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그러나 이미 한 번 잃은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
들것에 실려서 내려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믿었던 간식을 사기당한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잉걸델 교수를 노려보았다.
“여러분...”
학생들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다들 미안합니다. 내가 시험의 난이도를 착각했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친구들을 가장 앞에서 끌고 오던 이한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지젤이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자 이한은 변명했다.
“미안. 습관적으로.”
교수가 사과하면 습관적으로 ‘괜찮습니다’가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슬라임들에게 당한 건가?”
기사들은 놀라워하며 물었다.
슬라임에게 당한 것치고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시프팅 슬라임은 허를 찌르는 곤혹스러운 몬스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강력한 몬스터는 또 아니었다.
먼저 당한 학생들이 어느 정도 생겨나면 남은 학생들은 알아서 대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으... 으으.”
“대답해라.”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는 엄격한 목소리로 견습기사를 불렀다.
이번 기말고사는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시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견습기사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장이기도 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저지른 실수는 잉걸델 교수가 훈계할 일이지만 견습기사들의 실수는 기사들이 훈계해야 하는 법.
“변신 계열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걸 알았으면 대응할 방법들이 있었을 텐데?”
시프팅 슬라임 같은 몬스터는 서로 확인된 인원끼리 나눠져서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었다.
참을성이 강하지 못해서 그런 식으로 버티면 언젠가 허점을 드러내는 게 이런 부류의 몬스터였다.
“그... 슬라임한테 당한 게 아닙니다.”
“슬라임한테 당한 게 아니라고?”
견습기사가 눈치를 보며 말하자 기사는 놀라워했다.
“아. 그렇군. 혹시 거인을 마주쳤나?”
“산맥에 거인이 있습니까!?”
견습기사는 깜짝 놀랐다.
그 반응에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경악해하며 수군거렸다.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크흠! 그건 신경 쓰지 마라. 하여간 다른 몬스터를 만난 거라면 이해가 가는군.”
그런 거라면 말이 됐다.
시프팅 슬라임 때문에 학생들의 계획이 변경되고, 급하게 움직이는 사이에 다른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면...
“어떤 몬스터지?”
“그, 실은 말입니다.”
견습기사는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가락은 이한을 가리키고 있었다.
“?”
“워다나즈한테 당했...”
“......”
기사들은 할 말을 잃었는지 침묵했다. 견습기사들도 분위기를 읽고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라.”
견습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이한 일행으로 변신한 시프팅 슬라임들이 워낙 교묘하고 영악해서 학생들을 잘 끌어들였고, 또 이 자식이 그들을 속여서 진짜 이한 일행한테 덤벼들었는데...
“...그, 그렇군.”
“그런데 이 많은 인원이 다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너희들은 왜 쓰러진 거지?”
다른 견습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이한 일행으로 변신한 시프팅 슬라임들이...
“그만! 그만!”
기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전원이 다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다니!
하나나 둘 정도는 그렇게 당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의심을 하고 경계를 하는 게 보통인데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시험은 경쟁인데 아무리 친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다니! 뭘 배운 거냐 대체!”
“워다나즈가 워낙 믿음직해보여서... 크흑. 잘못했습니다.”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들은 반성했다.
잉걸델 교수의 시험이 과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너무 안일했던 거였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돌봤다. 이런 상황에도 대응하지 못하다니.”
“아, 아니...! 이건 저 에인로가드 놈들이 먼저 속아넘어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끄럽다! 어디서 변명이나 하고 있느냐. 돌아가면 훈련이다!”
견습기사들이 혼나고 있는 사이 잉걸델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여러분. 앞으로 다시는 1학년 기말고사로 이런 시험을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아니요.”
“?”
듣고 있던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어떤 미친 학생이 칼 든 교수 앞에서 저런 소리를?
“교수님. 다음 해에도 1학년들한테 이런 시험을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이 시험을 저희만 겪기에는 너무 아쉽습니다.”
“교수님 잘못이 아닙니다! 저희는 교수님의 진심을 이해합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를 갈며 외쳤다.
“여러분!”
“교수님!”
학생들은 잉걸델 교수를 껴안고 감동적인 화해를 연출했다.
이한은 그 모습에 경악했다.
‘아니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자기들 혼자 당하는 게 억울해서 저런 짓을 하다니!?
* * *
‘어라?’
흑마법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르툼 교수의 공방, 흑암관에 도착한 이한은 시험지를 받고 의아해했다.
“교수님?”
“콜록. 왜?”
“어, 이게 다인가요?”
“그래.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한은 경계심 섞인 시선으로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강의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 앉은 가이난도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상한 짓을 하는 친구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보다 못한 라파드엘이 가이난도에게 물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냐?”
“어? 뭐가?”
“워다나즈 말이다. 워다나즈.”
아까부터 워다나즈는 적지에 잠입한 기사마냥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파드엘까지 괜히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혹시 이 주변에 뭔가 있나?
“이한은 원래 저러잖아?”
“......”
라파드엘은 이 황자 놈한테 물어본 걸 후회했다.
‘이 자식은 워다나즈 머리가 사라져도 눈치 못 챌 거야.’
“콜록. 워다나즈 군. 강의실 안에 아무것도 안 숨어있다.”
“그렇습니까?”
이한은 종이 새를 소환해서 강의실 밖을 확인하려고 했다. 모르툼 교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강의실 밖에도 아무것도 안 숨어있다.”
“아. 그렇군요.”
이한은 <오고닌의 감정 인지>를 시전해서 모르툼 교수의 감정 색을 파악해보려고 했다.
그 모습에 모르툼 교수는 그냥 설명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콜록. 저번 중간고사가 너무 요란했었지.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는 간단하게 보는 거다.”
“...설, 설마 학파 시약이 다 거덜나서 이렇게 보는 겁니까?”
이한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번에 선배들이 말한 걸 보면 흑마법 학파는 그렇게 예산이 넉넉한 학파가 아니었다.
저번 중간고사 때도 시약이 모자라서 선배들이 골골댔었는데...
“...콜록, 혹시 선배들이 흑마법 학파에 대해 또 무슨 말이라도 했느냐?”
모르툼 교수는 이 철없는 선배들이 무슨 소리를 했나 의심이 됐다.
설마 파릇파릇한 신입생한테 꿈과 희망을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우리 학파 시약도 없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댔나?
안 그래도 저번에 신입생이 다른 학파 가서 시약 빌려왔다는 걸 듣고 기가 막혔는데...
“어떤 말씀 말이십니까?”
“흑마법 학파의 사정이 곤란하다거나...”
“전혀 그러신 적 없습니다.”
모르툼 교수가 흑마법의 달인이라면 이한은 학생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교수가 묻는 순간 상대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듣던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선배들이 말하기로는...
“어, 우리 학파 개같이 가ㄴ 컥!”
이한은 보이지 않는 자세로 가이난도의 옆구리를 갈겼다. 가이난도는 앞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여튼, 흑마법 학파가 그렇게 곤란한 건 아니다. 쿨럭.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풀거라.”
“예. 감사합니다.”
모르툼 교수의 말에 이한은 약간 안심했다.
별다른 함정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이게 시험인 모양이었다.
물론 이것 또한 속임수일 수 있긴 했다. 이한은 그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적당히 긴장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뛰어난 마법사는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야 하는 법.
다음 중 언데드 계에 살고 있는 생물을 고르시오.
1.스켈레톤
2.퀴네에
3.모래문어
4.록 드레이크
5.그늘 망령
‘흠.’
이한은 문제를 받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쉬워보였지만 이건 함정 문제였다.
‘스켈레톤은 생물이 아니지.’
정답은 ‘이 중에 없다’였다. 이한은 깃펜으로 답을 적고 넘어갔다.
옆에 있던 가이난도는 의기양양하게 이한을 보며 말했다.
“이한. 너무 쉬운데?”
“문제 제대로 본 건 맞지?”
“당연하지!”
‘이 자식. 끝나고 확인해봐야겠군.’
이한은 나중에 가이난도가 스켈레톤을 적어 넣었다면 호되게 혼을 낼 생각이었다.
저런 어린애 장난 같은 함정 문제에 속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한도 참.’
가이난도는 오히려 이한에게 속으로 화를 냈다.
그렇게 같이 공부를 했으면 친구를 믿어야지, 문제를 제대로 봤냐니?
다음 중 언데드 계에 살고 있는 생물을 고르시오.
3.모래문어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모래문어밖에 없었다.
* * *
“저. 교수님.”
네 명 모두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자 라파드엘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가이난도는 아까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먹으며 멀뚱멀뚱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언데드 소환 관련해서 2학기 동안 연습한 걸 확인받고 싶습니다만.”
“컥.”
가이난도는 샌드위치를 뱉을 뻔했다.
“너 미쳤냐!? 시험 끝났잖아!”
“...그래도 소환 연습한 거 확인은 해봐야지. 시험은 원래 그러라고 하는 거다.”
“뭔 이한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미쳤어!?”
이한과 이미르그도 놀라워하며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라파드엘이 저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모르툼 교수가 쿨럭이며 물었다.
“소환수하고 많이 친해진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안 친해졌습니다!”
라파드엘은 깜짝 놀라서 부정했다.
흑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흑마법을 배우는 명예로운 기사 가문 출신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만 모르툼 교수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록. 원래 언데드 소환을 배우는 흑마법사들이 다 그렇지.”
다른 소환수들과 달리 언데드 소환수들은 그 성정이 거칠어 주인의 명령을 잘 듣지 않고 호시탐탐 반역의 기회를 노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인내하고서 훈련시키다보면 어느 순간 언데드 소환수를 수족처럼 쉽게 부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때의 뿌듯함은 감히 다른 소환수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가?’
이한은 모르툼 교수의 말에 의아해했다.
딱히 공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언데드들이 까탈스럽게 구는 것도 구는 거였지만, 언데드들을 소환한다고 해서 성취감이 들지는...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군 이 녀석.’
모르툼 교수는 이한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워다나즈라면 저 말들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최근에 깨달음이 하나 있었나보군... 콜록. 그래. 시간도 남았는데 간단하게 언데드 소환만 추가로 보자.”
가이난도는 짧게 비명을 질렀지만 모르툼 교수는 한 번 결정한 걸 다시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너 이 자식. 대체 왜 이래? 흑마법 싫어했잖아? 싫어하던 너로 돌아오라고!”
“...여전히 별로 안 좋아한다.”
“거짓말하고 있네!! 완전히 거짓말이잖아!! 안 좋아한다는 놈이 이렇게 주렁주렁 준비를 해!?”
가이난도가 라파드엘의 멱살을 잡고 있는 사이 이한은 먼저 하려고 지팡이를 들었다.
‘암흑 원소 스켈레톤 전사가 좋겠군.’
여러 언데드 소환 중 가장 자신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소환수였다.
최근에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덕분에 한 개체만 소환할 경우 무용까지 가능했다.
스켈레톤 무용수라면 분명히 만점...
“콜록. 워다나즈 군.”
“예?”
“자넨 안 보여줘도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