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화
“방금 왔어. 그보다 귀 막힌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못 들은 모양입니다.”
“저런. 건강은 잘 관리해야지.”
버두스 교수는 이한에게 가볍게 훈계했다.
“듣는 강의가 많아서 어쩔 수가 없군요.”
“그래?”
“교수님께서 과제를 줄여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그럼 건강 관리가 되지 않을까요?”
“어. 그건 안 되는데.”
이한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아. 맞아. 원래 기말고사 준비를 부탁하려고 했거든.”
버두스 교수는 기억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가르시아 교수가 하지 말라고 말리는 거야!”
“저런!”
“이상하지 않아 정말?”
“그렇군요!”
“그렇지!”
버두스 교수는 투덜투덜댔다.
“학생 때는 안 그랬는데. 가르시아 교수도 변했어.”
“저런!”
“그래서 말인데.”
“그렇군요!”
“응?”
‘아차.’
이한은 ‘저런’과 ‘그렇군요’만 반복해서 대답하다가 한 박자 빨랐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둔한 버두스 교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르시아 교수 좀 설득해줄래? 가르시아 교수가 네 말은 들어주잖아.”
“저런!”
“그래. 부탁할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가르시아 교수님께서는 엄격하신 분이라 제 말이라고 들어주신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군.’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를 설득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설득을 한단 말인가?
“하긴 가르시아 교수가 엄격하긴 해.”
“그렇군요.”
“주먹으로 아티팩트 역장(力場)을 깨더라구.”
“저런! ...아니, 대체 뭘 하셨는데 주먹으로 맞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버두스 교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안에서는 익숙한 짤랑거림이 들려왔다. 은화와 금화가 부딪쳐야 나는 아름다운 소리였다.
“기껏 아티팩트 팔아서 바꿔왔는데.”
“이게 뭡니까?”
“어? 그 때 징벌방에서 말했잖아. 벌써 까먹었어?”
버두스 교수는 이한의 지능이 걱정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잠깐, 설마 이게 시험 준비 보수입니까?”
졸업생인 케틀 선배는 후배의 권리를 위해 버두스 교수의 멱살을 잡고 맹세를 하게 했다.
일을 강제로 시키지 말고 시킬 때는 대가를 지불하고...
“응.”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아티팩트 몇 개 팔았어.”
“아니... 어... 팔아도 되는 겁니까?”
이한은 멈칫했다.
금화도 은화도 좋았지만, 정말 팔아도 되는 건지 의문부터 든 것이다.
그 말에 버두스 교수도 멈칫했다.
“어. 팔면 안 되는 거였나? 잠깐만.”
“......”
“생각해보니까 고나달테스가 팔지 말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한데.”
“저런.”
“근데 안 들키면 되잖아?”
“그렇군요.”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는데 생각해보니 버두스 교수 말이 맞았다.
그리고 들켜봤자 버두스 교수가 잡혀가지 이한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교장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면 교수님. 기말고사 준비를 도와드리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은화 주머니가 제 소유가 되는 겁니까?”
“워다나즈. 너 기분 나쁘다 좀.”
버두스 교수가 질색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가끔 아티팩트 장인들 중에 아티팩트에게 이름을 붙이고 사랑스럽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버두스 교수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여간 저한테 주시는 거 맞죠?”
“근데 가르시아 교수가 안 된다고 했다니까? 가르시아 교수 말은 듣는 게 좋아.”
‘대체 뭘 하신 걸까?’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어떻게 버두스 교수를 설득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버두스 교수는 품속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복잡한 마력 구조가 느껴지는 걸 보니 하나 이상의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다.
“이거 받고.”
“앗. 감사합니다.”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선물에 살짝 놀랐다.
케틀 선배 덕분에 버두스 교수의 인심이 후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돈주머니뿐만 아니라 이런 선물도 그냥 주다니?
“학생들한테 오늘 이거 만들라고 전해줘.”
“...교수님. 강의실에는 오셔야죠. 그리고 이거 시키는 건 별개입니다.”
“뭐!? 진짜!?”
* * *
“어, 신입생 기말고사가 좀 심심하지 않습니까?”
코홀티는 모르툼 교수의 공방에 방문했다가 기말고사 문제를 보고 의아해했다.
원래라면 언데드 소환, 뼈/독/암흑 원소, 저주 등 다양하고 복잡한 흑마법들이 총출연하는 게 1학년 기말고사였다.
2학년 때 본격적으로 흑마법의 길을 걷게 될 신입생들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지게 해주는 그런 역할도 하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시험이 너무 조촐했다.
심지어 모르툼 교수의 뒤쪽 책상에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쌓여 있었다. 위에 문제가 써있는 걸 보니 시험 문제가 분명했다.
다음 중 언데드 계에 살고 있는 생물을 고르시오...
물론 이것도 시험이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심심한 건 사실이었다.
코홀티는 왜 이런 문제들이 있나 의아해했다.
모르툼 교수는 깃펜을 놀리다가 쿨럭이며 대답했다.
“저번 중간고사 때 학파 기둥뿌리를 날려버릴 뻔했으면서 그런 소리를?”
“......”
“......”
공방에 있던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코홀티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왜 하필이면 그런 주제를 꺼내가지고.’
‘선배님은 눈치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콜록. 그리고 후배한테 시약 구걸 시켰으면서 그런 소리를?”
“정말 죄송합니다!!!”
코홀티는 4학년의 품위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자세를 낮췄다.
아무리 4학년이라 하더라도 이건 체면에 먹칠이 될 수밖에 없는 실수였다.
“알면 됐다. 문제나 돕거라.”
“예...”
과거가 부끄러운 4학년 학생은 탁자 앞에 앉아 독을 조합했다.
“발목잡이독?”
“네.”
발걸음을 느릿하게 만드는 비교적 평화로운 독이었다.
코홀티는 한 번의 동작으로 독을 조합해서 완성시켰다.
“그 다음은?”
“뼈살이독이요.”
뼈의 재생을 강제로 자극해서 육체의 일부를 파괴에 가깝게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독이었다.
코홀티는 두 번의 동작과 한 번의 시약 첨가로 독을 완성시켰다.
“다음?”
“아흐락의 붉은 독입니다.”
아흐락은 과거 제국의 흑마법사 중 독으로 이름을 날린 자였다.
비록 자신이 만들어낸 독을 이기지 못하고 한줌의 핏물로 변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아흐락을 존경하는 흑마법사들이 많을 정도였다.
코홀티는 끙끙대며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흐락의 붉은 독은 잘못 만들었다가는 일주일 내내 눈, 코, 귀, 입에서 피를 쏟아낼 수도 있었다.
“됐다. ...잠깐만. 이건 왜 만드는 거지? 기말고사에 이걸 왜 쓰는데?”
만들던 코홀티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안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온 디레트가 대신 설명해줬다.
“그건 기말고사가 아니라 오늘 강의용이야. 독 마법에 대해 가르쳐줘야 하는데 저항력이 강한 후배들이 있어서.”
“아. 거인 혼혈 후배가 있었죠?”
학생 중 한 명이 기억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검은 거북이 탑 맞죠? 후후. 아주 잘 됐습니다.”
“야. 후배한테 너희들 싸움을 전가시키지 마.”
디레트는 가볍게 경고했다.
하늘에서 비만 내려도 각 탑 학생들은 ‘저 푸른 용의 탑 놈들 때문에 비가 내린다!’ ‘아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의 실험 때문에 비가 내린다!’ ‘모두 틀렸다 검은 거북이 탑...’ 이런 식으로 투닥거리며 싸워댔다.
그리고 그건 해가 지나고 학년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경쟁심으로 똘똘 뭉친 각 탑 학생들이 후배들로 경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거인 혼혈 후배는 아주 든든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싸움 좋아하는 애 아니거든.”
“그럴 리가요. 싸움을 싫어하는 거인 혼혈이 어딨습니까?”
“넌 흑마법 배우니까 묘지 파서 시체 뜯어먹고 그러겠다.”
“아니... 그, 그러진 않는데...”
디레트한테 한 말 들은 후배는 매우 억울해했다.
“묘지 파서 시체 훔치기만 했지 먹은 적은 없어요. 구울도 아니고.”
“그게 요점이... 아니다. 됐다. 하여간 후배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내년부터 너희들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쁠 텐데 걱정이다 정말.”
“앗. 선배님. 5학년으로 진급하실 겁니까?”
“그래. 결정했어.”
디레트는 살짝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인로가드에서는 개인 사정에 따라 2학년이나 3학년에 학업을 마치는 이들도 꽤 됐지만, 마법사로서 진지하게 마법이란 학문을 탐구하려는 이들은 4학년까지 마치는 게 보통이었다.
4학년까지 마치면 이제 자신이 쌓은 지혜와 지식을 갖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몇몇 불행한, 아니, 지혜와 지식에 남들보다 더 굶주린 이들은 5학년으로 올라가곤 했다.
스승들의 일을 도우며 함께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당장 4학년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하게 바빴으니까.
에인로가드의 교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도 대부분이 3학년까지였지, 4학년들은 졸업을 앞두고 마법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4학년이 이럴진데 5학년은 얼마나 괴롭고 끔찍하겠는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힘든 게 마법 외적인 일들이었다.
5학년은 이제 전통적인 적전제자(嫡傳弟子) 개념에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마법학교들이 집단교육 체계를 갖추기 전, 대륙의 마법사들은 훨씬 더 원시적인 교육 방식으로 깨달음을 전수해왔다.
동화에서 자주 나오는 괴팍한 스승과 불쌍한 제자의 일대일 사승(師承) 방식이 바로 이런 옛 방식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역효과가 많았다. 당장 스승을 죽이는 제자들이 여럿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인성이 반비례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인로가드의 5학년은 사라진 옛 개념인 적전제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교수도 자격이 있는 학생만 5학년으로 올라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확실히 이 5학년 학생들은 적전제자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교수님이 일을 많이 시키실 텐데요!”
“콜록. 콜록.”
적전제자들은 보통 해야 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교수의 다른 제자들을 관리하는 건 그 중 가장 쉬운 일에 속할 정도로.
이제까지 차원이 다른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고, 논문을 제국 학계에 발표하고(또 발표 자료도 만들고), 지원금을 요청하고 연구비를 관리하고, 외부 발표에 있을 때 참가하고...
만약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이 스승이라면 지옥 중의 지옥이 되리라.
“모르툼 교수님은 괜찮은 편이셔.”
“고맙다. 디레트.”
모르툼 교수는 다른 학생들을 째려보았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일보다는 마법 연구가 걱정이거든. 아마 일 년 내내 얼굴을 못 비출지도 몰라.”
“저희가 찾아가겠습니다!”
“콜록, 콜록.”
모르툼 교수는 어이가 없어서 기침을 했다.
“그걸 진심으로 응원이라고 하는 거냐?”
“됐어. 다들. 내 걱정은 그만 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희들이 걱정된다는 거야. 후배들이 들어오면 똑바로 잘 대해주고. 다른 탑이어도 괴롭히지 말고.”
“그리고 후배한테 괴롭힘 당하지 말고.”
코홀티가 말을 얹었다.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코홀티 말도... 맞긴 해. <아흐락의 붉은 독> 다 됐어?”
“잠깐. 디레트 선배님. 잊을 뻔했는데, 아무리 거인 혼혈이어도 <아흐락의 붉은 독>은 너무 지독할 겁니다. 다른 독이 낫지 않을까요?”
“걱정 안 해도 돼. 이미르그한테 줄 독은 뼈살이독이거든.”
“아. 그렇군요.”
대답하고 앉은 학생은 문득 멈칫했다.
‘어라?’
그럼 <아흐락의 붉은 독>은 누구한테 먹이시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