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아니오!
“아닙니까?”
해골 교장의 정색에도 파셀레트 교수는 쉬이 수긍하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에 오래 다닌 학생이 노련해지듯이 에인로가드에 오래 다닌 교수도 노련해지는 법.
그 징조 중 하나는 교장의 말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었다.
...워다나즈 녀석을 데리고 수도에 방문하는 김에 신입생들도 찾으려는 걸세.
“아하!”
파셀레트 교수는 해골 교장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가진 마력이라면 에인로가드의 지맥에서 끌어내는 마력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래도 되나요?”
별 지장은 없을 걸세.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물론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마력이 너무 많아서 저렇게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건 알겠지만,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라면 밖에서 봤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도 좀 신경 써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교장 선생님...”
파셀레트 교수는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교수의 시선 때문에 흔들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에인로가드의 교장이 될 수 없는 법.
왜 쳐다보지? 할 말이 더 있나?
“없습니다. 신입생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내가 신입생들한테 할 소릴세.
해골 교장은 투덜거렸다.
벌써 성가심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영광스러운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에 초대받는 기회는 흔치 않은 만큼 모든 신입생들이 제 발로 달려올 거라고 흔히들 생각했지만, 사실 의외로 달려오지 않으려는 신입생들이 제법 있었다.
제국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 따로 스승이나 마탑을 두고 배우려는 학생부터 시작해서 다른 마법학교를 고민하는 학생들.
그래도 이건 괜찮았다.
학생이 마법에 뜻이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대화를 통해서 부드럽게 설득하면 ‘아, 역시 에인로가드가 좋겠구나’하고 대부분 납득해줬다.
더 까다로운 경우는 마법에 뜻이 없는, 정확히는 마법에 뜻을 두려는 걸 방해하려는 환경에 처한 학생들이었다.
-아니, 우리 집안의 노예를 에인로가드에 보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하! 지금 이 녀석은 <세 마리 쥐> 길드의 일원이오. 놈이 구걸로 벌어오는 돈이 얼마인데 학교로 보낼 수 있겠소?
노예나 범죄자 등 이런 출신의 학생일 경우 그쪽에서 호락호락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이제 해골 교장도 슬슬 말이 거칠어졌다.
-그래도 영광스러운 일이고, 또 값을 치러줄 테니...
-싫소. 열 배를 내놓으시오.
-이 갓 태어난 핏덩이 같은 새끼가 감히 황제 폐하의 마령관이자 마도방벽의 수호자인 내 앞에서 협상을 지껄이느냐? 네놈의 그 짧디 짧은 가문의 핏줄을 전부 멸해버리고 집안은 반석도 남지 않게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자. 네놈 가문의 값은 뭘로 치를 것이냐? 지껄여봐라!
이런 식의 대화를 하고 나면 이제 황제한테 꾸중도 듣고 제국 관료들한테 성토도 당하고...
하여간 신입생들을 데리고 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사실 워다나즈 녀석을 데리고 가려는 건 이런 것 때문도 있지.
“과연. 범죄자들과 싸울 때 보조를 맡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범죄자들 말고, 제국의 시민들을 설득할 때 말하는 거지!
무심코 동의하려던 해골 교장은 황당해했다.
워다나즈에게 기대하는 건 그 특유의 사교력이었다.
귀족 가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도 빠르게 친해지는 그 사교력.
이건 에인로가드의 어떤 선배들도 쉽게 따라하기 힘든 능력이었다.
그런 워다나즈를 데리고 가면 설득할 때 좀 편해지고, 해골 교장 본인도 화를 덜 터뜨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거였지 싸움 보조 맡기려고 데려가는 게 아니었다.
싸움 보조를 맡기려면 가르시아 교수를 데리고 갔지!
“네? 배그렉 교수님이 아니라요?”
그래. 배그렉 교수. 배그렉 교수라고 했지 않나.
“가르시아 교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잘못 들었겠지. 크라어 교수. 자네가 교장이오? 내가 교장이오? 교장이 말실수를 했을까, 교수가 잘못 들었을까?
‘진짜 개치사한 대마법사 같으니라구.’
파셀레트 교수는 불리할 때면 말투 바꿔가면서 권위에 호소하는 해골 교장을 욕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언제나 지위 낮은 사람에게 불리했다. 교수는 이번 해 예지 마법 학파 예산을 떠올리며 분노를 참았다.
“오신 김에 이거나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이번 신입생 기말고사 시험입니다.”
신입생 기말고사 정도는 별 문제 없을 텐데.
해골 교장도 예지 마법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었다.
고학년들 중에 상태가 안 좋아지는 학생들의 숫자를 따져보면 언제나 순위권에 들었으니까.
하지만 신입생 시험 정도라면 그렇게 위험할 게 없었다. 해골 교장은 탁자 위에 깔린 기묘한 장신구와 부적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액막이인가.
미래를 예지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예지 마법사들.
마법사들은 그 대가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나눠서 받기, 대신해서 받기, 예지의 결과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리스크 자체를 줄이기...
그 중 하나가 저런 액막이용 장신구였다.
미래와 밀접하게 연결된 장신구들은 예지의 결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이 대신 그 대가를 치르는 갑옷이기도 했다.
이런 장신구는 다른 아티팩트들과 달리 더욱 더 세밀하고 정교해야 했는데, 조금의 오차라도 있을 경우 바로 예지의 대가가 마법사한테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 워다나즈 녀석은 이걸로 액막이 만들라고 해주겠나?
해골 교장은 생각난 김에 아공간 창고에서 뼈를 불러왔다.
누가 봐도 흉흉하고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나오는 재료에 파셀레트 교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1학년 기말고사에 저런 사나운 재료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다 뜻이 있어서니까.
“교장 선생님. 제가 교장 선생님을 존종하지만, 저 또한 황제 폐하께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이런 개치사한 교수 같으니라구.’
해골 교장은 파셀레트 교수를 속으로 욕했다.
녀석은 이 정도는 사용해야 해. 예지 마법의 강도가 상당해서.
“그런... 그렇습니까? 그냥 약한 예지 마법을 쓰면 되지 않나...”
파셀레트 교수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교수의 다른 인격들이 반박에 나섰다.
-그, 그런 식으로 하면 제자가 흑마법 학파보다 적어질...
-천재한테는 천재만의 비범한 길이 있다니까!!
안팎에서 귀찮게 굴자 슬슬 성가셔진 파셀레트 교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본인이 선택해야죠. 자기만 더 어렵게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텐데요.”
물어봤더니 더 어렵게 보고 싶다더군. 됐나?
“그렇습니까?”
-내가 뭐라고 했...
파셀레트 교수는 다른 인격을 잠깐 억누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동의했다면야...
“알겠습니다.”
큭큭큭.
“방금 웃으신 겁니까?”
크라어 교수. 요즘 귀가 좀 안 좋은 것 같군.
* * *
개인실에서 나온 이한은 수면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잠을 너무 안 자서 이상해졌던 걸지도 모르겠군.”
“......”
티질링 사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을 보는 듯한 경악의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저걸 말이라고?
“만점만 받으면 됐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어. 하하.”
“......”
티질링 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한 앞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변환 마법 시험은... 우읍. 우으읍.”
티질링 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한의 입에 초콜릿을 집어넣었다. 이한은 우물거리며 차를 마셨다.
“변환 마법 시험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으으읍.”
티질링 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앗. 워다나즈 님. 일어나셨군요. 같이 가시죠!”
휴게실 옆 구역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3층 옥숲 강의실을 공략할 방법을 계획하고 있던 시아나 사제는 이한이 일어난 걸 보고 반가워했다.
이런 일에는 언제나 든든한 전력이었으니까.
“우읍 우으읍.”
“같이 가신다니 기쁘... 앗. 티질링 님은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려보려던 티질링 사제는 한숨을 옅게 쉬더니 말했다.
“그, 다들... 꼭 시험 전에 강의실을 그렇게 공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티질링 사제는 꼭 시험 전에 강의실의 이변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결해놔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상황을 봐도 되지 않나?
심지어 그게 다른 학파 시험들을 모두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나??
“만약 우연이거나, 교수님이 실수를 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교수님의 함정이겠지.”
“맞아요. 교수님의 함정일 걸요.”
“나도 교수님의 함정 같소만...”
“!?”
다른 탑 학생들도 아니라 불사조 탑 학생들이 보여주는 반응에 티질링은 당황했다.
평소 사제들이라면 교수를 존중해서 ‘교수님이 실수하셨을수도 있긴 하겠군요’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마치 누군가한테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사제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교수를 의심했다.
“아니. 신기하군.”
이한도 그걸 느꼈는지 놀라워했다. 티질링은 눈을 크게 뜨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느끼셨습니까?”
“그래. 이건 아무래도... 교수님들의 패악질이 도를 넘은 거겠지.”
“......”
“이렇게 순수한 사제들까지 교수님들을 의심하잖아. 얼마나 속였으면 이러겠어.”
“......”
“그렇지? 티질링 사제?”
“...예...”
티질링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사제들이 이렇게 바뀐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이 드넓은 신입생 휴게실이 조용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을 텐데, 이한이 오고 난 다음부터는 서로 이야기하느라(몇몇은 신앙으로 싸우느라) 시끌벅적했으니까.
“자. 교수님의 음모를 해치우러 가자!”
“와아아아!”
“플레맹 님의 이름으로!”
“아글타콰 님의 이름으로!”
* * *
눈을 붕대로 가린 창고지기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밤중에 몰래 주방과 창고를 털다보면 들려오는 걸음소리.
그 걸음소리에 한 번 걸리면 도망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공포의 대상인 창고지기는 지금 매우 못마땅한 기색으로 옥숲 강의실 앞에 서있었다.
해골 교장의 숲지기를 맡고 있는 비자나무 정령은 매우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잘못... 했습니다...
에인로가드 본관 교내에 위치한 해골 교장의 숲들을 관리하는 숲지기 입장에서, 옥숲 강의실 앞이 밀림으로 변한 건 불행한 실수였다.
해골 교장이 지시한 식물 몇 종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과정에서 실수로 씨앗을 흘린 것이다.
다른 지역에 흘린 씨앗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회수를 했지만 몇몇 지역은 결국 밀림화가 되어버렸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순찰 경로가 망가진 창고지기는 매우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빨리 해결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숲지기는 사과하고 사과해서 간신히 창고지기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밀림이... 뭐 어때서...
창고지기가 돌아가고 나자 비자나무 정령은 안 들리게 투덜댔다.
물론 조금 길을 헤맬 수야 있겠지만 평범한 본관 복도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이 밀림을 어떻게 치울지 고민하던 비자나무 정령의 귓가에 새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1학년 학생들이었다.
‘돌려보내야...’
앞에 나무를 세워서 신입생들을 돌려보내려던 숲지기는 뒤늦게 이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다른 창고지기나 첨탑지기가 종종 이야기하던 주인님의 제자가 분명했다.
-도와주러... 왔...?
불쑥 나타난 비자나무 정령의 모습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이한은 자신의 뒤로 숨으려다가 넘어진 사제들을 일으켜 세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성함이...?”
-나는... 숲지기지... 그보다... 도와주러 온 건가...?
이한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불법침입한 것을 들켰을 때 가장 적절한 대답은?
“예!”
-역시...! 종종 들었어...!
“...?”
이한은 상대가 자신을 아는 것 같자 살짝 불길해졌다.
왜 실수를 한 기분이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