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대체 어떻게 거인들을 불러온 거지?’
이한은 놀랐다.
데스 나이트 대신 거인들을 불러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산은 본관 지하 심층 창고에 거인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으니까.
대체 어떻게?
“워다나즈! 살려줘!!”
“......”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아산은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는 달리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도움을 요청하러 나갔다가 거인 군단의 습격을 맞이하면 어느 누구라도 저럴 수밖에 없었다.
‘거인들을 불러온 게 아니었군...’
그냥 데스 나이트들을 부르러 갔다가 거인들을 만난 거였다.
-우리가 살려주겠다!
-도우러 왔다 마법사!
아산 뒤에 있던 거인들은 화답하듯이 외쳤지만 아산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지금 아산에게는 거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널 잡아먹겠다’처럼 들렸다.
“...고맙습니다!”
“워, 워다나즈! 날 먹이로 버리려는 거야?!”
아산은 울상이 되어서 외쳤지만 이한은 그 오해를 풀어줄 시간도 없었다.
흡혈괴물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깨닫고 쉽게 잡을 수 있는 다른 학생들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거인들의 도움이라도 감지덕지였다.
“전위를 맡아주십시오!”
-알겠다!
거인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마법사 앞을 막아섰다.
원래 전사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연약한 마법사를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인들인 만큼 움직임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잡아먹힐 걸 두려워하고 있던 아산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가는 거인들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어?”
“아산! 대형으로 들어가라! 따로 나와 있으면 위험하다!”
“어, 어어. 저, 저기가 더 위험하지 않...”
솔직히 겉으로만 보면 거인들이 흡혈괴물보다 더 무서웠다.
아산은 얼빠진 모습으로 친구들 사이에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친구들도 비슷하게 얼빠진 얼굴이었다.
“거... 인들이 이러는데 괜찮은 거야?”
자기가 이상한 건가 싶었던 아산은 친구들의 반응에 퍽 안심이 됐다.
그래도 아산은 먼저 놀란 덕분에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들 침착하게 행동해. 지금 중요한 건 저 흡혈괴물을 잡는 거잖아.”
“아니 거인이 앞에 있는데!?”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라면 거인 정도는 적응을 해야지.”
“그, 그런...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쾅!
흡혈괴물이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지하 창고에서 순순히 물러날 때와는 달랐다.
지금처럼 탁 트이고 이용할 지형지물이 많은 상황에서는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흡혈괴물은 현란한 공중기동을 선보이며 거인에게 공격을 날렸다.
-억!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거인은 비틀거렸다. 흡혈괴물은 더욱 더 가속해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꼬리로 거인의 살가죽을 찢어발기려고 했다.
-악!
거인은 붉게 자국이 남은 팔뚝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다른 거인들이 야유했다.
-양처럼 비명 지르지 마라! 부끄럽다!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물론 가장 분노한 건 흡혈괴물이었다.
자신한 공격이 살가죽 하나 찢지 못하다니.
흡혈괴물의 형태가 더욱 뒤틀리더니 날카롭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팡!
흡혈괴물의 움직임은 흐릿한 잔상만을 남길 정도로 빨라졌다. 연달은 공격에 거인은 웅크리며 급소를 보호했다. 상대가 보여주는 수비적인 모습에 흡혈괴물은 더욱 더 기세가 올라서 공격을...
콰직!
흡혈괴물이 그대로 으깨지며 날아갔다. 몸을 웅크렸던 거인이 교묘하게 몽둥이를 휘둘러서 날려버린 것이다.
-으하하!
-속았다, 멍청이 놈! 속았다!
-둘러싸라! 도망 못 치게 해!
‘대단하다!’
이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거인들은 속도로 정직하게 승부하면 흡혈괴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겁먹은 시늉으로 흡혈괴물을 방심하게 만들고, 놈의 움직임이 단순해지게 만들었다.
-간다! 3점이다!
-이번에는 내가 간다! 이건 5점이다!
-5점 같은 건 없다!
-내가 치면 있다!!
거인들은 몽둥이로 공을 날리듯이 흡혈괴물을 쳐서 서로에게 보냈다.
흡혈괴물은 커다란 타격에서 재생하느라 반격하지 못했다.
그 사이 한숨을 돌린 이한은 필요한 마법을 다시 걸고 암흑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했다.
“샤르칸. 가이난도를 데리고 와라!”
지금 흡혈괴물이 정신이 없는 상황이 기회였다. 녹주옥 표범은 빠르게 질주해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그리고는 가이난도의 외투를 물고 홀린 듯 늘어지기 시작했다.
“...샤르칸!!”
이한은 소환수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평소에 안 저러던 녀석이 저러니 더욱 그랬다.
샤르칸은 주인의 외침을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가이난도를 물어 올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다 봤다.”
-크르릉...
샤르칸은 주눅 든 눈빛으로 주인의 시선을 피했다.
‘대체 이 외투가 뭐라고?’
이한은 싸움이 끝나면 꼭 이 외투를 모르툼 교수한테 가지고 가서 정밀감정을 맡기겠다고 다짐했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그 순간 외투를 빼앗긴 걸 알아차린 흡혈괴물이 오늘 보여줬던 가장 처절하고 살벌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분노로 폭주한 흡혈괴물의 재생력이 몇 배로 빨라졌다. 몽둥이로 맞아서 날아가던 도중 재생을 끝낸 흡혈괴물은 날개를 만들어서 허공으로 빠져나왔다.
-어엇!
-저 양처럼 교활한 놈이 속임수를!
-돌아와라!
“앞을 막아주십시오. 놈이 외투를 다시 노릴 겁니다!”
-외투?
“놈이 이 외투를 노리고 있습니다!”
거인들은 이한이 손에 든 가이난도의 외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질색했다.
-으어!
-기분 나쁘다!
-이런 거 들고 있지 마라! 저주받는다! 마법사!
거인들은 이한의 손에서 외투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한은 흡혈괴물이 아까 지를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살벌한 비명소리를 내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외투가 찢어진 걸 본 흡혈괴물은 에인로가드의 가장 외진 곳까지 들릴 법한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으, 귀가!
-저 놈 저거 미쳤다!
원래 제정신이 아닌 흡혈괴물이었지만 거인들 기준에서는 미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흡혈괴물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득, 꾸드득, 콰득!!!
그나마 몬스터 같은 형태를 갖다버리고 거대한 슬라임 같은 부정형의 모습으로 덩치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축적한 피를 폭주하듯이 소모하는 건가?’
원래 혈액은 마법에서도 강력한 시약에 속했다. 그 자체가 가진 신비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주인의 영혼과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 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흡혈 계열의 몬스터들은 이런 피를 자신의 동력원으로 사용했다. 흡혈괴물이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재생력도 쌓아놓은 혈액을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흡혈 계열 몬스터들에게 피는 자신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저런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덩치를 부풀리는 데에 쓰는 건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완전한 폭주!
‘아니 외투 하나 때문에 저렇게 미쳐 날뛰는 게 말이 되나?’
이한은 두려움보다 황당함이 앞섰다.
데스 나이트들한테 맹공을 받고, 거인들한테 공처럼 날아가도 끈기 있게 버티던 놈이 외투 하나 찢어졌다고 앞 뒤 가리지 않고 폭주하다니?
이한은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놈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온다!
흡혈괴물은 거인을 뛰어넘는 거대한 몸집을 휘둘렀다.
미리 예지에 성공한 이한은 다급하게 외쳤다.
“두 걸음 뒤로!”
-거인은 물러나지 않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거인은 호기롭게 몽둥이를 세우며 공격을 받아내려고 했다.
쾅!
그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한 거인이 뒤로 날아가 옆 건물에 처박혔다.
그리고 거인의 어깨 위에 있던 이한도 졸지에 같이 날아갔다.
* * *
치유 마법 학파의 고학년 학생들에게 시험이란 건 언제나 실전에 가까웠다.
-오늘 중간고사는... 잠시만 기다려봐라... 흠. 마른 폭포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군. 마른 폭포 마을로 간다.
-오늘 기말고사는 붉은 호수 사막에서 본다. 기사단 하나가 반파됐다는군.
-잠깐. 오늘 중간고사 내용이 추가됐다. 옆 마을에도 전염병이 퍼졌다. 빠르게 끝내고 그쪽으로 이동하지.
...이렇듯 교내보다는 교외에 시험으로 쓸 수 있는 교보재들이 널려 있는 만큼 치유 마법 학파의 시험은 실전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도 실낱같은 생각 하나가 꾸준히 내려오고 있었다.
혹시...
혹시 언젠가, 주변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 마법 시험도 그냥 넘어가는 것 아닌가?
“...다들 침착해.”
“침, 침착하고 있다.”
“지금 교수님이 아무 말도 없으신 거 맞지?”
“그런 것 같은데... 쉿! 의식하지 마. 괜히 불운이 올 수 있다.”
알카시스 교수는 회중시계를 한 번 힐끗 보고, 양피지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그 모습에서 학생들은 아직까지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학생들의 염원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알카시스 교수는 회중시계의 덮개를 닫았다.
그리고는 피곤으로 반쯤 쉰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시험은 간단하게 구두시험으로...”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구르고 박수를 쳤다.
“소리 지르지 마라. 머리 울리니까.”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체력 낭비하지 말도록. 부산스러운 치유 마법사는 험한 꼴을 당한다는 격언을 잊지 마라.”
“예...”
살짝 주눅이 든 치유 마법 학생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만이 남아있었다.
치유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이런 일이 얼마나 된다ㄱ...
쾅!
순간 강의실 벽이 무너지더니 거인의 상반신이 쭉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학생들은 기겁해서 거리를 벌렸다.
-으아. 하늘이 돈다!
“거, 거인의 습격이다!?”
그러는 사이 거인의 어깨 위에 있던 학생이 뛰어내려서 착지했다.
그리고는 알카시스 교수를 발견하고 외쳤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지금 웬 미친 괴물이 저희를 습격해서!”
“기말고사치고는 너무 심한 것 같은데.”
“기말고사가 아닙니다!”
이한은 거인의 뺨을 치며 외쳤다.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셔야 합니다!”
-어지러워서 못 일어나겠다...
알카시스 교수는 거인을 한 번 보고 이한을 한 번 본 다음 이한의 선배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았다.
그 눈빛에 치유 마법 학생들은 갑자기 불길해졌다.
“다들 거인 치유해본 적 있나?”
“......”
“......”
“없나보군. 좋은 기회다. 다들 지팡이 들고 이쪽으로.”
학생들은 슬픈 얼굴로 거인에게 다가왔다.
물론 이한의 눈에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증상은 보통 뇌와 평형기관의 문제다. 원래라면 확인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해야 하겠지만 거인들은 강한 마법저항력을 갖고 있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한은 알카시스 교수가 자신에게 물어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다른 선배들이 이 근처에 있겠거니 생각해서 가만히 서있었다.
“...두 번 물어봐야 하나?”
“아. 저를 부르신 거였습니까?”
“그래. 너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
“음. 저라면 마법을 좀 더 강하게 시전하겠습니다.”
“......”
“......”
선배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알카시스 교수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가는 대번에 창문 밖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크 엘프 교수는 한숨을 한 번 쉴 뿐이었다.
“질문할 상대를 잘못 골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