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거기에는 전하께서 간과하신 게 있습니다.”
해골 교장은 급히 변명했다.
순수한 골드 드래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간과했는데?
“원래 마법사는 강철과 같아서 불로 달구고 망치로 내려쳐야 단단해ㅈ...”
“하하! 교장 선생님께서는 농담도 참 좋아하십니다!”
이한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순수한 골드 드래곤이 ‘아 마법사는 원래 불로 달구고 망치로 내려쳐야 하나보구나’라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전하. 제국에는 꾸준히 사건사고들이 일어납니다. 그게 황제 폐하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잘못이지?
“......”
드래곤들은 같은 혈족이라 하더라도 할 말은 했다.
황위를 탐내는 황족들이라면 황제의 눈치를 봤겠지만 조우린 같은 황족은 황위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황제의 비판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전하. 아까 알시클 님께서 들어오면서 정원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래?! 괜찮아?!
“이건 전하의 잘못입니다.”
아, 아니야! 그게 왜 조우린의 잘못인데!
골드 드래곤은 발끈해서 앞발로 바닥을 탕탕 쳤다.
기사들 잘못이야! 기사들!
해골 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법사와 기사는 뿌리 깊은 반목의 역사 위에 서있었고 해골 교장도 기사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여기 저택의 기사들은 정말 좀 불쌍했다.
“하지만 방금 제국의 사건사고는 황제 폐하의 잘못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생각해보니까 폐하의 잘못이 아닌 것 같구나.
조우린은 빠르게 납득했다.
저택의 정원에서 누군가 넘어진다 하더라도 조우린의 잘못이 아니듯, 에인로가드에서 홍수가 나고 눈사태가 터지고 씨 서펜트가 나타나고 서리거인의 왕이 나타나고 반마법주의자가 나타나고 마법범죄자가 나타나도 고나달테스의 잘못이 아닌...
‘그래도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어린 골드 드래곤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 *
“그러면 전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해골 교장은 품위 있게 인사했다.
조우린과의 만남은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갔다.
실컷 놀고 나서 만족한 조우린은 언제나 자기 창고에 있는 별 관심 없는 잡동사니(공작이 선물한 황금 드래곤 상 같은)들을 에인로가드에 선물해주곤 했다.
그리고 나서는 꾸벅꾸벅 졸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 한창 자랄 나이라 잠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가지 마! 가지 마, 이한! 명령이다!
“...전하. 졸리시잖습니까.”
해골 교장은 반쯤 감긴 조우린의 눈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이한이 아니라 워다나즈라고 부르십시오.”
이한. 가지 마!
평소에는 체통을 지키라고 말하면 들어줬던 골드 드래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해골 교장이 말을 해도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다.
조우린의 보물창고에 네 자리를 마련해줄게. 거기 머물러!
“거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해골 교장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골드 드래곤의 보물창고는 차라리 던전이라고 불러야 했다.
멀쩡한 보물은 자기 취향 아니라고 다 남들 주고, 저주 받은 것들만 재밌다고 모아놓았으니 어지간한 기사들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지 마!
“으억.”
이한은 골드 드래곤이 앞발로 자신을 단단히 붙잡자, 잉걸델 교수가 말했던 검술에서 강(强)과 중(重)의 묘리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저 죽습니다. 전하. 으윽.”
아, 안 돼! 이한이 죽었어! 고나달테스! 살려! 살리라고 명령하노라!
“......”
해골 교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제자의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전하께서 고집을 피우셔서 죽은 겁니다.”
안 피울게! 안 피운다고 했잖아!
“알겠습니다. 워다나즈. 일어나라.”
이한은 벌떡 일어났다.
“전하께서 저를 살려주셨군요!”
살아난 이한을 본 골드 드래곤은 다시 앞발로 보물을 움켜쥐고 싶은 마음과 방금 한 약속에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 탐욕에 맹세를 저버리기 전에 해골 교장은 재빨리 이한을 낚아챈 다음 문으로 몰아냈다.
“전하. 그러면 다음 만남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조우린은 에인로가드에 방문하겠노라!
“폐하에게 허락을 받아보시지요.”
해골 교장은 슬쩍 화살을 황제에게 돌렸다.
조우린 성격에 한숨 자고 나면 귀찮아서 황제한테 말하는 것도 잊어버릴 거라 확신한 것이다.
폐하한테 허락을 받으면 되는 거겠지?
“예. 예.”
“어, 허락 받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에인로가드 오고 싶다고 한 게 처음인 줄 아느냐? 전하께서는 한숨 주무시고 나시면 잊어버리실 거다.”
이한의 질문에 해골 교장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미 몇 번이고 경험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정말 허락 받으실 것 같은 눈빛인데...”
“어린 드래곤들은 언제나 진심이지. 하지만 자고 나면 잊어버릴 거다.”
둘은 인사를 하고 나서 저택의 문밖으로 나왔다.
“아차. 펭에린을 놓고 왔군.”
둘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펭에린을 들고 나왔다. 그 사이 골드 드래곤은 벌써 쿨쿨 잠에 빠져있었다.
“오늘 고생 많았다. 아까 죽은 척 연기는 유치했지만 효과적이었군.”
“가이난도한테도 통하는 만큼 조우린 전하에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해골 교장은 이게 누구한테 무례한 소리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둘 다한테 무례한 소리일지도 몰랐다.
* * *
...가이난도, 그렇게 해서 머무르고 있어. 내가 학기 끝나기 전에 공부하라고 했던 흑마법 책들은 다 공부했을 거라 믿는다. 첫 장과 둘째장만 공부해놓은 척은 하지 말고. 통하지 않으니까...
‘흠. 내용이 부족하군.’
관료들과 후원자들을 만나고 온 이한은 알시클과 같이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깐 시간이 난 사이에 이한은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차례대로 작성 중이었지만, 예의에 맞는 편지는 생각보다 쓰기 어려웠다.
정해진 양식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일정 분량 이상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어려운 난이도에 이한은 놀랐다.
어쩌면 그냥 시험이 나을지도...
“아. 맞아.”
이한은 강아지 수인족 탐정 토베리즈 시리즈를 떠올리고 덧붙였다.
참. 이번에 방문한 인쇄소에서 네가 좋아하는 제국 잡지를 봤다. 이번에 발매될 토베리즈 시리즈의 범인은...
‘다 됐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보내야 할 편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한은 인상을 찡그렸다.
“...알시클 님.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응? 물론이지.”
정어리를 오물오물 부리로 삼키던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뭘 도와줄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대로 내용을 베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한은 최근 날씨가 어떻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그냥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을 계획이었다.
어차피 서로 편지를 보지도 않을 텐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야 어렵지 않은데... 잠깐. 이거 편지 아니야?”
“맞는데요?”
“......”
알시클은 경악의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일단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내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또 저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래도 되나??
‘음. 아덴아르트한테는 뭘 더 쓰지...’
이한은 식탁 위를 훑어본 다음 깃펜을 놀렸다.
...여기 저택의 식사는 꽤 훌륭합니다. 오늘은 정어리 카나페와 샐러드, 정어리 필라프와 정어리쌈, 정어리 구이, 정어리 찌개와 정어리 샌드위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든든한 식사를 하시길 빕니다...
“으음. 알시클 님. 어제 저희가 뭘 먹었죠?”
“...그,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닐 수도 있다만... 편지에 먹는 내용만 계속 넣어도 되나?”
“받는 상대에 맞추는 게 편지 아니겠습니까. 아.”
뒤늦게 떠오른 이한은 내용을 추가했다.
...새로 알게 된 수도의 제빵 장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관료들한테 들었는데 제빵 길드 내에서도 명성이 드높았습니다. 저번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빵을 훔치셨다고 들었는데, 그런 맛없는 빵보다는 이 장인의 빵이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훌륭하군.’
이한은 흐뭇해했다.
분명 황녀는 배려심 넘치는 이 편지를 받고 뛸듯이 기뻐하리라.
안부 인사에 수도의 맛집 소개까지 하다니!
‘맞아. 요네르한테 새로 알게 된 걸 전해줘야겠군.’
...요네르. 새로운 사업을 찾아냈어. 제국에는 생각보다 금화를 버리고 싶어하는 후원자들이 많더라. 이런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는 거야. 몇 년 정도 지난 다음에 실험은 실패했다고 하고. 이 사업을 떠올렸을 때 나는 전율했어...
“아직도 편지를 쓰고 있었나?”
들어온 해골 교장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를 보고 쯧쯧 혀를 찼다.
하찮은 놈들을 위해 귀한 놈이 너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참 시간을 낭비하는 취미가 있구나.”
“고나달테스 님께서 학생들을 괴롭히시는 것처럼 말입니까?”
알시클의 말에 해골 교장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식탁 위의 정어리들이 성난 맹수처럼 알시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악! 아악! 워, 워다나즈는 봐주셨으면서...!”
이한이 해골 교장과 하는 대화를 보고 무심코 자기도 따라했는데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펭에린. 네가 에인로가드 학생이더냐? 응?”
알시클을 방에서 쫓아내버린 다음 해골 교장은 이한에게 말했다.
“방금 마지막 후원자를 만나고 왔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네 덕분에 노고가 줄었다. 다음은 이제 신입생을 찾아야 하는데, 좀 도와주겠느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교장은 식탁을 치우고 지팡이를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지독하게 복잡한 마법진이 바닥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마법이란 학문이 가진 가장 완벽한 가능성에 가까웠다.
나름 해골 교장을 따라다니면서 마법을 목격했던 이한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마법진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직감과 감각이 있더라도 이 마법진의 전개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만큼 농밀하게 압축된 지식과 지혜가 여기에 담겨있었던 것이다.
“...알려주소서, 에인로가드여. 당신의 제자를!”
해골 교장은 명령과 함께 이한에게 손짓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의 지팡이를 같이 붙잡았다.
이제까지 이한이 사용했던 마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마력이 썰물처럼 빨려나갔다.
이한은 놀랐지만 금세 침착을 유지했다. 딱히 마력이 고갈되진 않았던 것이다.
해골 교장은 예상했다는 듯이 잘했다고 눈빛을 보냈다.
무한에 가까운 막대한 마력량도 마력량이지만 이 대마법을 보조하면서 긴장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이 훌륭했다.
방금 이 모습을 펭에린이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걸 봤어야 스스로의 재능에 좌절하고 괴로워할 텐데!
팟!
마법진이 사라졌다.
해골 교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덕분에 쉽게 찾겠구나.”
“평소에는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주변을 좀 뒤져야했지. 아무래도 마력을 적게 쓰면 정확도가 떨어지거든. 특히 수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영...”
해골 교장이 손짓하자 허공에서 종이로 된 새들이 나타나더니 저택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 중 에인로가드에 초대 받을 자격이 있는 학생의 저택으로 날아간 것이다.
“됐다. 가자.”
“?”
대뜸 가자는 말에 이한은 의아해했다.
“어딜 말입니까?”
“아. 말 안 듣는 놈들을 방문해야지. 꼭 이 영광스러운 부름을 거절하고 고집을 부리는 놈들이 있거든.”
해골 교장은 지팡이뿐만 아니라 허공에서 검을 불러내더니 허리춤에 찼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전투적인 모습에, 이한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들을 조용히 묵념했다.
‘부디 적당히 저항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