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해골 교장은 아마추어처럼 인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프로답게 말했다.
“금화 주면 되잖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한도 프로답게 바로 수락했다.
“그런데 수도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누굽니까?”
“기부금이나 지원금 많이 주는 놈들이지.”
“제가 그런 분들을 만나서 할 게 있습니까?”
“네 화려한 화술을 보여줘야지.”
“예? 저한테 그런 능력은 없는데요.”
“......”
“......”
-......
해골 교장을 포함해 주변 친구들과 데스 나이트들까지 이한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새로 입학할 1학년 학생들 찾는 건 네 마력을 좀 빌릴 거다.”
“아. 네. 그건 괜찮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가끔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군.’
데스 나이트는 1학년 제자한테 마력을 빌리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괜찮다고 하는 제자도 좀 제정신이...
“그런데 까다로운 학생들 확보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찾아가서 설득과 폭력을 써야겠지.”
“과연.”
이한은 해골 교장의 말에 여러 저택과 길드를 방문해 초대장을 내밀고 우아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 이한 같은 1학년 학생을 옆에 세워두면 이야기가 좀 더 부드러워지는 측면이 있으리라.
-여기 워다나즈 군도 올해까지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하하.
-에인로가드는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입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보시오! 얼마나 기특합니까?
‘교활하시군 정말.’
이한은 해골 교장의 사악한 속셈에 전율했다.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잠깐. 교장 선생님!”
어느새 돌아온 가이난도가 손을 들고 항의했다.
“이한은 방학 때 제 저택에 오기로 했는데요?”
“그런 적 없는데.”
이한은 은근슬쩍 제안을 사실로 바꾸는 가이난도의 말을 지적했다.
“하하. 녀석.”
해골 교장은 가이난도의 말에 화를 내는 대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가이난도가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을 뺏어서 먹어버렸다.
“?!!!”
“네 초콜릿이 어디 갔지?”
“교장 선생님이 드셨잖아요!”
“그래. 하나 배웠구나. 그럼 이제 워다나즈가 왜 네 저택에 못 가는지 설명이 됐겠지?”
해골 교장은 가이난도의 망연자실한 얼굴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은 재빨리 접시로 시선을 돌리고 음식을 비우는 데에 집중했다.
* * *
“이한. 편지해야 해. 아니면 놀러와도 좋고.”
“알겠어.”
“이한. 편지는 됐고 놀러와. 참. 요네르 집은 놀러가지 마. 거기 별로 재미없어. 우리 집이 더 좋아.”
“......”
학기가 끝나고 정문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학생들은 활기차고 애틋했다.
친한 친구들은 방학 때도 서로 만날 약속을 잡거나 편지를 보낼 계획을 준비했다.
요네르는 즐거운 날이라 참을지 아니면 그냥 가이난도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서 방학 동안 기강을 잡을지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워다나즈. 편지해라.”
“고맙다. 아산.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아산은 이한과 악수했다.
언제 봐도 참 존경스러운 친구였다.
가문의 형님과 누님이 본받으라고 닦달해도 납득이 가는 친구는 참 드문 존재였...
“참. 아산. 여기 다이할 씨한테 보내는 편지인데, 좀 전해주겠나?”
이한은 기말고사 끝나고 빠르게 작성한 편지를 아산에게 내밀었다.
아산의 형, 다이할은 그랑덴 시의 특수 행정관으로 빠르게 출세하고 있는 제국 관료계의 유망주였다.
그런 사람과 기껏 안면을 트게 됐는데 겨울방학을 그냥 날릴 수는 없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런 편지를 보내서 눈도장을 찍고 기억에 남는 게 유리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다이할 씨한테 보내는 선물. 책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하나 준비해봤어.”
“...워다나즈,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다이할 형님과 연락한 건 아니지?”
“안 했는데?”
“그, 그래. 고맙다... 전해드릴게.”
자기보다 더 가족을 잘 챙기는 이한의 모습에 아산은 놀랐다.
“그리고 이건 하이단 씨한테 보내는 편지하고 선물.”
동부의 청동 드워프 은행에 취직한 아산의 누이는 까다로운 드워프들도 감탄시키는 대단한...
“...워다나즈, 너 좀 무서울 때가 있다.”
“?!”
친구의 폭언에 이한은 당황했다.
어째서?!
아산에게 부탁을 마친 뒤로도 이한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친구들은 계속 몰려왔다.
서로 누가 먼저 이야기를 하겠다고 다투는 모습을 본 아산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너희, 학기 끝인데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야겠냐? 꼭?”
“달카드 넌 이야기 다 했으면 빠져라!”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친구들의 반응에 아산은 예상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줄을 서서 번호표를 뽑아야 해. 그러면 훨씬 빨리 끝나겠지.”
“......”
옆에서 닐리아와 이야기하고 있던 이한은 경악의 시선으로 아산을 쳐다보았다.
“아산 쟤는 좀 이상할 때가 있어.”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상한 구석이 있지.”
“맞아. 나는 아니지만.”
“......”
닐리아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 해골 교장과 같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꾹 참았다.
“그런데 닐리아. 요네르가 널 초대하고 싶어 하던데.”
“겨울방학 때는 산맥에 돌아가야 해.”
귀가 축 늘어진 닐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다크 엘프처럼 보였다.
“그림자 순찰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얼굴만 비추고 다시 메이킨 가문의 저택으로 가면?”
“그냥 놀러가는 건 안 돼... 각자 맡은 구역이 있어서 의무를 다해야 하거든.”
“겨울방학 과제가 있다고 하면?”
“...어, 그,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닐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깃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교장 선생님의 서명을 위조해줄게. 저번에 외출권 위조해봐서 할 수 있어.”
“워다나즈...!”
닐리아는 격렬하게 감동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손끝은 파르르 떨릴 정도로.
“네가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이한은 우정의 서명 위조를 슥삭 끝내서 닐리아에게 내밀었다.
메이킨 가문의 요네르와 협력해서 도브룩의 유홍 물약 열 상자를 만들어 오라는 가짜 과제가 뚝딱 완성됐다.
“꼭 편지해. 꼭!”
“그래. 혹시 모르니까 편지에는 내가 위조해줘서 고맙다는 내용 넣지 말고.”
이한은 행복해하는 닐리아를 보면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로가드에서 배운 마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었다.
“워다나즈. 꼭 편지해라. 여기 내 주소다.”
“어. 알겠다.”
“편지해라. 워다나즈. 나한테만 안 보내지 말고.”
“왜 그런 오해를 하고 그러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착각하겠군.”
“워다나즈. 편지...”
“그래그래. 알겠다.”
친구들과 주소를 교환하면 할수록 이한은 슬슬 압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많지 않나??
‘아니, 반성문보다 더 힘들겠는데.’
저번 학기에 해골 교장이 반성문을 쓰게 하면서 마법 수련을 시켰었는데, 지금 친구들한테 보내야 하는 편지의 양을 생각해보면 그걸 가뿐히 뛰어넘었다.
‘안되겠다. 편지는 슬슬 빼야겠군.’
이한은 지금부터 작별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은 편지 대신 그냥 ‘만나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워다나즈.”
“앗. 황녀님. 실은 다음에 만나면...”
“이번 학기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편지하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젠장.’
결심한 시작부터 자기 할 소리만 하고 돌아가는 아덴아르트의 모습에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앗. 워다나즈 님. 혹시 편지 써야 할 곳이 너무 많으시면 전 괜찮습...”
“아닌데? 아주 넉넉한데?”
이한은 랫포드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후회했다.
‘크윽.’
“뭔 음유시인 왔냐??”
해골 교장은 정문 앞에 늘어선 줄을 보고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학기가 끝났으면 즐겁게 정문 통과해서 마차 타고 떠날 것이지 여기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워다나즈하고 방학에 편지하려고...”
“편지 같은 소리 하고 있구나. 그 시간에 마법이나 연습해라. 이 환상 마법 강의 41점아.”
“......”
말을 꺼냈던 푸른 용의 탑 학생이 바로 시무룩해졌다.
기말고서 점수를 불러대서 학생들을 전부 쫓아낸 해골 교장은 이한을 보며 말했다.
“다 됐겠지? 가자.”
“예.”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문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해골 교장이 이한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쪽이 아니다.”
“??”
“잠깐 들를 곳이 있다. 따라와라.”
해골 교장은 정문이 아닌 징벌방 쪽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얼마 전에 붙잡은 침입자를 꺼내려는 건가 싶었다.
‘침입자도 같이 처리하시려는 모양이군.’
촤르르르르륵!
해골 교장이 발을 내딛자 징벌방의 모든 길들이 교장을 위해 변화했다.
순식간에 원하는 위치를 향해 가장 빠른 길을 만들어내는 그 마법에, 이한은 경탄의 눈빛을 던졌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너는 대체 왜 다른 대단한 마법을 내버려두고 감방 지름길 만드는 마법에 그런 감탄을 하는 거냐?”
일부러 해도 저렇게 열받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고대였다면 참 다른 의미로 이름을 날렸을 놈이다!’
해골 교장은 혀를 차며 앞으로 걸어갔다.
창살 안에는 얼마 전에 붙잡은 침입자...
...가 아닌, 익숙한 펭귄 수인 마법사가 있었다.
“...?????”
“반성했나, 펭에린?”
해골 교장의 물음에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은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 반성했습니다. 고나달테스 님.”
“저번에 한 말도 반성했는가? 반성했다면 제대로 사죄해보도록.”
“저, 저는 고나달테스 님보다 마법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고나달테스 님이 제 마법을 질투해서 출입을 막았다는 것은 제 착각이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
이한은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제야 알시클은 이한이 해골 교장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이 침입자 놈아.”
해골 교장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학교에 몰래 들어가려다가 붙잡힌 놈이 뭐가 부끄러워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붙잡힌 순간 이미 창피한 것 아니겠는가.
“그냥 방문하려고 했는데 허가를 안 받았을 뿐이야! 오해하지 마!”
알시클은 이한에게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 그렇군요.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착오 같은 소리 하고 있군.”
해골 교장은 이죽거리며 징벌방 안에서 알시클을 꺼냈다.
“펭에린. 에인로가드에 몰래 들어오려다가 붙잡혔다는 사실은 함구해줄 테니, 올해 겨울에 일이나 도우도록 해라.”
좌절해서 엎드린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펭에린 님도 폐하께서 부르셨습니까?”
“...뭐?! 워다나즈 너, 폐하께서 부르셨어??!”
해골 교장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왜, 밖에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오지 그러냐. 폐하를 독대한다고 말이다.”
“죄송합니다.”
“됐다. 펭에린은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펭에린은 황제 폐하 때문에 부르는 게 아니다.”
“...?”
이한이 의아해하자 해골 교장은 텔레파시 마법을 날려서 설명해줬다.
-저 녀석은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거든.
-아. 냉기 마법의 화려함 때문입니까?
-아니. 외모 때문에. 펭귄의 피가 짙잖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