 이런 걸 남긴 걸까? 애초에 접촉도 못하잖아.”
“아냐. 교장 선생님이 건 마법을 잠시 무력화시키는 방법들도 있더라.”
“...?”
옆에 있던 친구들은 ‘워다나즈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하긴 워다나즈니까 알겠지.’
살코는 편지를 톡톡 건드리며 숨겨진 글자가 없는지 찾았다. 별다른 장치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살코는 이한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하지만 워다나즈. 선배가 아니라 남겨놓은 물건일 수도 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자정까지라고 써놔서 헷갈렸지만, 사실 자정 이후에 방이 닫혀서 이런 식으로 남긴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선배도 이런 편지가 누군가를 직접 만나기 좋은 수단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였다.
애초에 신입생들 강의에 쓰이는 창고인 만큼 상대가 언제 발견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 정말 물건인가?”
“난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흠. 고민이군. 물자도 넉넉하고 다음 주가 시험이라 위험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잠깐. 살코. 왜 아까부터 계속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거냐?”
“흰 호랑이 탑 놈들 못 듣게 하려고.”
“...그래도 같이 가야지.”
이한의 생각대로, 친구들의 반응은 그렇게까지 뜨겁지 않았다.
이미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넉넉한데 굳이 위험한 4층에 들어가야 하느냐 반응하는 친구들이 반, 에인로가드의 물건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구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빨리 확보해야 한다는 친구들이 반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야 한다니까! 하루 차이가 에인로가드에서 치명적이라는 건 알고 있잖아!”
“이제까지 괜찮았다면 며칠 차이 정도도 괜찮을 거야. 지금 너 시험 공부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감, 감히 그런 모욕을?!”
친구들이 투닥거리는 동안 요네르가 이한에게 물었다.
“이한. 넌 어떻게 생각해?”
“난 어차피 이번 주는 좀 힘들 거 같은데. 일이 있어서.”
“기말고사 준비 말고?”
“주머니칼 요새 설계 의뢰를 맡아서 그거 완성해야 해.”
“......”
요네르는 친구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얘가 행복한 날이 오기는 할까?’
* * *
요네르의 걱정과 달리 이한은 의외로 주머니칼 요새 설계 의뢰는 불만이 없었다.
다른 과제와 달리 은화가 보상으로 나오지 않는가.
‘흠. 에인로가드의 과제들도 보상을 은화로 주면 참 좋을 텐데.’
해골 교장이 들으면 욕을 할 생각을 하며 이한은 깃펜을 놀렸다.
“워다나즈 군.”
“나이튼 교수님.”
알펜 나이튼 교수가 부르자 이한은 깃펜을 놓고 일어났다.
오늘은 주머니칼 요새 의뢰를 맡은 이들과 일차적으로 대면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군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 기말고사도 같이 준비해야 할 텐데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군.”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식적으로 대답한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그 무리를 시킨 게 이 교수였던 것이다.
아니?
“그래. 사실 워다나즈 군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래서 제안한 거고.”
“...아. 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이한은 교수들이 웃는 얼굴에는 침을 뱉을 자신이 있었다.
흐뭇하게 웃는 알펜 교수의 뒤를 따라 이한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처럼 생긴 아티팩트가 이미 작동되고 있었다.
-나이튼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다들 반갑네. 준비가 되었다면 설계를 보내줘도 되겠나?”
-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한은 긴장한 얼굴로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름 잘 작성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한의 기준일 뿐 상대방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 * *
<쿠드린> 석공 길드와 <이다> 목공 길드는 이번 주머니칼 요새의 건설을 제국에게서 수주 받은 이들이었다.
건축가들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
주어진 예산 안에서 효율적으로, 의뢰주가 요구한 목표를 최대한 달성하는 것.
전체적인 건설이나 조형은 이들 전문가들이 할 일이었고, 이번 에인로가드 1학년 학생이 해야 할 일은 요새 내에 설치된 아티팩트들의 마력량을 계산하고, 공급 가능한 마력원을 확보하고, 아티팩트들이 서로 오작동 일으키지 않게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하는 일들이었다.
“오. 생각보다...”
“역시 에인로가드 출신이라 그런가?”
잘 정돈되어 있고 알기 쉬운 설명에 길드원들은 감탄했다.
덕분에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외부의 행정적 평가가 매우 올라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걱정했던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안심이 됐다. 자기가 무슨 탑을 세웠느니, 무슨 성벽을 쌓았느니 떠드는 수상쩍은 마법사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훌륭합니다. 아티팩트의 위치 설정들이 참 좋군요.”
“감사합니다.”
이한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아티팩트들이 적절한 위치에서 서로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게 만들려고 얼마나 계산을 반복했던가.
이 정도 보람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
갑자기 길드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한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몰라서 다시 긴장했다.
‘젠장. 역시 실수가 있었나? 시간이... 아니다. 변명은 의미가 없지. 서로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상대가 교수도 학생도 아닌데 여러 학파 들었다고 변명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한은 최대한 빨리 파악하고 고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어떤...”
“나도 좀 보세.”
알펜 교수는 미간의 주름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확인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교수는 금세 문제를 찾았는지 길드원들과 표정이 똑같이 심각해졌다.
“이건 좀 이상하긴 하군.”
“교수님도 알아차리셨군요. 이건 실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해보도록 하지. 여기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나, 워다나즈 군? 아티팩트들이 소모하는 마력량 말일세.”
이한은 알펜 교수의 질문을 듣고 머리를 최대한 빠르게 회전시켰다.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지금 요새에 설치된 아티팩트들은 마력소모량을 최대한 줄인 상태였다.
그런 식으로 절약하면 마력을 공급하는 마력원을 비교적 덜 설치해도 굴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한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나름 줄였는데..
‘여기서 더 줄였어야 했나?’
진짜 프로 마법사들의 실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이한은 솔직하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역시 소모량이 너무 많습니까?”
“아니... 너무 적다는 뜻이었네. 아티팩트들이 이렇게 적게 소모하지는 않을 텐데.”
“예?”
이한은 의아해하며 확인했다. 딱히 실수한 게 없어보였다.
“단순한 아티팩트들은 이 정도로 줄일 수 있습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