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파르테노페는 이한의 변명을 무시하고 나룻배를 몰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독한 합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 *
‘어라?’
지하 통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던 이한은 점점 주변 풍경이 낯익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고나달테스 님?
저 멀리 지하 호수 위에 툭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가 말을 걸자 이한은 반갑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불가살이 님.”
어. 너는 저번에 그...
거대한 바위처럼 생긴 몬스터, 불가살이가 이한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돌덩어리가 흔들리더니 후두둑 날아왔다.
‘다음에는 팔 흔들지 말아달라고 해야지.’
무슨 일이야?
“실은 밖에서 뭘 좀 들여오는 중이었습니다.”
이한은 통로의 귀퉁이를 돌지 않은 거인들에게 아직 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거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기다렸다.
밖에서 뭘 갖고 오려고 이런 위험한 곳까지? 조심하라구.
불가살이는 느리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우렁우렁하게 말했다.
학생들의 자유는 존중했지만, 언제나 마법사를 다치게 만드는 건 마법사 자신의 마법이었다.
너무 위험한 걸 갖고 오려다가 다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저, 혹시 제가 뭘 갖고 들여오는지는 다른 분들에게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한의 부탁에 불가살이는 바위로 된 몸을 느리게 진동시키며 웃었다.
당연하지. 애초에 나도 학생이 몰래 갖고 들어와 준 덕분에 여기서 클 수 있었는데.
불가살이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돌을 움직였다.
학생이 무엇을 갖고 들어오더라도 불가살이는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
이한의 나룻배를 끌고 있던 세이렌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불가살이가 보면 놀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이렌의 도움을 받는 거야?
“예.”
어떻게? 세이렌은 다른 종족들을 안 도와줄 텐데.
불가살이는 궁금했는지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친분이 있어서요.”
그래?
세이렌, 파르테노페는 아까 거인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는 모습이었다.
‘안 친한 것 같은데?’
불가살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기적 같은 우정을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다.
대단하네. 힘내. 잘 길러주고.
‘기르는 건 아닌데.’
이한은 불가살이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먼 옛날 불가살이를 몰래 데리고 온 학생처럼, 이한도 지금 유해생물을 데리고 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한은 설명하려다가 멈췄다.
‘그냥 움직여야겠다.’
기다리는 거인들이 좀이 쑤셔서 몸을 꼬는 걸 보니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들, 다시 출발!”
-우우. 기다렸다.
-힘들었다. 힘들었어.
거인들은 모퉁이 뒤에 나와 첨벙첨벙 걸어나갔다.
이한과 거인들은 이쿠루샤가 말해준 길을 찾았다.
거미줄 호수의 수많은 샛길 중 본관의 지하 창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불가살이는 그 느긋한 성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거인을 키우나!?’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온갖 희한한 생물을 몰래 갖고 들어왔지만, 그 중에서 거인을 키우려고 갖고 오는 학생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대체...?!
* * *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통로를 빠져나와 지하 창고에 도착한 이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거인들은 이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오직 이한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먼 길을 걸어오다니.
“정말 감사드립...”
-붉은색을 걸어야 한다. 붉은색이 더 따뜻하다.
-아니다! 노란색이 더 좋다. 노란색이 더 따뜻하다.
물론 거인들은 이한이 감사 인사를 하던 말던 자기들끼리 창고를 어떻게 꾸밀지 떠들고 있었다.
지하 창고는 거인들이 안에서 거인 씨름을 해도 될 만큼 넓었고, 덕분에 거인들은 이 드넓은 장소를 어떻게 꾸밀지 몰두했다.
‘음. 안 심심할 테니 차라리 다행인가.’
이한 입장에서도 거인들이 심심하지 않은 게 나았다.
일주일 동안 거인들이 여기서 머물러야 하는데, 심심하다고 밖에 돌아다녔다가 볼라디 교수라도 만난다면 위험해지는 것이다.
‘한 명만 잡혀도 위치를 말할 가능성이 높지.’
거인들 성격에 심문을 당하면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한은 거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밖에 함부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만약 잡히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기?
“그보다 더 끔찍할 수 있습니다.”
-이틀 종일 일하기?? 으악!
“예. 심지어 사흘까지도...”
이한의 경고에 거인들은 술렁였다.
과연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괴팍하고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우릴 믿어라!
이한은 거인들에게 인사하고 창고의 문을 열었다.
후우욱!
“...??!”
문을 열고 나온 이한은 주변이 온통 녹색 안개로 뒤덮인 모습에 경악했다.
안에서 느껴지는 복잡하게 중첩된 마력 흐름.
한 가지 독이 아니라 여러 개가 섞인 복합독이었다. 몇 개인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처음에는 무슨 몬스터라도 출몰했나 싶었지만, 이한은 곧바로 디레트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물론 말로 먼저 설득할 거야. 하지만 설득이 안 통하면 독을 조금 쓸 수도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 쓰려고 독을 뿌리는 게 아니야. 독이 퍼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멈춰질 거거든. 알겠지?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쓰려고 독을 뿌리는 게 아니야.
‘...아니,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복도 앞뿐만이 아니라 그냥 이 인근 구역 전체에 독을 뿌린 것 같았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으음... 그래. 디레트 선배가 일부러 이럴 사람도 아니고.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안 들었다거나...’
덜커덕!
복도 옆 벽에 언데드가 위장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앞의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는 걸 보니 밟는 순간 언데드들이 튀어나오는 구조 같았다.
게다가 그 앞은 또 저주 계열의 마법진들이 있고...
“......”
아니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이한은 마력의 성질 변화를 응용해서 벽에 붙었다. 흡의 묘리였다.
그 상태에서 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어떻게든 벽에 붙어 구역을 빠져나오자, 벽에 붉은색으로 칠해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흑마법 학파 죽어!!
“......”
이한은 조용히 벽에 칠해진 글씨를 지웠다.
마법으로 쓴 글씨라 좀 힘들긴 했지만 마력을 때려 박으니 어떻게든 지워졌다.
* * *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맞습니다! 황녀님 말고 어느 누가 이렇게 급우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
아덴아르트는 피곤해 죽겠다는 감정을 담아 추종자들을 쳐다보았지만, 추종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 다음! 영광인 줄 알아라! 황녀님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걸!”
“야... 나도 황자거든...”
질문지를 들고 온 가이난도는 울컥해서 추종자들을 노려보았다.
가끔씩 아덴아르트의 추종자들은 가이난도가 황족인 걸 진심으로 까먹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리고 가르쳐주는 건 똑똑한 사람의 의무인 거지! 가진 자가 베푸는 것처럼! 이한이 가르쳐주면서 이렇게 매번 생색내는 줄 알아?”
“그, 그건...”
“으음.”
추종자들은 가이난도의 날카로운 말에 의외로 반박하지 못했다.
하긴 워다나즈는 이것보다 더 많이 가르쳐주면서도 별 생색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추종자들이 분통해하는 사이, 아덴아르트는 가이난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뭐? 왜?”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해주십시오.”
“진짜!?”
가이난도는 아덴아르트의 말에 반색하며 쳐다보았다.
평소 못마땅했던 이복형제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잠깐. 안 돼.”
잠깐 신났던 가이난도는 바로 시무룩해졌다.
아덴아르트도 당황했다.
당연히 가이난도라면 좋다고 공부를 그만하자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아직 공부할 게 남았거든. 돌아왔는데도 안 끝내놓으면 이한이 진짜로 화낼 거야.”
“......”
아덴아르트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공부를 얼마나 안 했으면 워다나즈가 저런단 말인가.
하여간 도움이 안 됐다.
‘힘들다.’
아덴아르트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다른 친구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도 의외로 힘들다는 것이었다.
각자 듣고 있는 학파가 다르고 공부하는 부분이 다른 만큼 질문의 내용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런 질문들은 학년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법에 황소 뼈를 사용했을 때와 닭 뼈를 사용했을 때 차이점이 어째서 일어나는 건지...
-황녀님. 인내의 물약을 만드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는 황금술 한 숟갈, 콜다란 두 주머니, 석향 한 움큼 넣었고, 두 번째 시도에도 똑같이 했는데, 왜 두 번째 시도에는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즉석에서 아티팩트를 만들 때 다음과 같은 간이 마법진들을 쓸 수 있을까요?
-추가로 정령을 소환하고 싶은데...
오히려 이만큼이라도 대답을 해준 게 더 대단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줬다.
아예 아덴아르트가 관심이 없는 분야였다면 전혀 대답을 해주지 못했을 테니까.
“잠깐. 너 설마 쉬고 싶어서 나한테 말한 건 아니지?”
가이난도는 설마 싶어서 아덴아르트를 쳐다보았다.
아덴아르트는 자존심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야. 얘 쉬고 싶은 거 같은데?”
“무슨 소리십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쉬고 싶으시면 저희한테 말하셨겠죠.”
“나한테 말할 수도 있지. 그만큼 가르쳤으면 쉬고 싶을 수도 있지 않나?”
“황녀님께서는 이런 걸로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맞아. 누굴 너처럼 알아?”
“...아니 이 자식들이 진짜!”
울컥한 가이난도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추종자들도 지지 않고 가이난도를 붙잡고 뒹굴었다.
옆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마침 잘 됐다 싶어서 평소 원한 있던 다른 탑 학생 멱살을 잡았다.
“네가 저번에 내가 봐둔 빵나무 열매를 그냥 가져갔지!?”
“먼저 본 놈이 임자지!”
“저번 과제의 복수다!”
“니가 멍청해서 실수해놓고 누굴 탓하는 건데!”
과연 공부 못해서 모인 친구들답게, 공부하지 않을 이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를 때려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로 종이를 던지고 잉크를 뿌리는 사이 이한이 돌아왔다.
쾅!
벽 부서지는 소리에 다들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흰 호랑이 탑 친구의 입에 잉크를 부으려던 가이난도도 고개를 돌렸다.
주먹으로 벽을 친 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친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하냐?”
“......”
“...어... 그게...”
“공부하기 싫냐?”
이한의 질문에 친구들은 눈치를 봤다.
물론 공부하기 싫었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말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가이난도마저 그걸 눈치챘다.
“...그게 아니라...”
“저 자식이 먼저 시비를...”
“아니 쟤가 시비를...”
“다들 앉아라.”
이한의 말에 학생들은 조용히 착석했다.
“가이난도. 어디까지 했지?”
“거... 거의 다 했어.”
“황소 뼈하고 닭 뼈 사용했을 때 차이나는 이유 말해봐.”
“어, 그러니까, 그게.”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책을 정신없이 뒤지며 혹시라도 자신에게 날아올 질문을 대비했다.
이한은 혀를 차며 의자에 앉았다.
‘이 자식들 공부하라고 했더니.’
탁-
다들 조용해지자 아덴아르트가 이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