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학생들 중에서 저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성공시킨 녀석은 손가락에 꼽는다.”
“성공한 사람이 있긴 있다는 겁니까?”
해골 교장의 눈빛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냥 듣고 싶은 대로 듣겠다고 말해라. 왜. 어떤 제안이 있었는지 말해주랴?”
“호기심일 뿐이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됩니까?”
“뭐냐?”
“만약에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시간이 지나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 지금 설마 후원금만 받아서 도망치려고 묻는 거냐!?!”
해골 교장은 경악했다.
이 제자는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에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른 건방지고 오만한 놈들이 자기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덤벼드는 동안, 혼자 냉정하게 후원금만 받아서 먹고 튈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소름끼치는 냉정함이었다.
‘미래가 두렵구나!’
“아니... 도중에 못하겠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용한 후원금은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일부러 도망치려는 게 아닙니다.”
“너는 진정으로 미친놈이다. 관둬라. 눈앞의 과실만 탐하는 마법사는 오래 가지 못하니까.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실패하면 네 명성에 타격이 간다.”
제국 마법사에게 실력만큼 중요한 게 명성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버두스 같은 마법사한테 어느 누가 거금을 맡기겠는가.
지금 버두스가 해골 교장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다 명성 관리에 실패해서였다.
“한두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해라. 해! 꼭 해라! 안 하기만 해봐라.”
“질문인데 자꾸 그렇게 화를 내시면...”
해골 교장은 진저리를 치며 화제를 바꿨다.
“지금 만나러 가는 후원자는 이제까지 만난 후원자와는 좀 다를 테니 주의해라.”
“?”
이한은 교장의 말에 놀랐다.
다른 후원자라니?
“성격이 괴팍하십니까?”
“괴팍... 괴팍하다고 할 순 있겠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황제 폐하의 아홉 자식 중 셋째 분이시다.”
“!!!”
현 황제의 자식들은 백 명이 넘어가는 만큼, 한 명 한 명에게 커다란 권위 같은 건 없었다.
실제로 황제를 대면해 본 이한은 왜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 황족들한테 심드렁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가주들이 보기에 영원불멸히 통치해야 할 황제가 자리 잡고 있는데 자격도 안 되는 새파랗게 어린 황족들이 ‘제가 차기 황제가 될래요!’하고 있으니 얼마나 같잖았겠는가.
오히려 이한은 몇몇 황족들 밑으로 모여든 충성파 귀족들이 더 신기했다.
이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황족이 후계자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진짜 현 황제보다 괜찮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아마 현 황제의 정체를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하여튼 양산형 황족들에게 별다른 권위는 없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들 그걸 알았지만, 몇몇 황족들은 그 중에서도 조금 특별했다.
첫째부터 아홉째까지.
황제가 혼자서 잉태해 낳은 진짜 자식들이 바로 그랬다.
황제의 자격은 없어도 이들은 드래곤인 만큼 막강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아래 황족들과 달리 드래곤이라는 종족인 점이 매우 중요했다.
사실상 황제가 진짜 자식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바로 이 아홉 자식들일 테니까.
당연히 해골 교장은 물론이고 대귀족 가문들도 이런 황제의 진짜 자식들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알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아홉 분들은 그런 호의 덕분에 다 부자고, 우리는 이 돈을 뜯어내러 가는 거군요.”
“...훌륭하다!”
해골 교장은 이한의 눈치에 깜짝 놀랐다.
보통 이런 아홉 자식 이야기를 할 때에는 드래곤이라는 점이나 황제가 아끼는 자식이라는 점에만 주목해서 긴장하곤 했다.
하지만 이 제자 녀석은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고 바로 진짜 목적을 알아차렸다.
“정말 대단하구나. 네 성장이 기쁘다!”
“하하. 교장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알시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마법사가 하는 일은 알시클의 상상과는 조금, 아니 너무 많이 달랐다.
* * *
‘긴장되는군.’
저택 담장 앞에 선 이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드래곤과 마주한다는 건 미리 알면 더 긴장되는 일이었다.
황제는 차라리 모르고 만나서 망정이었지, 황제의 셋째 자식은 알고 있는 만큼 긴장이 됐다.
과연 어떤 드래곤일까?
‘괴팍하다고 했지.’
괴팍함도 종류가 많았다.
버두스 같은 괴팍함, 해골 교장 같은 괴팍함, 볼라디 교수 같은 괴팍함...
황제 폐하의 첫 아홉 자식인 만큼 나이는 백 살은 가볍게 넘겼을 테고, 그러면 아마 해골 교장 같은 괴팍함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혈색 좋게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떻게 아첨을 해야 좋을까.’
“으.”
“괜찮으십니까, 알시클 님?”
“으응.”
알시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부리가 내려가고 어깨는 좁아져있었다.
드래곤을 만난다는 부담감 때문인가 싶어서 이한은 물었다.
“혹시 대면하시는 것 때문에...?”
“으윽. 부끄럽지만 맞아. 사실 난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거든.”
알시클의 말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그러셨습니까?”
“그 때는 끔찍했지.”
“어떤 분이셨길...”
“들어오십시오!”
저택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신호했다.
이한은 대화하던 걸 멈추고 해골 교장의 뒤를 따라 정문을 통과해 저택 앞뜰을 걸어갔다. 워낙 부지가 넓어서 앞뜰을 걷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소요됐다.
“지금 일어나계신가?”
“예. 다행히 일어나계셨습니다.”
기사는 진심 어린 안도의 얼굴로 해골 교장에게 말했다.
해골 교장은 혀를 쯧쯧 차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았나보군.”
“...아, 아닙니다! 이건 제 영광입니다!”
“얼굴에 침을 맞는 게 영광은 아니지. 포장은 적당히 하게.”
“...???”
뒤에 있던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얼굴에 침을 맞는다니?
‘침을 뱉나?’
이한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미치광이 노인이 날뛰는 모습이 더 심해졌다.
아무리 드래곤이고 황제의 자식이라도 그렇지 아랫사람한테 기분 나쁘다고 침을 뱉는다니.
“교장 선생님.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어쩌겠느냐. 폐하의 자식인데.”
“아니...”
이한은 평소 해골 교장의 모습과는 다른 반응에 실망했다.
해골 교장이라면 폐하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건방지게 굴면 대번에 거꾸로 매단 뒤 징벌방에 처넣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징벌방에 넣어버리면 안 됩니까?”
“...가끔 내 제자지만 네가 많이 놀라울 때가 있는 거 아느냐?”
해골 교장은 어이없어하며 문을 열었다.
저택 안은 황제의 거처와 비슷했다.
일반적인 제국의 종족이 사는 것처럼 여러 구역과 방으로 나뉘어있는 게 아닌, 커다란 하나의 동굴처럼 넓게 구성되어 있었다.
공간 확장 마법을 사용했는지 안은 밖보다 몇 배는 넓어보였고 어둡고 습기 있는 공기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으면 어느 동굴 깊은 곳에 와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와! 알시클!!!
“제발!”
옆에서 알시클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드래곤의 앞발이 펭귄 수인을 낚아채갔다.
황금빛 드래곤은 펭귄 수인을 위로 던지고 받고 던지고 받은 다음 꽉 껴안았다.
해골 교장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알시클에게 강력한 보호 마법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장 부스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전하.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와! 고나달테스도!
“전하.”
알, 알겠어. 알시클... 너는 왜 이렇게 안 온 거냐? 조우린이 보고 싶지 않았던 거냐?
“끄... 끄억. 일이 바빴습... 니다... 마법사에게는... 마법이란 사명이... 살려주십시오.”
마법 같은 소리 하고 있구나! 마법 같은 건 시시한데!
마법사 앞에서 금기나 마찬가지인 말을 태연하게 했지만 알시클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댔다.
웬 앳된 드래곤이 펭귄 수인 마법사를 고문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이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 드래곤은...
“얼마나 어린 겁니까!?”
“무슨 소리냐? 아. 네 녀석 설마 황녀 전하께서 다른 종족처럼 장성한 상태일 줄 알았던 거냐?”
해골 교장은 그제야 이 제자가 저 어린 드래곤을 징벌방에 처넣자는 소리를 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던 것이다.
“조우린이 머리가 좀 굵어지려면 몇백년은 더 지나야 할 거다.”
드래곤은 수십년만 지나도 어지간한 종족들이 쌓은 지식을 훌쩍 뛰어넘고 성벽을 몸집으로 무너뜨리는 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정신 연령은 그렇지 않았다.
수백 년 산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사고방식은 십대 꼬맹이에 불과했다.
잔뜩 신이 난 황제의 셋째 황녀, 조우린은 앞발로 펭귄 수인을 띄웠다.
알시클, 날아라! 날아라!
“저는 못 납니다... 이건 나는 날개가 아닙니다!”
날아!
“!”
언령 마법을 짧게나마 쓰는 잠재력을 보고 이한은 전율했다.
과연 진짜 드래곤의 핏줄은 차원이 달랐다.
조우린은 알시클과 실컷 논 다음에야 풀어주었다.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된 알시클은 흐느끼며 드러누웠다.
“...고생했다. 가서 쉬어라.”
“으흑흑...”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은 사라지고 펭귄 묘기꾼이 되었다는 슬픔에 알시클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신이 잔뜩 난 조우린은 작은 날개를 퍼덕이다가 뒤늦게 이한을 발견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지는 놀라운 손님이었다.
조우린의 새 형제야??
“아닙니다. 전하. 그냥 인간입니다.”
고나달테스가 개조했어?
“전하. 체통을 지키시지 않으면 이대로 돌아가서 다시는 방문하지 않겠습니다.”
해골 교장의 말에 조우린은 비명을 질렀다. 동굴이 뒤흔들리는 비명이었다.
해골 교장은 무심코 이한을 쳐다보았다. 방금 강력한 비명에 타격을 받았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담담하게 서있었다. 해골 교장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조, 조우린이 잘못했다. 떠나지 마!
“예.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마력이 빌어먹을 만큼 많은 인간아.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전하. 그 표현은 틀렸습니다.”
틀, 틀렸어? 마력이 빌어처먹을...?
“뜻을 모르는 욕을 문장에 억지로 넣지 마십시오.”
황족은 풀이 죽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마력이 이렇게 많은 마법사는 처음이다. 이런 마법사라면 조우린하고 놀 수도 있겠구나.
골드 드래곤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방금 알시클이 보여준 동굴펭귄쇼가 떠오른 이한은 불길한 기분으로 해골 교장을 불렀다.
“방금 알시클 님 같은 걸 하는 겁니까?”
“아니지. 넌 펭귄 수인도 아니고 그냥 반반한 게 전부잖느냐. 펭에린 같은 걸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별로 위안이 안 됩니다만.”
조우린은 신이 나서 비단 손수건을 하나 갖고 왔다.
그러더니 이한에게 던졌다.
마력을 불어넣어 보거라!
“찢어질 텐데요?”
안 찢어져! 힘껏 불어넣어라!
이한은 의아해하며 비단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놀랍게도 이 손수건은 막대한 마력이 흘러와도 찢어지는 대신 견고하게 버텨냈다.
‘놀랍다!’
아마 그 안의 마법 구조를 마력 분산에만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놀라웠다.
이 정도로 마력 분산이 가능하다니.
이것과 비교하면 수천 킬로미터 위의 상공에서 계란을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게 충격을 분산시키는 게 차라리 쉬워보였다.
그렇지? 고나달테스가 만들어준 거다! 기껏 만들어줬는데 이걸 갖고 놀 상대가 없어서 혼자만 써왔다. 자!
드래곤은 자기 앞발 발톱 사이에 손수건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을 이한에게 잡게 만들었다.
마력 줄다리기! 마력 줄다리기다!
“...어, 교장 선생님?”
이한은 해골 교장을 불렀지만, 이미 해골 교장은 동굴 구석에 테이블과 의자를 펴놓고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열심히 놀아드려라.”
“...!”
이러려고 데려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