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이한이 문밖을 나서자 에안두르데는 졸졸 쫓아 나왔다.
“후배. 넌 여기 있어야 해.”
“??”
에안두르데는 왜 그래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이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가는 곳은 교장 선생님이 어떤 폭력을 휘두를지 알 수 없는...”
“태연하게 사람을 음해하지 마라. 폭력은 이미 다 썼으니까.”
해골 교장은 이한의 말을 막고 에안두르데에게 팔찌를 하나 씌웠다.
석화 저주가 깃든 마안과 뱀으로 변하는 머리카락을 억제하는 팔찌였다.
“데리고 가도 됩니까?”
“에인로가드에 적응하려면 공부도 공부지만 돌아다니는 연습도 해야지.”
그르릉대는 후배를 보자 이한은 갑자기 걱정이 됐다.
설마 지나가는 시민을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한은 후배를 제국 범죄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가자.”
해골 교장의 뒤를 따라 두 학생은 발걸음을 옮겼다.
후배는 킁킁대며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았다.
“저거...”
“저건 아이스크림 콘이야. 구운 와플을 콘으로 써서 아이스크림을 올린 거지.”
이한의 설명에 후배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로 지나가는 꼬마가 든 아이스크림 콘을 뺏으려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강철로 화해라, 망토여!”
재빨리 후배의 망토로 팔다리를 묶은 뒤 강철로 변환시킨 이한은 다급하게 속삭였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후배? 먼저 공격하면...?”
“아. 먼저 공격하면 안 된다!”
“그렇지!”
이한의 말에 에안두르데는 시무룩해졌다.
저 간식을 먹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 아이스크림 사게 돈 좀 주십시오.”
“먹고 싶다고 다 사주면 애 버릇 나빠진다.”
해골 교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국 은화를 튕겨줬다. 이한은 노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콘을 사왔다.
“자. 필요한 게 있으면 돈을 주고 사는 거야. 알겠지?”
“돈은 일로 범니다.”
“그렇지!”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며 배운 대로 기특한 말을 하는 후배의 모습에 이한은 뿌듯함을 느꼈다.
영특한 녀석답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셋을 기억했다.
“그런데 돈을 뺏으면 안 됨니까?”
“...후배.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러니까 먼저 돈을 뺏으면...”
이한은 펭에린 가문의 신입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계속해서 에안두르데를 가르쳤다.
후배는 쏙쏙 이해했지만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이 흥미로운 걸 들고 있을 때마다 가르침을 잊고 전투태세를 갖추곤 했다.
그 모습을 본 해골 교장이 한마디 했다.
“빨리 에인로가드에 입학시켜야겠군.”
“......”
이한은 에인로가드에 입학한 후배가 같은 탑 친구들에게 ‘검은 거북이 탑의 맹수’같은 별명으로 불릴까봐 걱정이 됐다.
닐리아처럼 친구가 많아야 할 텐데...
“저거...”
“안 된다니까!”
이한은 바로 후배의 뒷목을 한손으로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휘둘러 망토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후배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 온 거 같다고...”
“...하하. 눈썰미가 아주 좋구나! 기특한데?”
이한은 재빨리 손과 지팡이를 놓고 후배를 칭찬했다.
에안두르데는 방금 오해받은 것도 잊고 싱글벙글 고개를 끄덕였다.
* * *
펭에린 가문은 제국에서 꽤 명성 높은 혈통을 갖고 있는 가문이었고, 그만큼 가문의 귀족들도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특징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알히들이었다.
알히들은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제국 문자는 물론이고 삼왕국 시절 문자, 고대 왕국 시절 문자, 칠왕국 시절 문자 등을 읽고 온갖 복잡한 산술 문제를 해결했다.
단순히 지능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귀족의 교양으로 꼽히는 검술에서도 여러 검객을 감탄시키는 성취를 보였고 음악이나 문학, 미술에서도 빠짐이 없었다.
이런 재능을 갖고 있는 만큼 가문 내에서도 그 기대가 컸다.
“그러니까 에인로가드로 보내는 게 맞습니다. 애초에 에인로가드로 보내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다니요. 펭에린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알히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펭에린 가문의 명성이 조금 더러워진다 하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고나달테스 님이라면 내가 설득하마! 알히들은 다른 범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가정교사들을 불러 공부시켜야 해!”
“왜 다른 귀족들이 가정교사들을 불러 교육시키는 대신 에인로가드로 보내겠습니까? 에인로가드는 제국의 가장 전통 깊고 뛰어난 마법학교입니다. 가정교사 밑에서 마법의 가르침을 받은 귀족들 중에 뛰어난 성취를 거둔 사람이 드물잖습니까.”
“그건 가정교사로 부른 마법사들이 형편없어서 그런 거지! 최고를 부르면 다를 거다. 마법학교든 마탑이든 다른 범재들하고 섞여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단 말이다!”
알히들을 두고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팽팽하게 의견을 내세웠다.
나이 있는 사람들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혼자서 제대로 독학을 하자고 주장했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은 괜한 시도를 하지 말고 에인로가드에 보내자고 주장했다.
둘 다 알히들의 재능을 진심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더더욱 대립이 심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정도로.
“알히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에인로가드에 가보고 싶지 않으냐?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에서 최고의 인재들과 절차탁마하는 거다.”
“괜한 압박주지 마라. 알히들. 가봤자 네 수준에 맞는 녀석들을 찾기 힘들 거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면서 고독하게 보내야 할 걸!”
알히들은 머뭇거리며 가문의 어른들을 쳐다보았다.
본인의 재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선택이 옳을지는 쉽게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뛰어난 스승들을 생각해보면 에인로가드에 가는 게 맞는 것 같았지만, 또 에인로가드에 가면 자신과 수준이 맞는 친구들이 없을 텐데 시간 낭비 같기도 했고...
“계시오?”
“고, 고나달테스 님! 죄송합니다. 이런 무례를... 어서 들어오십시오.”
“아니오. 우연히 이야기를 듣게 됐소. 과연. 펭에린 군의 재능 때문에 입학을 고민하고 있는 거였군.”
“그, 그렇습니다. 각하. 실례되는 말씀이오나, 어리석은 제 생각에는 알히들은 입학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는...”
해골 교장은 표정을 관리했다.
다행히 이번 겨울에는 일이 빨리 끝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욕이 나왔을 지도 몰랐다.
“그럴 수 있소.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하지.”
“각하!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해골 교장이 가식적으로 펭에린 가문의 펭귄 수인들을 달래는 동안 이한은 후배에게 속삭였다.
“저기 있는 녀석이 너와 같이 입학할 학생 중 하나야.”
“싸움? 투쟁? 굴복?”
“아니. 싸우란 게 아니라.... 아니다. 다른 탑인 거 보면 싸울 수도 있겠군. 그냥 너하고 같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쳐다보고 친해질 수 있으면 친해져라.”
“약해 보임니다.”
“약하다고 해서 친구가 못 되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워다나즈. 이리 와봐라.”
후배한테 ‘에인로가드에서 친구 만들기’를 교육하던 이한은 해골 교장의 부름에 멈칫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펭에린 가문의 분들께서 에인로가드 학생의 평균 수준을 알고 싶어하시는구나!”
“...?”
이한은 에인로가드 학생의 평균 수준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이야기라도 하란 건가?
“가이난도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해골 교장은 이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뒤 말했다.
“여기 워다나즈 녀석은 에인로가드 내에서 나름 평균에 들어가는 녀석이오.”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이한이 자신감이 넘치거나 오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에인로가드 평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수석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이 녀석을 보면 에인로가드의 평균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자. 펭에린 군. 이리 와봐라.”
알히들은 낯선 마법사들을 만난 탓에 긴장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는 일말의 자신감도 엿보였다.
자신보다 선배라 하더라도, 지식에서 밀릴 리는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펭에린 군이 어떤 부분에 뛰어나오?”
“알히들은 숫자를 다루는 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보여주시겠소?”
펭에린 가문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두꺼운 산술책을 갖고 왔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페이지를 하나 펼쳤다.
“자. 알히들. 풀어 보거라.”
-마법사는 은화 스물두개로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사려고 한다...
슥삭슥삭-
알히들은 고개를 숙이더니 깃펜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와 수식이 어지럽게 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답을 구한 알히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풀었습니다!”
“......”
“......”
“?”
평소와 다른 반응에 알히들은 당황했다.
가문의 어른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알히들과 이한을 연달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잘했다. 펭에린 군. 하지만 네 선배는 네가 고개를 숙인 순간 답을 적어서 냈다.”
“...?!!”
알히들은 믿기 어려워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이한이 든 종이에도 알히들이 낸 것과 같은 답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수식도 없이 깔끔하게!
‘말도 안 돼! 속임수야, 이건!’
해골 교장은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펭에린 군도 나쁘지는 않소. 에인로가드에서는 약간 부족할 수는 있지만... 뭐... 에인로가드는 약간 부족하다고 학생의 입학을 막는 가혹한 곳이 아니오.”
‘진짜 너무하시네.’
이한은 펭귄 수인 후배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자 조금 미안해졌다.
알히들 정도라면 아마 1학년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한이 지나치게 산술에 능한 거지 알히들이 부족한 게 아닌데...
“알, 알히들이 숫자만 잘 다루는 건 아닙니다. 알히들은 문자에도 아주 능합니다.”
“보여주시겠소?”
펭에린 가문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삼왕국 시대의 두꺼운 역사서를 갖고 왔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페이지를 하나 펼쳤다.
“자. 알히들. 읽어 보거라.”
-세 왕국이 서로 증오하며 대륙을 불태우자, 분노한 ■■■■■가 보복에 나섰다...
“잠깐.”
해골 교장은 알히들이 은근슬쩍 넘어가자 지적하며 낭독을 멈추게 만들었다.
“왜 넘어가는 거지?”
“예? 이건 지워져서 읽을 수가 없는...”
“지워진 게 아니다. 워다나즈? 설명해줘라.”
“...그건 서하린 왕국 문자로 다시 쓰여진 거다. 서하린 왕국 문자로 ‘고나달테스’라고 읽는 거야.”
“!!!!”
이한의 말에 알히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까와 달리 이건 속임수가 있을 수 없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갖고 와서 연 책 아닌가!
‘나...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니...!’
“다음은 뭐지? 검술인가?”
“그, 그렇습니다.”
“칼 갖고 와라. 워다나즈.”
해골 교장의 가차없는 지시에 이한은 속삭였다.
“교장 선생님. 좀 불쌍하지 않습니까?”
“별 재능도 없는 놈 달래서 입학시키려는 내가 불쌍하단 거냐? 위로해줘서 고맙구나.”
“...아니 저 후배가...”
“주제 파악을 공짜로 시켜주는데 감사 인사를 받아야지 불쌍은 무슨. 지금 깨닫는 게 차라리 낫다. 나이 먹고 깨달으면 알시클 되는 건데 그게 낫겠느냐?”
이 자리에 없는 알시클을 난도질하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이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검을 가지러 갔다.
* * *
몇 차례의 대결이 끝나자 펭에린 가문의 응접실은 상당히 조용해졌다.
가문의 어른 중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알히들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났던 건 아닐지도...”
“같은 가문의 일원이라 우리가 너무 홀려있던 거 아닌가?”
“...무, 무슨 말씀을! 알히들의 재능이 뛰어나단 건 가문 밖의 사람들도 말했잖습니까!”
“그냥 예의상 한 칭찬일지도 모르잖나.”
“...?!”
그...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