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세이렌처럼 까다로운 종족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을 텐데.
거인도 남들과 친해지기 유리한 종족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인의 육체적 특성 때문이었다.
그런 육체적 특성만 견딜 수 있다면 거인처럼 순박한 이들이 또 없었다.
하지만 세이렌은 성질이 매우 까탈스러웠다.
에인로가드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지내는 여러 종족들 중, 세이렌과 친한 종족은 극히 드물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긴, 거인하고도 친해졌으니.
눈앞의 소년은 거인하고도 친해진 전적이 있는, 보기 드문 친화력을 갖고 있는 소년이었다.
가끔 이런 마법사가 있었다.
냉철한 지혜와 강력한 마법으로 자연을 굴복시키는 대신 따뜻한 마음과 선량한 영혼으로 자연의 친구가 되는 마법사.
보통 이런 마법사들은 자연의 정수, 그러니까 정령들에게 사랑받곤 했다.
-아마 정령들에게도 사랑을 받겠지?
“어, 뭐, 음, 그런, 편이긴 합니다.”
이한은 한쪽 손을 소매로 슬며시 넣어 새끼 바실리스크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바실리스크는 항의의 뜻으로 쉿쉿 소리를 냈다.
-세이렌들과 친하다니 잘됐군. 가서 부탁을 좀 전해주게나. 거인들이 통로를 통과하려고 하는데, 괜한 충돌이 없게 좀 도와달라고.
“예. 알겠습니다.”
이한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정령들은 대답할 때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세이렌은 아니었다.
정말로 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 만남은 조금 오해가 있긴 했다.
번개걸음 교수의 시험 때문에 붙잡아야 하는 수중생물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뒤로는 맥도 같이 퇴치하고, 해골 교장의 비바람 소풍도 같이 해결했으니...
‘이 정도면 친하지.’
이건 정령들과 달리 정말 친한 게 맞았다.
이한은 확신하며 통로로 내려갔다.
* * *
“계십니까?”
-♪↗♪↗↗!
-♬♩↗↗↗!
지하 통로의 서늘한 반석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있던 세이렌들은 이한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어.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번의 그 1학년 학생입니다!”
이한은 세이렌들이 착각했나 싶어서 다시 크게 불렀다.
“저번에 그 맥 같이 퇴치한 마법사입니다!”
물에 들어가 있던 세이렌들이 빠르게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깊숙한 수심을 찾아 이동했다.
여기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사람 잘못 보셨다니까요! 비바람 치고 폭풍우 불던 날 소풍에서 같이 힘을 맞춘 마법사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 번개걸음 교수 시험 때 목덜미 잡아서...”
말하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이건 굳이 말해서 좋을 게 없는 일화였다.
“기억 안 나십니까?”
조용.
“앗. 혹시 제가 만난 세이렌 분이 안 계십니까? 그렇다면 말을 좀 전해주십시오.”
조용.
세이렌들은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채 물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계속 부르던 이한은 세이렌들의 경계심이 생각보다 강하단 걸 깨달았다.
“말만 좀 전해주십시오.”
조용.
“...당장 말을 전해주지 않으면, 이 지하 통로 안을 벼락으로 채우겠습니다.”
이한은 실력 행사로 나섰다.
페르쿤트라의 문양이 손등 위에서 화화(火花)와 함께 번쩍이자, 그 문양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세이렌들이 전율했다.
같은 정령의 핏줄로서 저 마법사가 계약한 정령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직감한 것이다.
물론 이한은 정말로 페르쿤트라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나를 아는 세이렌이 오면 오해가 풀릴 거다.’
여기 세이렌들은 이한이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얼굴을 아는 세이렌이 나온다면 오해가 풀릴...
촤아아악!
“!”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세이렌이 물속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너무 빨리 나타나서,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듣고 여기 온 게 아니라 그냥 물속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이 익은 걸 보니 저번에 만난 세이렌이 맞았다. 이한은 반갑게 인사했다.
“반갑다. 잘 지냈나?”
-......
“잘 지냈냐니까?”
-......
“말로 대답할 필요 없는데. 고개만 끄덕여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세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매우 불만스러운 눈동자로 이한을 노려볼 뿐이었다.
‘혹시 내가 착각했나?’
이한은 의아해했다.
혹시 지금 앞에 있는 세이렌은 이한과 만난 세이렌이 아닐지도 몰랐다.
낯이 익어서 착각한 거지, 사실 만난 적 없는 세이렌일지도...
“나와 만난 세이렌을 오라고 했을 텐데.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소식을 전해라!”
이한은 지팡이를 겨누며 경고했다.
그러자 세이렌은 매우 천천히 자신을 가리켰다.
“너라고?”
끄덕.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했지?”
세이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급한 문제들이 많았던 것이다.
“세이렌, 잠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저번에는 물속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세이렌은 팔짱을 낀 채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인간 종족 따위가 세이렌의 이름을 발음할 수나 있겠냐는 경멸이었다.
“아. 이름이 부르기 힘든가보군.”
이한은 상대가 대답을 하지 않자 자신이 알아서 떠올렸다.
제국의 희귀하거나 특이한 종족들 중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소통 방식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당장 세이렌도 일반적인 제국어 대신 노래로 소통하지 않던가.
종족의 차이는 서로 존중해줘야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인간용 별명을 하나 지어줘도 되겠나? 앞으로 부를 수 있도록. 흠. 가이난도. 가이난도는 어떻지?”
세이렌은 질색을 하며 석판을 꺼냈다.
그리고 서둘러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파르테노페’라고 썼다.
“파르테노페. 그렇군. 하여간 파르테노페. 저번 일도 그렇고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우정을 믿고 부탁할 게 있다.”
-??????????????
파르테노페는 뭔 소린지 이해를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헛소리도 한 줄 들으면 반박할 수 있었지만 여러 줄을 동시에 들으니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인들을 데리고 통로를 지나려고 하는데 혹시 주변의 다른 종족이나 몬스터들을 오지 못하게 도와줄 수 있나? 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가는 통로가 무너질 수 있어서.”
글씨를 쓰던 세이렌은 석판을 떨어뜨렸다.
이한은 친절하게 석판을 주워서 돌려줬다.
“듣고 있나?”
파르테노페는 허겁지겁 안 된다고 쓰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눈앞의 이 마법사가 안 된다고 말했을 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인가?
-......
절대 아니었다.
만약 통제되지 않은 거인들이 우르르 지하 통로로 밀려온다면...
세이렌의 머릿속에 박살나고 무너지는 지하 통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도와줄게!!!
“고맙다.”
이한은 파르테노페의 대답에 흐뭇해했다.
역시 친해진 만큼 세이렌의 대답은 이한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정령 놈들과는 딴판이었다.
* * *
-으. 어인이다.
-어인이 아니라 인어의 일종이다. 이쿠루샤가 그랬다.
-둘이 뭐가 다른 거냐?
-어...
-어렵다. 그냥 생선이라고 하자.
거인들은 첨벙거리며 지하 통로의 잠긴 물을 지나갔다.
꽤 수심이 깊었지만 거인들에게는 걸어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세이렌들은 지하 통로 옆에 난 거미줄 같은 샛길을 하나씩 맡아서 혹시라도 모를 다른 이들의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
-♩♪♪...
구슬픈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거인들은 질색하며 귀를 막았다.
-으! 싫다!
-생선들 노래, 기분 더럽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가?’
이한은 거인들의 반응에 신기해했다.
이한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인들의 저항력은 유명했다. 그 저항력이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저런 식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게 분명했다.
물론 거인들처럼 세이렌들도 매우 불쾌해했다.
노래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령의 후예들이 귀 막으면서 ‘으! 기분 더럽다!’하는 거인들을 좋게 볼 리 없는 것이다.
세이렌들은 경멸의 눈으로 거인들을 쳐다보았다.
“노래가 안 들리게 할 수는 없나?”
이한이 탄 나룻배를 앞에서 끌고 가던 파르테노페는 친절하게 조언해줬다.
양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는 세이렌을 본 이한은 괜히 물어봤다고 후회했다.
‘거인들을 정말 싫어하는군.’
세이렌은 이한과 달리 거인들을 정말 싫어했고, 이건 이한도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이한도 원한을 살 수 있었으니까.
“음... 내가 노래를 불러도 되나?”
-???
파르테노페는 이한을 경악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 마법사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혹시 변신 물약을 마시고 세이렌 사이에 숨어드는 것 아닐지 두려워졌다.
미친 마법사는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시선에 담긴 뜻을 눈치 챈 이한이 변명했다.
“그냥 노래가 아니다.”
음유시인 이파두르와 해골 교장.
둘과 같이 돌아다니며 음악 마법의 기초적인 구조를 열심히 잡은 이한이었다.
아직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성과가 미약했지만, 지금도 효과가 있는 노래 몇 개는 부를 수 있었다.
“마력이 담겨 있는 만큼 세이렌의 노래를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파르테노페는 말리지 않았다.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 뜻을 응원으로 해석한 이한은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옛날 옛적 괭이를 든 오크가 있었다네, 오크의 밭은 폭우에 잠겨버렸지, 밭으로 가세, 밭으로...”
-?!
파르테노페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이 어린 마법사의 노래가 세이렌들의 노래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거인들 주변에서 영향을 끼치던 세이렌의 노래가 힘을 잃고 저 멀리 메아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르테노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고 귀를 기울였지만 현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 마법사!
“앗. 효과가 있습니까?”
-차라리 생선 노래가 낫다!
-가사가 너무 불쾌하다!
“아니...”
이한은 거인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효과가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효과가 있는데 가사 때문에 싫어할 줄이야.
대체 어째서?
“가사 좋지 않습니까? 아.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모르셔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전설적인 오크 농부에 관한 노래인데, 온갖 자연재해가 덤벼도 꿋꿋하게 밭을 갈아서 악마도 포기한다는 교훈적인...”
-일하는 노래 싫다!
-마법사가 자꾸 그런 노래 부르면 우리 안 걷는다!
거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투정을 부렸다.
이한은 억울했다.
‘좋은 노래인데.’
하지만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노래만 바꾸면 됐다. 이한은 기억에 남는 노래 몇 개를 더 시도해봤다.
손가락이 줄어들어도 망치를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던 드워프 석공의 노래(거인들은 야유했다), 자기 저택에 너무 많은 책을 모은 탓에 침대마저 사라져 결국 책 위에서 자게 된 사서의 노래(거인 중 한 명만 좋아했다)...
“...오, 저기 기사가 가네, 화살에 맞고 죽네, 철퇴에 맞고 죽네, 검에 찔려 죽네, 창에 당해 죽네...”
-노래 좋다!
-이런 걸 원했다! 마법사 최고다!
-기사가 죽는다! 기사가 죽는다!
-기사가 밟혀 죽는다! 기사가 양에 치여 죽는다!
“......”
거인들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들이 가사까지 바꿔가며 신나게 불러댔다.
목청 큰 거인들이 음정과 박자가 모두 틀린 노래를 통로가 울릴 정도로 불러대자. 샛길을 감시하고 있던 세이렌들은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다른 노래였으면 달랐을 거다.”
이한은 파르테노페한테 변명했다.
거인들이 이상한 노래만 좋아해서 그렇지, 아까 오크 농부에 관한 노래였다면 세이렌들도 괜찮게 들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