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괜히 섣불리 대답했나?’
이한이 빠르게 대답한 건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였다.
기말고사 이전에 미리 도착해서 시험을 끝내려는 게 떳떳한 태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무 정령의 반응은 이한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뭐지?
“저를 아십니까?”
-주인님한테...
나무 정령 특유의 느릿하고 묵직한 목소리.
이한은 주인님이 해골 교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 중 하나인가?’
그런 거라면 이야기를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한은 살짝 안심했다.
-...들었지.
“아. 예. 그렇군요. 그런데 도와주러 왔냐는 건... 혹시 이 밀림을 관리하시는 겁니까?”
비자나무 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보다는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치워야 하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숲지기는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리도 어떻게 보면 관리에 가까웠고.
‘아니. 운이 좋군.’
이한은 지금 행운에 감탄했다.
이 밀림을 관리하는 숲지기의 도움을 받는다면 쉽게 밀림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밀림의 비밀만 확인한다면...!
“시아나 사제. 샤루칼 사제. 행운이다.”
“완벽히 이해했어요.”
“일 도우러 온 척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사제들은 이한의 말뜻을 이해하고 빠르게 거짓말을 할 준비를 했다.
일을 도우러 온 사람인 척하고 숲지기를 따라 밀림의 길을 확인한다!
그 해맑은 모습에서는 사제로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고집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한은 문득 멈칫했다.
‘사제들이 이렇게 거짓말에 익숙해져도 되나?’
그리고 1초 후 다시 생각했다.
‘에인로가드에 적응하고 좋지 뭐.’
“그럼 가자!”
이한과 학생들의 모습에 비자나무 정령은 흐뭇해했다.
분명 기말고사 기간일 텐데 시험과 아무 상관없는 밀림 정리를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다니.
정말 착한 학생들이었다.
* * *
이번에 해골 교장이 들여오라고 했던 식물 몬스터 중 하나인 아발타라의 특징은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이었다.
씨앗 하나만 던져도 순식간에 주변을 밀림으로 만드는 강한 힘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아발타라를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밀림 속에 자리 잡은, 핵 역할을 하는 식물들을 제거해야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발타라가 딱히 침입자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잡아먹는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몬스터도 아니었으니까.
잘못 자극하면 자극할수록 아발타라는 더욱 더 울창하게 밀림을 피어 올려 침입자를 밀어낼 것이다.
숲지기는 느린 말투와는 달리 밀림 안에서는 미끄러지듯 빠르게 움직였다.
-여...
“이 나무요?”
“이 나무가 뭔가 있는 겁니까?”
-기...
“......”
-를...
학생들은 기다리다 못해 숲지기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파...
숲지기는 오늘 이미 충분히 말을 많이 했다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추측했다.
“여기를 파?”
“파괴하란 건가?”
“파악일 수도 있는데?”
“파헤치란 걸 수도...”
-괴...
“부수라는 거였군!”
답을 얻은 학생들은 바로 지팡이를 뽑아서 휘둘렀다.
샤루칼은 주변의 나뭇가지를 뽑아들어 끝을 도끼날로 바꿨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휘둘렀다.
캉!
“어... 어엇.”
샤루칼은 당황스러워했다.
마치 단단한 바위를 도끼로 친 것처럼 강한 반탄력이 돌아와 손을 저릿하게 만든 것이다.
“평범한 나무가 아닌 것 같군.”
이한의 말에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비켜보세요.”
“잠, 잠깐만. 한 번만 다시...”
“아. 한 사람당 한번씩이라구요. 비켜요. 빨리.”
‘그런 규칙이 있었나?’
이한은 의아했지만 시아나는 샤루칼을 밀어내더니 물약병을 하나 꺼냈다.
“죽어라!”
“오오오!”
사제들은 뒤에서 응원의 함성을 질렀다.
이한은 그걸 보고 아까 했던 생각을 다시 했다.
‘사제들이 이렇게 전투적이어도 괜찮나?’
치이익-
시아나가 뭘 조합해서 갖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유독한 액체가 나무의 뿌리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무는 그래도 시드는 기색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우우! 비켜라! 비켜라!”
“아, 진짜!”
“다음은 시센자 교단의 힘을...”
“실패하면 시센자 교단의 힘이 약한 걸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불...
사제들이 활발하게 떠드는 동안 숲지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아나는 그걸 듣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화염! 화염을 쓰라고 하시는데요?”
“괜찮나?”
사제들이 화염을 몰라서 안 쓴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밀림이고 주변에 어떻게 번져나갈지 모르는 만큼 화염을 자제했던 거였다.
칙-
“잘 안 타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화염을 불러오지.”
사제들이 나무 주변에 불이 붙어도 그리 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자 이한이 지팡이를 들고 나섰다.
아무래도 파괴해야 할 나무가 생각보다 강한 방어력을 가진 만큼, 이한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주변에 번지지만 않는다면야.’
이한은 오랜만에 화염 마법을 쓴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집중했다.
“타올라라...”
강력한 마력을 머금은 화염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순간 폭발적으로 번질듯 일렁이던 화염은 간신히 통제를 되찾아 나무의 겉껍질에 작렬했다.
다른 수단들은 버텨내던 나무였지만, 이번 화염은 버티지 못했다. 천천히 화염이 퍼져나가더니 나무를 휘감았다.
사제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역시!”
“플레맹 교단의 힘이죠!”
“아프하 교단이지!”
“둘 다 아닌...”
이한이 다투는 사제들을 말리는 사이, 숲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은 소용없다는 거였는데...’
원래 숲지기는 불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학생들한테 하려고 했었다.
도끼를 휘두르고 물약을 부었으니 이제 화염을 쓸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발타라는 영역의 핵이 되는 나무는 상당히 철저하게 보호했다. 도끼든 물약이든 화염이든 통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나무를 제거하려면 먼저 밀림의 다른 영역과의 연결을 끊은 후 나무의 생명력을 흡수해 방어를 약화시키고, 특수한 주문으로 약점을 찌르는 게 정석이었는데...
눈앞의 1학년은 그냥 힘으로 불을 질러서 태워버렸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숲지기는 당황하거나 놀라워하는 대신 그냥 눈을 끔뻑였다.
원래는 어떻게 처리해야 했다고 말해주려다가 귀찮아진 숲지기는 다음 방향을 가리켰다.
-다음...
“예. 다들 이동하자.”
학생들은 원래는 불로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움직였다.
“역시 화염이 답인가봐.”
“니기소르 사제한테는 비밀로 하죠 우리?”
-장소로...
* * *
“밀림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이한은 끈기 있게 물었다.
에인로가드에 들어오고 나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모든 지식은 언젠가 그 쓸모가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숲지기의 뒤를 쫓으면 된다지만 나중에는 혼자 밀림에 덩그러니 떨어질 수도 있었다.
-기운을...
“기운이요? 아. 아까 핵이 되는 나무는 다른 식물들과 구분되는 방어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뿜어내는 기운도 구분될 테니, 그 차이를 파악하고 기억해둔 다음 지표 삼아서 이동하란 겁니까?”
숲지기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숲지기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기특한 1학년!
“과연.”
“아니, 아니, 아니.”
옆에 있던 시아나 사제가 당황해서 끼어들었다.
“뭐에요 방금??”
“응?”
이한은 의아해했다.
시아나 사제가 못 들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아나 사제. 마법에서 마력의 흐름을 느끼는 것처럼 이 밀림에서도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잖아? 복잡하고 난잡해서 의미 없어 보여도, 그 중에서 지표를 삼을 만한 마력의 패턴이 있는 거지. 아까 파괴한 나무가 그런 거고.”
“그걸 어떻게 감지하고 기억하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중에 물어볼게요.”
시아나 사제는 대체 이 무질서한 마력의 흐름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마력의 패턴을 잡아내고 파악할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아마추어스러운 질문을 던지기에는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과 꽤 친해진 상태였으니까.
아마 본인만의 신비하고 특수한 능력으로 해결한 게 분명했다.
아니면 가문에 내려오는 사악한 비전 마법일수도 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방금 혹시 텔레파시로 대화한 거 아니죠?”
“어. 아닌데. 그런 것처럼 보였나?”
“텔레파시로 대화한 것 같았습니다.”
“텔레파시로 대화한 거 아니었습니까?!”
“......”
이한은 사제들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어째서지?
* * *
그 뒤로도 이한 일행은 숲지기를 따라다니며 시키는 일들을 착실하게 도왔다.
그러면서 밀림 안에서 길을 찾는 법, 위험한 식물을 알아보는 법, 식물을 제거했을 때 쓸만한 부분을 챙기는 법 등등을 숲지기로부터 배웠다.
“배... 배웠나요?”
“저걸 배웠다고 할 수 있나?”
사제들은 수군댔다.
저건 숲지기가 가르쳤다기보다는 숲지기를 앞에 세워놓고 이한이 혼자 깨달은 것에 가까웠다.
숲지기 대신 찌그러진 바위나 가이난도를 세워놨어도 비슷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사제들이 그렇게 수군대는 것도 모르고 앞에서 걷던 이한은 무언가를 깨닫고 멈칫했다.
‘잠깐. 이상한데.’
생각해보니 이 밀림을 관리해야 하는 숲지기였다.
그런데 숲지기는 밀림을 관리하기보다는 특정 나무들을 파괴하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숲은 그 나무들 중 일부가 오염된 탓에 위험해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나무에 역병이라도 옮으면 다른 나무들로 순식간에 번져가는 만큼 이럴 때는 병에 걸린 나무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숲지기가 파괴하는 나무들은 그런 나무라기보다는 영역의 핵심이 되는 나무들 같았다.
마치 이 밀림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것 같은 움직임.
‘밀림을 없애면 우리한테도 나쁘진 않긴 한데... 뭐지? 여기 계속 두기는 좀 그런 건가?’
이한은 숲지기가 왜 밀림을 없애는지 의아해했다.
학생들이 불편해서는 절대 아닐 테고...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마지막 나무에 도착했다. 숲지기의 지시에 따라 이한은 화염으로 나무를 태워버렸다.
그 순간 밀림의 식물들이 갑자기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빠르게 감은 것 마냥 수풀들이 시들고,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졌으며, 나무는 땅으로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씨앗으로 뭉쳤다. 마치 여기 있던 밀림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어... 정말 밀림을 제거하려고 오신 거였습니까?”
-?
숲지기는 오늘 처음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주인님의 제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밀림을 제거하려고 왔지 그럼 무엇 때문에 여기 왔단 말인가?
끼이익-
밀림이 사라지자 드러난 강의실의 문을 열고, 안에서 욘라모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치웠어요? 고마워... 어, 이한 군? 다른 학생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죠?”
욘라모 교수는 강의실 앞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아직 시험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잠깐, 설마 밀림을 같이 치웠나요? 고맙긴 한데, 기말고사 기간인데 시험 준비하지 왜...”
“교수님, 어, 이 밀림 돌파도 시험 아니었습니까?”
사제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들 불길한 기분을 느꼈는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말고사는 팔을 변신시키는 거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아니, 혹시 내가 말 안 했나요?”
“......”
“......”
-고... 마... 워...
썩어가는 얼굴의 학생들을 내버려둔 채, 숲지기는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훌훌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