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그게 아니었습니까?”
-당연하지.
이쿠루샤는 1학년 학생한테 ‘거인 모두를 투명화해서 본관으로 데리고 가라’라고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무리한 임무를 시키겠는가.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연습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음.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쪽에도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네만...
“???”
이한은 이쿠루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니?
‘에인로가드에 입학한 실수를 말하시는 건가?’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연히 이야기를 꺼냈으니 본관으로 들여보낼 방법도 있지. 지하통로를 하나 알고 있네. 본관과 연결되어 있는.
“!”
예상치 못한 방법에 이한은 놀랐다.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에인로가드 본관은 그 역사만큼이나 숨겨진 샛길들이 많았다.
당장 불가살이가 거주하고 있는, 본관 지하 최심층의 <거미줄 호수>만 해도 여러 곳과 연결이 되어 있어 교수들이 지름길로 애용하지 않던가.
이쿠루샤처럼 오래 산 거인이라면 본관 건물과 연결된 지하 샛길 한두개 정도는 알아도 놀랍지 않았다.
“그런 방법이...! 훌륭하십니다!”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르네. 이 방법에도 난관이 있으니.
이쿠루샤는 산맥의 동굴과 연결된 지하 통로를 흙 위에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숨겨진 동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제법 오래된 통로가 나오는데, 이 통로를 따라서 들어가면 본관의 지하 창고가 나온다...
‘완벽한데?’
듣고 있던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난관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점이 난관입니까?”
-여기 통로가 제법 위험하거든.
“아. 그런...”
이한은 가볍게 긴장하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히드라 같은 게 있습니까?”
-...그 정도로 위험하진 않고...
이쿠루샤는 이한을 힐난하듯 쳐다보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한 예시를 들고 오다니.
“진지하게 여쭤본 건데...”
-그러면 더 문제지. 하여간 통로 주변에 늪과 호수가 있어서 그런지 사나운 놈들이 제법 보일 수 있네. 나도 이용한지 오래 되어서 확인을 해봐야 해.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이한은 종이에 <통로 몬스터 확인>을 메모했다.
-그 다음은 통로를 빠져나왔을 때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저기 주변은 학생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거든.
“선배들 말입니까?”
이한은 눈을 크게 떴다.
1학년 학생들이라면 이한이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1학년 학생들 중에 본관 지하를 어슬렁거릴 만큼 겁 없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아차. 난 돌아다녔지.’
이한은 방금 했던 생각이 스스로를 찌르자 후회가 됐다.
“선배들이 왜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거죠? 꽤 깊숙한 지하 창고인데.”
-나도 마법사들의 일은 잘 몰라서... 그건 대답해주기 어렵군.
‘흠.’
생각해보니 이한은 선배들의 생활에 대해 아는 게 적긴 했다.
해골 교장이 접촉을 막긴 했지만, 이한은 은근히 만난 선배들이 많았는데...
그 때 좀 더 캐물었어야 했나?
‘2학년부터는 다른 학년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고, 클럽 활동 가능하고, 외부 의뢰 좀 더 활발하게 받고, 자기 마법 연구를 스스로 하고... 이것 때문인가?’
마법 연구를 하다 보면 좀 사람이 음침해져서 지하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한은 선배들이 알면 화를 낼 생각을 하며 추리에 몰두했다.
-계속 이야기해도 되겠나?
“예. 말씀하십시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철혈 같다지만 아무래도 거인을 만나면 좀 놀랄 수밖에 없겠지. 근처 학생들을 오지 못하게 해야 하네.
“어렵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이게 가장 어렵군. 통로는 차라리 힘으로 치우면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거든.
고민하던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일단 거인 분들을 동굴 앞에 집합시켜주십시오. 저는 선배들을 접근 못하게 할 방법을 찾아가지고 오겠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쿠루샤는 생각보다 이한이 빠르게 행동에 나서자 놀라워했다.
1학년 학생이 선배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쉽게 말하다니?
“아는 선배님들이 있습니다. 거절하실 수도 있긴 한데, 부탁을 좀 드려보려고요.”
-...잠깐. 잠깐. 자네, 1학년 맞지?
귀를 의심케 하는 말에 이쿠루샤는 자기가 이한의 학년을 잘못 알고 있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 * *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계십니까?
이한은 비밀기지로 돌아와서 깃펜을 놀렸다. 디레트와 연결된 노트였다.
다행히 답은 곧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 만약 불편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드릴 것도 없고요.
열 개.
-예?
후배 너는 열 개 정도 물어봐도 된다고.
-아니... 그럴 순 없죠. 이거 원래 그런 규칙 아니잖습니까.
저번에 듣기로 학교에 배치된 통신용 아티팩트는 일대일 등가교환이 기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익명의 상대를 신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한 일 생각해보면 열 개 정도는 그냥 물어봐도 돼... 잠깐만.
-아. 바쁘십니까?
잠깐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니, 곧 글자가 올라왔다.
아냐. 잠깐 준비하느라. 말해봐.
-제가 선배님들이 어떻게 지내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혹시 선배님들 중에 지하 창고 주변에 머무르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한은 이쿠루샤한테 들었던 창고 주변 풍경을 최대한 자세히 묘사했다.
아무래도 지하 깊숙한 창고가 한두개는 아닐 테니까.
아. 여기. 알아.
“!”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디레트 선배가 설명만 듣고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는... 음...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괜찮습니다.
디레트의 글자가 망설이는 것처럼 떨리자, 이한은 여기가 대체 무슨 곳인가 싶었다.
무슨 이름이 알려지면 안 되는 사악한 강의실 같은 건가?
‘악마가 강의실로 되어 있나?’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해골 교장이라면 악마를 붙잡아서 통째로 강의실로 쓰고 있을지도...
그렇게 비밀까진 아니고, 음... 그래.
망설이던 디레트는 결국 포기하고 정답을 알려줬다.
저 주변에 주방하고 연결된 조그만 개구멍이 있어.
-예?
그러니까... 식사하려고 들어가는 거야.
드넓은 에인로가드에는 주방만 수십 개가 넘었다. 몇몇 곳은 아예 방치되거나 잊혀 졌을 정도로.
그 중 디레트가 말한 주방은 특별한 경계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식료품을 갖고 나오는 순간 경보를 울리는 마법이었다.
원래라면 그림의 떡이라 포기해야 했지만 에인로가드의 학생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들어가서 먹을 만큼 먹고 나오면 그만이지!
...이런 방식으로 주방의 마법을 돌파하고 식료품을 약탈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선배님들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그 선배님들이 전부 다 주방에 들어가려고 그러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부 다 주방에 들어가려고 그런 거 맞아.
“......”
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
디레트도 후배의 말이 사라지자 그걸 알아차렸는지 다급히 말했다.
참고로 우리 흑마법 학파는 거기 자주 이용 안 했어.
-어, 아니.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학교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했다니까!
‘화제를 전환해야겠다.’
그 주변에 학생들이 왜 많은지 파악한 이한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혹시 그 주변의 학생들을 잠시만 접근 못하게 할 수는 없을까요?
후배.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 어떤 이유냐에 따라 방법도 달라지거든.
-그게...
이한이 망설이자 이번에는 디레트가 달랬다.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후배. 하지만 이것만 알아둬. 흑마법 학파의 선배들은 네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해도 네 편이 되어줄 거라는 걸.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실 거인들을 데리고 와서 좀 숨기려고 합니다.
* * *
흑마법 학파의 학생, 코홀티와 오골도스는 디레트가 깃펜으로 후배와 대화하는 동안 뒤에서 서있었다.
아까 잠시 디레트가 대답이 없었던 건 흑마법 학생들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후배가 도와달라는데 너희들도 같이 참가해.”
“하지만 교장 선생님께서 신입생하고 멋대로 접촉하다 걸리면 징벌방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하기 싫으면 말던가.”
디레트의 말에, 코홀티는 오골도스를 경멸심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 새끼...”
“제가 언제 안 하겠다고 했습니까!!”
오골도스는 울컥했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였는데 그게 그렇게 죽일 잘못이란 말인가?
둘은 투닥대다가 결국 디레트 뒤에 섰다.
“그래서 후배가 뭘 도와달라는데?”
“몰라. 들어봐야 해. 일단 그 개구멍 주방에 왜 학생들이 모이냐고 묻는데, 이거 이대로 대답해야 하나? 너무 창피한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선배들이 왜 마법으로 해결 못하고 거지처럼 기어 들어가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에이. 그럴 후배 아니야.”
디레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다행히 후배는 ‘선배들이 왜 마법으로 해결 못하고 거지처럼 기어 들어가요?’라고 묻지 않았다.
“너희들 중에 거기 자주 가는 사람 없지?”
“어... 없습니다.”
“저... 저도 자주 안 갑니다.”
“......”
별 생각 없이 물었던 디레트는 후회했다.
차라리 그냥 묻지 말 걸!
“으음. 얘가 뭘 부탁하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원래 신입생 때는 다 그런 법이지. 나는 탑 앞에 ‘선배님들 남는 식량 조금만 주세요’라고 편지도 남겼었어. 순진했었지.”
“어떻게 됐습니까?”
오골도스는 코홀티의 말에 호기심이 솟았다.
“누가 ‘이거나 먹어라’하고 돌멩이 올려놨더라.”
“......”
생각보다 너무나도 에인로가드 같은 일화에 오골도스는 슬퍼졌다.
“일단 편하게 말해보라고 해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흑마법 학파는 네 편이 되어줄 거라고...”
“그거 좋은데? 감동하지 않을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닥쳐 좀.”
뒤에서 떠드는 말을 무시하고 디레트는 깃펜을 움직였다.
오골도스도, 코홀티도 기대 반, 걱정 반 섞인 눈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설마 부담스럽다고 다른 학파로 가진 않겠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실 거인들을 데리고 와서 좀 숨기려고 합니다.
“......”
“......”
잠시 공방에 침묵이 맴돌았다.
코홀티는 눈을 비비고 오더니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거인이란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뭔... 뭔인?”
“잘못 쓴 거 아닙니까?”
“아니 거인을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데리고 오는 건데?! 그보다 왜 숨기려고 하는 건데!?”
동기와 후배의 시끄러운 대화를 듣던 디레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번쩍 뜨고 깃펜을 놀렸다.
-별로 놀랍지도 않네.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죠! 무슨 허세를...!”
코홀티와 오골도스는 디레트의 허세에 경악했다.
아무리 선배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고 싶어도 그렇지 저걸 안 묻고 그냥 넘긴다고?
“다들.”
“어?” “예?”
“닥치라고.”
“......”
둘을 닥치게 한 다음에 디레트는 뒷글을 이어갔다.
-거인들 숨기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야.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선배들을 얕보지 마. 이런 일에 충분히 적응된 마법사들이니까.
어차피 내년부터 후배 만날 일 적어지는 만큼 디레트는 과감하게 질렀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배의 대답을 들은 디레트는 깃펜을 잉크통에 꽂았다.
그리고 다른 흑마법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자. 둘 다 거인들 숨어 있는 방에 학생들 못 오게 할 방법 하나씩 제안해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