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감동한 탓인지 실바스는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서명하고 있었다.
“제 이름을 걸고 <트롤이 먹이를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건 현재 제국이 꼭 진행해야 할 연구입니다. 아니, 제국은 이제까지 이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를 표했다.
이 실바스란 관료는 해골 교장과 달리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인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이한은 다음 연구 계획서를 확인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팡이 휘두르는 동작에 대한 연구
깊은 생각에 잠긴 이한은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한 해에 지팡이 동작 실패로 인해 다치는 마법사들과 제국인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한 해에 수십 명 이상이 다치는데, 일각에서는 이게 지팡이 휘두르는 동작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 * *
해골 교장은 <바위 정령의 사과잼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미식을 즐긴 만큼 수도에서 유행하는 음식이나 음료에 대해 심드렁한 해골 교장이었지만, 이 카페는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단하군. 커피도, 애플파이도 뛰어나지만 이 돌 수프는 영혼의 맛이야.”
끼기긱.
바위 정령은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해골 교장은 앞으로 더 정진하라며 팁을 남겼다.
“교장 선생님!”
“왔느냐?”
멀리서 제자가 지친 표정으로 걸어 나오자 해골 교장은 앉으라고 신호했다.
“생각보다 훨씬 늦었구나. 고생했다.”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도둑놈들 설득이 쉬울 리가 있나.”
“도둑놈까진 아닌...”
“흥. 제국 관료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다. 물어볼까?”
해골 교장은 옆을 지나가던 모험가 한 명을 부르더니 물었다.
“이봐. 제국 관료들은 도둑놈인가, 도둑놈이 아닌가?”
“그 놈들은 허여멀건한 도둑놈들이오!”
“봤느냐?”
“...최근에 세금을 좀 많이 낸 모험가 분 같습니다.”
해골 교장은 다른 여행객 한 명을 부르더니 물었다.
“제국 관료들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만하십시오.”
“그래. 알면 됐다.”
해골 교장은 고생한 이한에게 돌 수프를 밀어줬다.
돌만 넣고 푹 끓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수프에서는 영혼의 맛이 느껴졌다.
‘...여우와 두루미??’
물론 이한이 보기에는 겉모습이 좀 많이 볼품없는 수프였다. 이한은 옆으로 그릇을 밀고서 말했다.
“그래도 늦은 만큼 성과가 꽤 있었습니다.”
“오. 정말이냐?”
해골 교장은 정말로 놀랐다.
이번에 해골 교장이 갖고 온 연구 계획서들은 에인로가드에서도 손꼽히는 쓰레기들이었다.
애초에 쓰레기가 아닌 계획서들은 해골 교장이 갖고 올 필요도 없이 통과가 됐던 것이다.
해골 교장이 직접 이렇게 갖고 와서 사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쓰레기 계획서라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라도 통과시키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뭘 통과시켰느냐?”
“전부 다 통과시켰는데요?”
“...거짓말하지 마라. 하하.”
“정말입니다.”
이한은 각 계획서에 받아 온 제국 관료들의 서명을 내려놓았다.
위에 이야기할 때 관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겠다는 서명이었다.
해골 교장은 갑자기 말이 없어지더니 계획서만 연달아 훑어보았다.
한 번 다시 읽고, 두 번 다시 읽고, 세 번 다시 읽고...
이한은 상대가 말이 없어지자 괜히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네가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해골 교장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이한은 더 의아해졌다.
“...감사합...?”
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골 교장은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수도 사람들에게 외쳤다.
“다들 듣도록 해라! 이 자랑스러운 녀석이 내 제자다! 에인로가드의 관료 격멸자가 바로 내 제자란 말이다!”
“진짜 왜 이러십니까?!”
이한은 질색해서 외쳤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진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외쳤다.
“주인장. 오늘 이 카페의 음식과 음료는 모두 내가 지불하겠소!”
“만세! 어디서 오신지는 모르겠지만 후한 손님에게 감사드립시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제자가 대단한 업적을 세운 모양이군!”
“에인로가드의 관료 격멸자!”
“관료 격멸자 만세!”
사방에서 뭔지도 모르고 좋다고 박수갈채를 날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한은 해골 교장과 다시는 같이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아침.
해골 교장의 수도 별장에서 머무른(데스 나이트들이 하인처럼 차려입고 있는 별장이었다) 이한은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해골 교장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먼저 나와 제국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문을 읽던 해골 교장은 이한이 내려오는 걸 보며 손짓했다.
“어제는 정말 훌륭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페에서 하신 짓은 좀 과하셨습니다.”
“음. 나도 반성 중이다. 가끔은 대마법사도 기쁨을 자제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지.”
데스 나이트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날이셨습니다.
-관료 놈들, 평소 깐깐하게 굴던 주제에 쉽게 속아넘어가더군!
“속아 넘어간 게 아니라 진심 어린 말에 이해해주신 것...”
-하하. 알겠습니다. 그런 걸로 하지요.
데스 나이트들은 눈을 찡긋거렸다.
이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앞에 있는 식사나 먹기로 했다.
쌀과 생선, 채소 위주로 구성된 제국 동부풍 식사였다. 이한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동부 음식을 좋아하셨습니까?”
“뛰어난 관료 격멸자 제자야.”
“관료 격멸자라고 자꾸 부르실 거면 전 그냥 워다나즈 가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뛰어난 제자야.”
이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해골 교장의 눈빛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어제 세운 일들이 그만큼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리치한테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묻는 건 좋은 질문이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동부 음식을 차리신 게 의외라서.”
“네 취향에 맞춘 거지.”
이한은 자기 취향을 알고 있는 해골 교장에게 더 놀랐다.
사실 에인로가드에서는 잡히는 대로 먹었던 만큼 서부풍이든 동부풍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말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난 학생들이 어디서 뭘 훔치는지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외출하시는 건 모르셨잖습니까.”
“......”
해골 교장의 눈빛이 애정 어린 따뜻함에서 평소의 차가움으로 돌아오려다가 다시 따뜻하게 돌아왔다.
어제 세운 일들이 정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마법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지.”
‘저런 관찰력으로 쓸데없는 짓만 하시다니.’
남이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 파악할 정도의 관찰력을 전부 함정 만드는 데에 쏟는 것도 재주였다.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넌 조금 쉬어도 된다. 오전에는 내가 관료들을 조금 더 만나고 올 테니까. 아랫놈들이 서명까지 했으니 윗놈들도 떽떽대진 못할 거다.”
“그럼 편지라도 쓰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친구들한테 보내야 할 편지들이 쌓였던 만큼 틈틈이 써놔야 했다.
해야 할 마법 과제들도 많은데...
“그리고 오후에는 수도의 호구들을 만나러 갈 거다.”
“호구들이요?”
“내가 호구라고 했나? 잘못 들었나보군. 수도의 후원자들이라고 했다.”
“...하여간 에인로가드를 후원해주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그래. 펭에린도 데리고 갈 거다. 관료들에게 정신 마법을 건 것처럼 후원자들한테도 정신 마법을 걸면 된다. 후원자들은 훨씬 쉬울 테니 걱정하지 마라. 뛰어난 제자야.”
“정신 마법 안 걸었습니다.”
“걸지 않았는데도 거는 게 진정 뛰어난 마법의 경지지. 훌륭하구나.”
이한은 식탁 위의 토마토를 던질까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 못 받은 금화들이 남아있었다. 이한은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관료분들은 운이 좋았습니다. 후원자 분들은 관료랑 달라서...”
“올해 한 것처럼만 해도 충분하다.”
“올해 제가 뭘 했습니까?”
“......”
해골 교장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
데스 나이트들도 믿기 힘들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올해 후원자들 앞에서 보여줬던 미친 활약들이 저 소년에게는 그냥 기억도 나지 않을 일상이었단 말인가?
“아니, 진짜로 모르겠습니다. 제가 뭘...”
“그, 그래. 그럼 모르는 채로 있어라. 뛰어난 제자야. 다녀오.. 참. 펭에린이 일어나면 식사는 좀 기다리라고 해라.”
“오. 수도의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하셨습니까?”
“응? 아니다. 펭에린은 후원자들 앞에서 정어리 먹어야 하거든.”
“......”
* * *
해골 교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후원자들은 관료들보다 훨씬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애초에 부(富)가 넘치는 이들이 제국의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를 지원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후원이었다.
이들은 관료들처럼 깐깐하게 효율을 따지고 하지 않았다. 호탕하게 금화 주머니를 내놓았다.
그런 만큼 해골 교장의 접근 방식도 달라졌다.
최근 학생들이 해낸 업적들을 이야기하며 후원금 액수를 올리는 식으로 은근히 유도하는 것이다.
“이번에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연금술 길드들을 꺾고 완벽한 물약을 만들어낸 걸 다들 들으셨소?”
“아. 들었습니다. 고나달테스 공! 어찌나 대단한지!”
“그런데 에인로가드의 격구 클럽은 또 졌다고...”
“어허! 그걸 꼭 말해야 하나!”
물론 가끔 해골 교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사히 잘 풀려갔다.
후원자들은 해골 교장의 제자라고 밝힌 이한에게 특히 흥미를 가졌다.
아직 어린 소년인데 직전제자 대우를 받는 것도 놀라웠지만 거기에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고 하니 흥미가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실질적인 미래의 대마법사와 교분을 맺는 기회를 버리는 후원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한은 그런 관심에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태도를 유지하며 완벽하게 대응해냈다. 해골 교장은 훌륭하다고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알시클은 열심히 정어리를 먹었다.
기분탓일 수도 있겠지만, 알시클이 정어리를 하나 먹을 때마다 후원자들의 후원 액수가 훌쩍 뛰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 오늘은 이상한 제안이 없어서 편했군.”
“이상한 제안이라면 어떤...?”
“돈 많은 귀족들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버리고 싶어하는 병이 생기지.”
해골 교장은 길을 걸어 내려가며 말했다.
버두스 교수의 터무니없는 프로젝트처럼, 가끔, 아니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귀족들은 터무니없는 사업을 구상하곤 했다.
-제국 전역에 공간이동 장치를 설치해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오...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이제 마법사들이 알아서 해주셔야죠?
-......
후원자가 아니라면 뺨을 때리고 쫓아냈겠지만 후원자인 이상 좋게 돌려서 말해줘야 했다.
후원자가 이상한 사업으로 파산하면 에인로가드도 좋을 게 없었으니까.
“혹시라도 저런 제안 같은 거 받아주지 마라. 가끔 멍청한 놈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후원 받아서 일을 벌이는데, 대부분 잘 된 적이 없으니까.”
“어. 후원은 얼마나 들어옵니까?”
“...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은 거냐??”
“그냥 물어본 겁니다.”
어제 일로 따뜻해졌던 해골 교장의 눈빛이 슬슬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