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워다나즈.”
부여 마법을 듣는 학생들이 이한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학생들은 손에 커다란 궤짝을 들고 있었다.
“이건 어때?”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제 충분할 텐데...”
“아니야. 워다나즈. 뭐가 어떻게 필요할지 모른다고!”
버두스 교수는 이미 기말고사가 어떻게 나올지 학생들한테 이야기한 상태였다.
폐기된 재료로 최대한 좋은 성능의 아티팩트를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이번 기말고사 주제였다.
문제는 저게 일반적인 학생들한테는 매우 개소리로 들린다는 점이었다.
-멀쩡한 재료로 만들어도 될까 말까인데 무슨 폐기 재료야? 미친 거 아니야?
-버두스 교수님이 재료 주기 아까워서 저러는 것 아닌가?
‘폐기 재료로 만들어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사실 이한은 친구들과 생각이 조금 달랐지만 괜히 말했다가는 욕먹을 것 같아서 같이 버두스 교수를 욕했다.
-버두스 교수님이 횡령한 게 분명하군!
-아, 아니. 워다나즈.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런가?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교수가 불합리한 과제를 내면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도 정당방위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이번 기말고사도 학생들은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폐기 재료 보관하는 창고에 멀쩡한 재료를 미리 채워놓는 방식으로!
밖에서 한바탕 구매를 한 덕분에 이런 대응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학생들은 창고에 제법 재료를 채워놓은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시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계속해서 재료를 추가하려 드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만 추가해도 될 것 같은데. 그거 청혼석이지? 세 상자나 있으니까 넉넉할 거야.”
“만, 만들다가 다 날아가면?”
“세 상자를 어떻게 다 날리는데...? 그리고 광령묵은 폐기 재료에도 있다니까? 확인해보니까 괜찮았어. 걱정하지 마.”
“그래도 그 사이 망가질 수도 있잖아. 더 추가해야 해.”
‘부여 마법이 이렇게 긴장할 시험이 아닌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강의 시험과 달리 부여 마법 시험은 의외로 안전한 편이었다.
버두스 교수가 선량하고 학생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정 넘치는 강의 교수들이 학생들을 위해 관심을 기울일수록 시험 내용이 위험해지는데, 버두스 교수는 별 관심이 없는 덕분에 시험이 안전한 편에 속했다.
“알겠다. 알겠어. 창고에 가져다주면 되잖아. 너희들. 이거 손해인 거 알지? 시험 때 다 못 쓰면 낭비다.”
이한은 기껏 들여온 비축 물자를 너무 낭비하는 친구들이 안타까워서 말했다.
학교를 올해 다니고 말 것도 아닌데 내년에 저 재료들을 구하려면 얼마나 고생을 하겠는가.
하지만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궤짝을 끌고 갔다.
‘푸른 용의 탑 애들은 낭비가 너무 심한 것 같단 말이지.’
혀를 차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탑 학생들이라면 근거 없는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조금 더 계산적으로 행동했으리라.
탁-
“......”
“......”
창고 앞에서 이한은 살코와 마주쳤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궤짝을 안에 쌓아놓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양, 양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 정도면 성도 짓겠다.”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돌아서려고 했다.
“......”
“......”
이번에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궤짝을 들고 나타났다.
“저번에 두고 나온 게 있어서...?”
“야. 조용히 해. 변명하니까 더 창피하잖아.”
“시끄럽고. 들어가기나 해라. 이 낭비하는 놈들아.”
“낭, 낭비 아니거든.”
* * *
해골 교장은 솜털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눈 내리는 교정을 쳐다보았다.
데스 나이트들은 주인의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평소 연말이 되면 매우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는 것이 그들의 주인이었다.
언제나 제국에서 온 감사관들이 아주 사소한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며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잠깐만요. 고나달테스 공. 분명 이 학생들은 제국 금화 383닢을 지원 받았는데, 제국 금화 382닢이 계산에 맞지 않습니다. 어디 간 겁니까? 설마 다른 마법 실험에 쓴 건 아니겠죠?
-그 정도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갑시다! 학생들이 실수할 수도 있지!
-아니 383닢 중에 382닢이 어떻게 사소한 겁니까!
하지만 이번 해는 달랐다.
학교 밖에서 일어난 훈훈한 일화들이 감사관의 차가운 얼음 심장을 녹인 것이다.
덕분에 감사관은 자신의 권한으로 이번 감사는 그냥 통과를 선언했고, 해골 교장은 만족했으며, 데스 나이트들은 흐뭇해할 수 있었다.
매 해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년에도 도시에 현상금 수배범을 풀고 학생들에게 잡게 시켜보면 어떻습니까?
-으음. 학생들은 그냥 그 틈을 타서 도시로 도망칠 것 같은데.
데스 나이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쾅!
무슨 일이냐?
해골 교장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데스 나이트를 힐난하듯이 쳐다보았다.
모처럼 영혼의 평화를 즐기는데 이 무슨?
-큰... 큰일 났습니다.
!
해골 교장의 눈빛이 변했다.
교장 밑에서 헌신하는 데스 나이트들이 큰일 났다고 할 정도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설마 부여 학파 놈들이 사고를 쳤나? 그러니까 내가 사막에 가서 만들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 구교사(舊校舍)가 어떤 건물인 줄 알고 날려먹어! 꽤 비싼 건물이란 말이다!
-아닙니다. 부여 학파 학생들이 날린 게 아닙니다.
그러면? 설마 외출 클럽 놈들이 성벽에 구멍을 낸 건 아니겠지? 얼마 전부터 계속 성벽을 두드리더니...
-외출 클럽 학생들은 전부 징벌방에 가둬놨습니다.
그럼 어떤 게 큰일이란 거냐? 징벌방에 가둔 뚠뚠이?
-그...
데스 나이트는 감히 해골 교장을 쳐다보지 못하고 두렵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이운라데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이번에 감사관을 모시고 온, 에인로가드 졸업생 출신 마법 이운라데.
이운라데 본인이 무슨 사악하거나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감사관을 데리고 잘 떠났어야 할 이운라데가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는 게 매우, 매우 불길했다.
왜?
-그것이... 저도 잘... 주인님을 뵙고 말씀드려야 한다고...
해골 교장 주변의 집기들이 진동하더니 거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비싼 집기들이 박살날 것 같아 데스 나이트들은 다급히 외쳤다.
-주인님. 다른 용건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냥 순수한 인사일수도...
퍽이나 그렇겠군.
해골 교장은 냉정을 되찾았다.
분노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집기를 박살내봤자 스스로만 손해기 때문이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대체 왜 다시 돌아왔는지 들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운라데가 죄인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운라데는 아까 데스 나이트보다 더욱 더 저자세로, 이마를 땅에 붙일 기세였다.
고개를 드시오. 이운라데 각하.
“편... 편하게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교장 선생님.”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운라데는 학창 시절 추억을 둘 사이에 꺼내놓으려고 애썼다.
무슨! 제국의 관료로서 방문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소.
“그, 그래도 제가 교장 선생님 밑에서 학생으로 배웠는데 편하게...”
시끄럽소. 빨리 본론이나 말하시오. 뭐요? 감사를 다시 하게 됐소? 아니면 특별 감사가 결정됐소? 그도 아니면 예산이나 지원금이 축소됐소?
“전부 다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이운라데의 말에 해골 교장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러면? 그냥 학창 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온 건가?
“그건 아니구요... 그... 황제 폐하께서 교장 선생님을 독대하고자 하십니다. 학기 끝나구요.”
왜? 내가 뭘 했다고?
해골 교장은 1학기 끝나고 불려갔는데 2학기 끝나고 또 불려가야 한다는 상황에 격노했다.
자칫하면 제국 관료가 징벌방 가장 깊숙한 어딘가에 처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데스 나이트들이 황급히 변명했다.
-포상, 포상일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크윽.’
데스 나이트들의 말에 이운라데는 속으로 울었다.
이미 1학기 때 자기가 둘러댔다가 무슨 개소리냐며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은 변명이었던 것이다.
포상 같은 소리 하고 있군. 에인로가드 운영하면서 포상을 받아본 적이 몇 번인지 아느냐?
“잘,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학년 수석한 횟수보다 적다!
“그럼... 어... 저, 수석한 적 없습니다만...”
그래. 잘 아는구나.
해골 교장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대체 이번엔 또 어떤 미친 학생이 몰래 사고를 쳤길래?
“그... 교장 선생님.”
더 있나? 자꾸 질질 끌지 말고 한번에 말해라! 한번만 더 질질 끌면 징벌방에 처박아버리겠다!
이운라데는 눈물을 참고 말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학생을 같이 데리고 오라고 하셨... 진짜... 제가 말실수한 거 아닙니다.”
......
-......
너무나도 예상 밖의 말에 해골 교장과 데스 나이트들 모두 침묵했다.
이운라데는 슬쩍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이름도 잊혀진 징벌방 가장 깊숙한 곳에 가는 것보다 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으음.
해골 교장은 분노하는 대신 깊은 고뇌에 잠겼다.
앉아보게.
“예, 옙.”
황제 폐하께서 무슨 생각 같나?
해골 교장은 지금 자리에 있는 데스 나이트들과 이운라데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손짓했다.
-워다나즈 님을 한 번 보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도 워다나즈 님은 에인로가드 학생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나쁘지 않은데.
적어도 졸업생들이 어느 숲을 마경으로 만들었다느니, 재학생들이 의뢰 받고 나갔다가 어느 용병단을 무허가로 박살냈다느니 같은 소식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1학기 때도 황제는 워다나즈한테 관심이 있었으니 직접 보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주인님. 저는 좀 위험하다고 봅니다. 1학기 끝나고 폐하께서 그렇게 말하시자마자 워다나즈는 또 구울의 왕을 잡았잖습니까.
그건 정상참작이 되어야지!
해골 교장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황제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지가 멋대로 모험가들과 손잡고 뽈뽈대며 구울의 왕 잡으러 간 걸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거 말고도 2학기 때 씨 서펜트도 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야 미담 듣고 불렀다지만,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면 주인님에게 화살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선량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를 보는군.
해골 교장은 한탄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의 의견은 타당했다.
못 데리고 갈 이유를 생각해봐라. 보통 겨울 방학에는 학생들이 자기 가문으로 돌아갈 텐데. 그건 어떻지?
이운라데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를 뵙고 가면 되는 거라 안 통할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끝나고 신입생 수색을 돕게 하려고 했는데, 그건?
“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 역효과 아닙니까?”
해골 교장은 이운라데를 노려보았다. 이운라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교장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말씀을 까먹었는데...”
아까 그렇게 다 말하라고 말했는데도? 네가 수석을 왜 못했는지는 알겠다.
“...폐하께서 ‘이상한 핑계대지 말고 그냥 데리고 와라’라고 전해달라고 추신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운라데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해골 교장은 한숨을 쉬며 이운라데를 붙잡았다.
됐다. 이미 이렇게 된 일을 어쩌겠나. 네 잘못은 아니지.
-근데 잘못이 좀 있지 않습니까?
“제발...!”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
이운라데는 데스 나이트들이 정말로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