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살짝 상처받은 이한은 친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너희 혹시... 내 미궁에는 별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건가?”
“무, 무슨 소리야, 워다나즈!?”
“아닌데? 들어가고 싶은데?”
학생들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한과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 말고 다른 놈이 들어가 줬으면...!’
일 년 동안 이한과 같이 하면서 1학년 학생들은 어느 정도 파악을 한 상태였다.
이번 환상 마법 기말고사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던전은?
100% 확률로 워다나즈가 만든 던전이었다. 이건 예지 마법을 듣지 않는 학생도 예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가장 난이도 높은 수준이라면 다행이지, 1학년 수준을 뛰어넘는 워다나즈 가문의 비전 미궁 같은 걸 만들어서 친구들을 초대한다면...
“...너희들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의 미묘한 시선 교환으로 속마음을 파악한 이한이 재빨리 대응에 나섰다.
이럴 때는 화를 내서는 안 됐다. 상냥하고 너그럽게 친구들의 두려움을 달래줘야 했다.
“난 미궁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 생각이 없다.”
“하!”
“푸핫핫!”
“......”
“미, 미안. 그, 그냥... 본능적으로 튀어나왔어.”
방금 웃음을 터뜨린 친구들은 이한의 눈빛을 보고 다급히 사과했다.
사과를 안 했다가는 워다나즈의 특제 미궁에 가장 먼저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샘솟았던 것이다.
“친구들아! 내가 왜 미궁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겠니? 잘 생각해봐라.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인데.”
이한은 평소 안 쓰던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방금 웃은 두 친구의 어깨 위에 팔을 하나씩 걸치자 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이 통하는 거 같자 이한은 흐뭇한 마음으로 못을 박았다.
“다들, 내가 미궁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어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봐라.”
“워다나즈잖아.”
“그냥 넌 원래 그랬잖아.”
“전 학파 수강하잖아.”
“예지 마법 시험 때도 혼자 다른 거 봤다면서.”
“산술 시험도.”
“일반 마법 시험도.”
바로 즉시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대답에 이한은 후회했다.
‘젠장. 마지막은 묻지 말걸.’
“워다나즈...”
키르민 교수는 이한을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스승을 닮는 게 제자라지만 볼라디 교수의 이런 면모까지 닮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 다들 진정! 다른 학생의 미궁에 들어가는 순서는 내가 정해줄게.”
“워다나즈는 푸른 용의 탑이니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들어가면 어떨까요?”
“이 자식들이... 워다나즈는 지금 불사조 탑에서 머물고 있거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하고 계속 학교를 탐사하던데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가장 잘 탐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흰 호랑이 탑 놈들 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서로 의견을 나누던 학생들은 랫포드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이유는?”
“딱히 없는데요? 그냥 보내고 싶어서...”
“이런 미친놈이!”
최소한의 성의도 없이 죽음의 개미지옥으로 자신들을 보내려는 랫포드에게 발끈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다.
키르민 교수는 정리에 들어갔다.
“진정하라니까! 내가 지금 정해줄게.”
각 탑 학생들은 긴장한 시선으로 교수를 쳐다보았다.
과연 어느 저주 받은 학생들이 워다나즈의 미궁에 들어가게 될 것인가?
“다른 학생 미궁에는 모두 다 같이 한 번 씩 방문할 거야. 다들 알겠지?”
“......”
“......”
키르민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침묵했다.
교수는 학생들이 바로 납득한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학생들은 바로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웠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네놈들이 희생해서 들어가면 되는 일을!”
“닥쳐! 그럴 거면 지금이라도 네놈들이 들어가!”
키르민 교수는 한숨을 쉬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환상 마법에 당한 학생들이 허우적거리며 서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최선을 다하겠다.’
원래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시험은 조금 더 최선을 다하게 될 것 같았다.
* * *
“...야, 누가 워다나즈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자극하지 말자고 했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이한의 헛간을 쳐다보았다.
현재 환상 마법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각자 맡은 헛간을 간이 미궁으로 개조하기 위해 교수의 공방 주변에 모여 있었다.
숲에서 추가 자재를 모아서 갖고 나오는 학생, 헛간 주변의 땅을 파고 기초공사를 하는 학생, 아티팩트를 박아 넣고 제대로 효과가 나오나 확인하는 학생...
그리고 아예 헛간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학생도 있었다.
“어. 그래. 조금만 더. 아니. 이쪽으로. 그래그래. 잘했다. 고나달테스.”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 고나달테스까지 불러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기존 헛간은 제약이 많았다.
구조도 단순하고, 자재도 나무나 돌 혹은 짚 정도가 전부라 마법을 잘못 걸었다가는 헛간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하 창고에 설치된 함정들은 보고 배울 점이 많았다.’
이한은 이번에 흑마법 학파 선배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하 창고에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계 마법 함정들.
그 함정은 단순히 강력한 마법들을 엮어놨다고 완성도가 높은 게 아니었다.
다른 함정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집요한 악의가 있기에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상대를 막고야 말겠다는 악의!
‘마법의 강함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마법이 어떻게 연계되느냐가 중요한 거지.’
이한은 마도서를 뒤져가면서 어떤 환상 마법들을 연계시킬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새로 작업한 헛간의 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뼈대라는 말에 어울리게 정말로 뼈로 골조를 구성한 헛간이었다.
“공간이여, 뒤틀려라!”
입구로 들어오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여러 개로 보이게 만드는, <하급 공간 왜곡> 환상 마법.
뼈대부터 바꾼 덕분에 깔끔하게 걸리는 마법을 보고 이한은 흐뭇해했다.
‘시작이 괜찮군.’
“워... 워다나즈.”
“?”
뒤에서 흰 호랑이 탑 학생 몇몇이 말을 걸어왔다. 손에는 양념을 발라 구운 닭 통구이가 들려 있었다.
“이거 먹고 하라고.”
“???”
이런 상황에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절대 넘겨주지 않는 고기류를 선물한다고?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독을 탔군. 비겁한 놈들.”
“무슨 말을! 아니야!”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진심을 의심받은 것에 격분했다.
각 탑마다 물자의 가치는 조금씩 달랐다. 불사조 탑에서는 밀랍이 비쌌고, 푸른 용의 탑에서는 잉크가 비쌌으며, 검은 거북이 탑에서는 커피가루와 찻잎이 비쌌다.
그리고 흰 호랑이 탑에서는 고기가 비쌌다.
그런 귀한 고기를 구워왔는데!
“너희들이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일하는 나를 한 번 대접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고기를 구워왔다고?”
“...그, 그건 아니고.”
“그렇게까지 신랄하게 말할 건 없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온 이상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워다나즈. 부탁이 있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나 봐라.”
“...미궁에서 안전한 길 좀...”
“......”
이한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을 보는 경멸의 눈빛으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가서 너희 미궁이나 잘 만들어.”
“아, 아니...! 통통한 닭 한 마리에 이 정도면 너도 이득이야! 아무 손해도 없잖아!”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저런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고 있다니.
‘저러니까 흰 호랑이 탑에 낙제생들이 많은 거지.’
모라디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다 저런 놈들이...
“워다나즈. 워다나즈.”
“이한. 우리한테만 안전한 길 좀...”
“...고나달테스. 앞으로 헛간에 접근하는 놈들 있으면 뼈 던져버려라.”
“악! 이럴 것까진 없잖아! 그냥 서로 타협하자는 건데!”
방해꾼들을 쫓아내고 나서야 이한은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헛간의 벽을 덮고, 텅 빈 안쪽에 복도를 만들고, 또 그 밑에 떨어지는 함정을 파고...
‘흠. 벽에도 뭘 깔아볼까?’
이것도 하다 보니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흑마법 학파 선배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함정을 깔았는지 알 것 같다!
“워다나즈 님.”
“랫포드? 안전한 길은 못 가르쳐주는데.”
“후후.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헛간 문 밖에서 랫포드가 자신감 넘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대답에 이한은 랫포드의 출신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아. 하긴. 이런 간이 미궁 정도야 너는 눈감고도 해결할 수 있겠...”
“꾀병으로 위장해서 안 들어갈 겁니다. 벌써 꾀병용 물약도 준비해놨습니다.”
“...안전한 길 가르쳐줄 테니까 그냥 들어올래?”
“예? 싫습니다.”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져서 헛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지?”
“아. 안개구름버섯을 좀 따오려고 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마법 중에는 시전할 때마다 시약을 필요로 하는 마법들이 있었다.
흑마법 중에서 뼈 원소 마법들은 뼛가루가 필요했고, 다른 학파에서도 이런 시약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꽤 찾을 수 있었다.
안개구름버섯은 환상 마법 중 <저녁의 박명>을 시전하는 데에 꼭 필요한 시약.
“저녁의 박명을 시전해보려고? 꽤 난이도가 있을 텐데?”
“교수님께서 해볼 만하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워다나즈 님은 이미 준비가 다 되신 것 같은데...”
랫포드는 뼈 헛간의 겉모습을 훑어보았다.
다른 헛간과 달리 겉모습 자체가 음산하고 사이했다. 어지간한 도둑들도 저런 곳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냐. 저녁의 박명까지 시전하면 좋겠군. 같이 가자.”
“이미 진짜 충분한 것 같습니다만...”
“아냐. 아직 부족해.”
이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헛간에 몰래 들어가려고 했던 학생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스켈레톤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뼈를 던져댔다.
“쟤가 겁이 많은 거야.”
“......”
* * *
안개구름버섯을 캐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의 산맥은 하늘산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높았지만, 그건 깊숙한 곳의 이야기였고 본관 건물 가까운 쪽에는 비교적 낮은 산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산들에 대해 가장 빠삭한 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었다.
남는 시간에 각종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확인하고 작은 짐승들을 잡는 덫을 설치한 덕분이었다.
랫포드는 이미 안개구름버섯이 있는 버섯 군락의 위치를 파악해놓았고, 이한은 그 뒤만 편하게 따라가면 됐다.
“아니 워다나즈 너는 대체 왜?”
“워다나즈. 우리야 힘이 부족해서 시약을 쓴다지만 넌 충분하잖아!”
“그냥 지금으로도 충분해! 괜히 고생하지 마! 다른 학파 시험도 준비해야지!”
...군락 가는 길에 만나는 학생마다 저런 소리를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은.
저런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한의 마음속에는 간이 미궁을 지옥의 미궁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결심만 굳건해졌다.
“야... 워다나즈 눈빛 좀 봐...”
“누가 워다나즈 성질 긁었냐? 누구야?”
“그러니까 아까 말할 때 자원했어야 했다니까. 화났잖아.”
학생들은 수군거리며 지금이라도 산제물을 바쳐야 하나 고민했다.
“괴물이다!!!”
“?!”
앞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방심했다!’
친구들을 미궁 속에 영원히 가둬버리겠다는 생각에 빠져 에인로가드의 산맥에서 긴장을 풀다니.
치명적인 실수였다.
게다가 지금 이한을 쫓는 괴물이 하나 있지 않은가.
“다들 이쪽으로!”
이한은 빠르게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대형을 짰다. 학생들은 겁에 젖은 얼굴로 물었다.
“뭐, 뭐지? 워다나즈? 괴물이라니?”
“흡혈괴물일 거다. 다들 침착...”
쾅!
저 앞의 나무가 날아가고 거대한 야수가 허공을 날아 착지했다.
낯익은 짐승의 모습.
그건 바로 산맥파괴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