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화
해골 교장의 타박에도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에인로가드가 기회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에는 좋은 곳이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장 좋은 기회를 탐내진 않았다.
“...에인로가드는 이렇게 폭력과 투쟁과 피와 고통이 가득한 곳이야. 그건 알고 선택해야 해.”
‘과장이 심하군.’
해골 교장은 이한의 과장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에인로가드가 제국법도 없는 무법지대인 줄 알 것 아닌가.
“싸우고 먹는다! 싸우고 먹는다!”
에안두르데는 눈빛을 빛내며 양손으로 테이블을 쿵쿵 두드렸다.
이한의 설명이 오히려 에안두르데를 신나게 한 것이다.
강한 적들과 투쟁과 식사가 가득하다니!
“그, 그래. 네가 결정했다면... 아니 근데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떠니?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
“후배한테 참 좋은 거 가르쳐준다.”
멀리서 해골 교장이 빈정거렸다.
선배가 되어서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에인로가드에 들어오지 않으면 너는 낙오자에 패배자다!’라고 해야지, 저렇게 자신감 없이 행동하다니.
“하지만 에인로가드는 좀 가혹하잖습니까.”
“온실 속에서 자란 놈들이나 가혹하게 여기는 거겠지. 저런 녀석한테는 별로 가혹하지도 않을 거다.”
이한은 해골 교장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배가 겪어온 생활과 비교해보면 에인로가드는 그리 힘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제야 이해한 것 같군. 그러면 식사시키고 교육 좀 시켜라. 자기 이름 정도는 읽고 쓸 줄 알아야지.”
“...어, 제가 하는 겁니까?”
“원래는 데스 나이트들이 하긴 했지. 네가 싫다면 데스 나이트들한테 맡길 순 있다.”
이한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빈 접시를 노려보는 후배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제국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투쟁만 해온 후배 같았다.
이런 후배를 과연 죽은 지 몇백년은 되는, 세태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기사들에게 맡기는 게 옳은 짓일까?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쯧쯧. 동정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다니.”
‘당신이 시켰잖아...’
이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해골 교장은 외출 준비를 하고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가십니까?”
“신입생 데리고 있는 놈들 설득하러 간다. 오늘은 네 도움이 필요 없을 테니, 후배하고 놀고 있어라.”
“아. 설득이 쉬운 곳들밖에 없습니까?”
“아니. 설득할 필요가 없는 놈들밖에 없다.”
해골 교장은 흰 외투를 걸치려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내려놓았다.
“흠... 피가 튀면 귀찮겠군.”
검은 외투를 걸치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이한은 시선을 피하며 후배를 쳐다보았다.
“자. 철자법부터 공부하자.”
* * *
후배는 상당히 똑똑했다.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제국의 철자들을 완전히 익히고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자. 따라써봐. 에인로가드.”
“에인로가드.”
“오수 고나달테스.”
“오수 고나달테스.”
“미치광이.”
“미치광이.”
“아니. 방금 건 잊어버려. 습관적으로 나왔군. 하여간 정말 잘했다. 식사 차려줄게.”
이한은 별장의 주방으로 향했다.
지나치게 정어리들이 많은 걸 제외하면 주방 식량창고는 꽤나 풍족했다.
감자, 정어리 통조림, 당근, 말린 정어리, 양배추, 얼린 정어리, 닭고기, 절인 정어리...
‘정어리는 좀 따로 치워놔야겠군.’
귀족들 취향의 만찬을 차리기에는 부족하고 소박한 편이었지만 숙련된 에인로가드 학생의 눈에는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 가능했다.
이한은 꽤 오랫동안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했을 것 같은 후배를 생각하며 식단을 준비했다.
꼬르륵-
“잠깐만 기다려.”
“알겠슴니다.”
일단 굶주린 후배를 위해 고깃덩이를 불 위에 올리고 야채들과 같이 볶은 다음 후추와 소금으로 간단하게 간을 해서 내놓았다.
그러나 후배는 바로 먹지 않고 기다렸다.
“먹어도 되는데?”
“안 이겼슴니다?”
“...앞으로는 안 이겨도 먹어도 돼. 그리고 방금 철자 잘 외웠잖아. 그게 이긴 거지.”
“!”
이한의 말이 꽤나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후배는 음식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접시를 보고 이한은 바로 바로 요리를 내놓았다.
감자 사이에 치즈를 넣고 오븐 안에서 노릇하게 구운 구이 요리, 버터로 볶은 양파를 갈아 넣어 뜨끈하게 끓인 감자 수프, 양배추와 같이 기름에 볶고 향신료를 넉넉하게 뿌린 정어리 요리...
‘아차. 정어리를 써버렸군.’
정어리 요리는 안 하려고 했는데 하도 많아서 잡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후배는 맛있게 먹어줬다. 이한은 흐뭇한 표정으로 후배를 쳐다보았다.
“앗. 식사 중이었어?”
알시클이 하품하며 걸어 나왔다.
한동안 해골 교장과 이한을 따라다니면서 고생한 알시클이었기에 최근에는 다시 마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법 연구는 밤에 더 잘 되기 마련.
밤을 새고 낮에 일어난 알시클은 평소와 다른 식탁에 반색하며 말했다.
“와, 직접 차린 거야? 나도 조금 먹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알시클은 신이 나서 정어리 요리를 조금 덜어가려고 했...
탁!
킁!
에안두르데는 알시클의 날개를 쳐내더니 으르렁거렸다.
“왜, 왜?”
“이 녀석! 알시클 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사과드려.”
“??”
이한의 말에 후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안두르데 안에서는 이미 ‘이한>본인>펭귄 수인’이라는 서열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미안함니다...”
“아니. 괜찮아. 정어리를 좋아하나봐. 난 정어리를 많이 먹었으니까 이 고기 요리를...”
탁!
킁!
다시 한 번 으르렁거리는 고르곤 혼혈을 본 알시클은 어이가 없었다.
해골 교장한테 ‘꽤 거칠게 자란 녀석을 주워왔다’란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난 그냥 따로 차려먹을게.”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 마법사와 먹을 것 갖고 다투는 것도 펭에린 가문의 체면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알시클은 정어리 통조림을 하나 까서 부리로 물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다른 귀족들이 괜히 기부금을 줘가면서 보려는 게 아니었다. 알시클이 생선을 삼키는 모습에는 강한 마력이 있었다.
에안두르데는 이한이 알시클의 정어리 흡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에 의아해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정어리 통조림을 하나 까더니 통째로 삼키려 했다.
“...잠깐!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
“넌 그냥 평범하게 먹어도 돼.”
‘그럼 난 평범하게 안 먹었단 거냐?’
알시클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피가 짙은 펭귄 수인으로서 인기는 숙명 같은 것이었지만, 생선을 삼킬 때마다 옆에서 좋아하는 반응은 가끔씩 짜증날 때가 있었다.
“넌 식사했어?”
“저도 이제 하려고 합니다.”
이한은 적당히 샌드위치나 만들어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후배가 눈치를 보더니 자기 앞의 접시를 내밀었다.
“아니... 너 먹어. 난 괜찮아.”
“승자가 먹는다? 왜 안 먹슴니까?”
“진짜 승자는 남의 식사를 뺏어먹지 않고 대신 챙겨줄 때도 있는 거야. 자. 다 먹고 다음 공부나 하자.”
에안두르데는 다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식사를 흡입했다.
알시클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식사 시 예의범절도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킁!
후배는 다시 알시클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알시클은 당황해서 설명했다.
“아니, 식사 시 예의범절은 필요한 거야. 이 녀석아.”
“후배. 식사 시 예의범절도 배우긴 해야 해.”
“알겠슴니다.”
“......”
알시클은 저 고르곤 혼혈 꼬마의 반응에 경악했다.
저 짐승 같은 녀석이 서열을 어떻게 세웠는지 깨달은 것이다.
‘저 녀석이?!’
* * *
이한은 알시클의 도움을 받아 속성 교육을 시작했다.
“일단 기초 제국 도덕 상식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멋대로 뺏으면 안 된다, 같은 거 말입니다.”
“에인로가드에서는 근데 필요한 게 있으면 힘으로 뺏잖아?”
“알시클 님은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들으신 겁니까?”
“고나달테스 님이 해준 말인데.”
“...그것 말고는 제국의 각 지역에 대한 간단한 풍습, 기초 산술.”
“예의범절. 예의범절 꼭 가르쳐라.”
“알겠습니다.”
“귀족 모임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그렇게까지?”
“다 배워두면 쓸모가 있어.”
알시클은 괘씸한 고르곤 혼혈 꼬마의 모습에 예의범절 심화 학습 과정을 강하게 주장했다.
알시클이 보기에 저 녀석은 제국 기초 도덕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심화 도덕을 배워서 제국의 귀족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품위 있는 이들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무례한 짓이었는지도 느껴야 했다.
“으음. 알겠습니다.”
이한은 의아했지만 일단 수긍했다.
워다나즈 가문에서 이한 본인도 배운 적 있었던 만큼 가르치는 게 별로 어렵지는 않았던 것이다.
“참. 힘 조절하는 법도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요.”
에안두르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석화 저주가 깃든 마안과 뱀으로 변화하는 머리카락이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전사라면 이걸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지만 저 후배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교장 선생님께서 아티팩트로 해결해주실 거다.”
알시클은 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해골 교장이 출신이나 배경이 까다로운 학생들을 한두번 상대해본 게 아니었다.
저 정도 종족 능력은 쉬운 수준을 넘어 하품하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어, 그런데 저는 마력 많은데 아무것도 안 해주셨는데요.”
“이야. 여기 통조림에는 정어리가 두 마리나 있는데?!”
“......”
이한은 괜히 말했다고 투덜대며 후배한테 가르칠 것들을 정리했다.
‘들어가기 전에 글 몇 개 더 읽게 하고, 음. 혹시 모르니까 쓸만한 연금술 물약 제조법도 익히게 해놓을까. 먹을 수 있는 풀하고 약초도 꽤 쓸만할 텐데. 이 녀석 사냥 경험 없을 텐데 사냥도 가르쳐야 하나...’
“침묵하고 가만히 있기. 침묵하고 가만히 있기.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짓기.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짓기.”
에안두르데는 ‘음음’ 소리를 내며 예의범절을 외웠다.
대충 지금 갈 곳에서는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먼저 공격하지 않고, 하지만 공격받았을 때는 반격하고, 평소에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도중에 우두머리 만나면 깍듯하게 존경을 표하고, 학교에서 선물 받는다고 무작정 먹지 말고...
이한은 후배가 메모한 걸 보며 기특해했다.
“교장 선생님 만나면 깍듯하게 존경을 표한다니. 아주 똑똑한데?”
“교장 선생님이 뭠니까?”
“...잠깐. 그럼 이 우두머리는 누구...”
벌컥!
문이 열리더니 해골 교장이 피곤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성가신 놈들 같으니.”
“엇. 고나달테스 님. 피가 묻으셨습니다.”
“내 피 아니다.”
“......”
알시클은 괜히 지적했다고 후회했다.
“그래도 다 죽였군!”
“예?”
“아. 다 끝났다고. 설득 다 했다는 소리였다.”
“......”
“......”
그 때 창문으로 종이 새가 하나 날아들었다. 편지를 받은 해골 교장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무슨 편지시길래?”
“입학하겠다고 한 녀석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귀찮게...”
알시클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특이하군요. 입학하겠다고 해놓고서 변덕을 부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누굽니까?”
“너희 가문이다.”
“...!”
알시클은 자기 가문의 친족들 중 에인로가드에 입학할 나이가 된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아. 누군지 알 거 같습니다. 아마 에인로가드에 입학하지 않아도 자신의 재능이라면 혼자 독학할 수 있다고 생각할...”
“너희 가문 녀석들은 대체 왜 다 그렇게 자신감이 비대한 거냐?”
“저희 가문만 그런 건 아닙니다...”
“됐다. 그런 녀석한테 특효약이 있지.”
“패시려고요?”
“아니. 워다나즈. 외투 챙겨라. 가자.”
“......”
알시클은 해골 교장의 특효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효과는 분명 지독할 만큼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