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말,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겪은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에서는 가끔 구경할 수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드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알히들에게 오늘 일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건 속임수입니다! 속임수!”
얼굴이 붉어진 알히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아직 어린 만큼 그 태도에는 치기가 강하게 서려있었다.
“저... 저 선배는 5학년 정도 되는 거 아닙니까!”
“올해까지 1학년이었다. 펭에린 군.
“그... 그럼... 그러면 저 선배는 학년 수석이시겠죠! 절대 평범할 리가 없습니다!”
“!”
‘아니?’
해골 교장과 이한은 예리한 알히들의 지적에 깜짝 놀랐다.
과연 가문에서 우수하다고 소문이 난 녀석답게 보통 두뇌가 아니었다.
“아닌데?”
그러나 해골 교장의 뻔뻔함이 한 수 위였다.
이한은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했지만 해골 교장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수석은 무슨. 에인로가드에 이 녀석 정도 되는 학생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굴러다닌다. 맞지, 워다나즈?”
“......”
“그만해라! 알히들. 부끄럽구나!”
다행히 늙은 펭귄 수인이 이한 대신 벌컥 화를 냈다.
“네가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 탓을 하다니! 펭에린 가문의 핏줄이 언제부터 그리 비열해졌더냐?”
“그, 그게 아니오라... 분명 평범하신 선배는 아닐 거라 생각...”
“감히 네가 고나달테스 님의 말을 무시한다는 거냐! 고나달테스 님께서 쌓아올린 명성의 발뒤꿈치도 따라오지 못할 네가!”
늙은 펭귄 수인은 부리를 떨며 알히들을 책망했다.
알히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부끄러워했다.
‘아니, 이래도 되나?’
이한은 해골 교장한테 좀 말려보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자신의 칭찬이 매우 타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더 해라!
“......”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네 잘못만이 아니다. 우리 가문의 모두가 잘못했다. 친족이라 해서 재능을 과대평가한 것이지. 고나달테스 님.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재능 없는 녀석을 에인로가드에 데리고 가서 단련시켜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그럴 생각으로 왔소.”
해골 교장은 세상에서 제일 선량한 대마법사처럼 말했다.
“펭에린 군.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에인로가드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한다면 여기 있는 네 평범한 선배처럼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교장 선생님. 작작 하시죠 좀.”
이한은 신나서 알히들을 놀리는 해골 교장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후배인 만큼 조금 불쌍했던 것이다.
“선... 선배님. 방금 전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알히들은 주저하며 다가왔다.
정신이 들자 아까 자신이 한 소리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느낀 것이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다. 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한은 재빨리 애를 달랬다.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양심이 너무 찔렸던 것이다.
“그리고 네 실력은 충분히 대단했어. 에인로가드에 입학하면 훌륭한 성취를 이룰 거다.”
“아닙니다! 그렇게 달래주실 필요 없습니다.”
알히들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오늘 일로 확실하게 느낀 것이다.
자신은 펭에린 가문 안에서 속고 있었다는 것을!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입학할 때까지, 아니, 입학한 뒤에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선배님이 오늘 보여주신 경지에 도달하겠습니다.”
“어... 음... 아니...”
이한은 ‘내 친구들 중에서도 그런 놈은 없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반드시!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내가 내 가문 이름을 말했었나?”
이한은 지금이라도 ‘내 이름은 가이난도란다’가 통할지 살짝 떠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알히들이 의욕에 가득차서 돌아가자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네 덕분에 공부 열심히 한 건데 감사하게 여겨야지.”
“......”
‘진짜 한 대만 때리고 싶군.’
* * *
...이한,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러는 건데? 물론 내가 흑마법 책들을 공부 안 하긴 했어! 하지만 방학이잖아! 앞으로 진짜 공부할 테니까 이런 짓은 진짜 진짜 하지 마! 알겠어? 정말 이런 짓은 다시는 해서는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공부 좀 안 한 게 그렇게 큰 죄야!?...
“이 자식. 공부 안 해놓고 자기가 화를 내다니.”
“?”
옆에 있던 에안두르데가 <제국 길드의 역사>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후배. 네 이야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내 친구 중에서 공부 안 하는 녀석이 있거든. 그런데 되레 화를 내지 뭐야?”
“커다란 중죄!”
“그렇지. 아주 중한 죄지. 똑똑한데? 쿠키 하나 먹으렴.”
후배는 신이 나서 쿠키를 먹었다.
“사형!”
“사형까진 아니고. 그렇지만 쿠키 하나 더 먹으렴.”
후배는 우물거리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한은 가이난도가 보낸 괘씸한 편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흑마법 책들을 공부하지 않고 있었다니. 아주 괘씸한 녀석이었다.
...가이난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서 만났을 때 공부가 되어있지 않으면 네가 읽는 잡지의 모든 사건들을 미리 말해주겠다... 어떤 협상이나 타협도 불가능하다... 내가 낼 스무 문제 중 열아홉 문제 이상을 맞추지 않는다면...
답장을 마무리 지은 이한은 요네르한테서 온 편지를 뜯었다.
...이한. 편지는 잘 받았어.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참. 닐리아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네가 준비해 준 서명서가 정말 도움이 됐대. 닐리아도 지금 편지를 준비 중이긴 한데, 글씨가 악필이라 좀 더 연습을 하고 싶은 것 같아.요아넨 언니가 널 찾는데 아무래도 한동안 공방 근처는 피하는 게 좋겠어. 언니가 저렇게 사람 찾을 때에는 보통 일을 지독하게 시키려는 때거든. 보수가 좋다고 해서 속지 마...
‘보수가 좋다고?’
이한은 당장 해골 교장의 일을 내버려두고 공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한이 없는 사이 다른 연금술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참. 그 사업은 조금 더 보완해야 할 것 같아. 후원자들 중에는 실패할 경우 난폭해지는 사람들도 있거든...
친구의 답장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을 확보하란 소리군.’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혹시 편지에 쓸 내용 없어서 같은 내용을 똑같이 붙여 넣은 건 아니지? 닐리아랑 이야기하는데 같은 내용이 좀 보여서. 그런 거라면 격식 안 갖춰도 되니까 굳이 붙여 넣을 필요 없어...
“!!”
이한은 깜짝 놀랐다.
...요네르. 답장은 잘 받았어. 닐리아한테는 마법을 추천해. <하급 조종> 주문을 잘 익히면 악필이라도 팔의 피로 없이 대량의 편지를 쓸 수 있으니까. 혹은 다른 서기를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나도 편지를 많이 써야 할 때는 그런 식으로 하거든.
사업 방식에 대한 조언 고마워. 후원자들이 난폭하게 굴지 못하도록 조금 더 무력을 확보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내용이 같다고 느껴지는 건 완전한 우연의 일치야. 격식을 갖춰서 요즘 있었던 일들을 쓰다보니 조금 겹쳤나봐. 오해하지 말고...
‘앞으로는 닐리아한테 편지 보내지 말아야겠군.’
이한은 냉혹하게 다짐하며 다음 편지를 열었다.
...날씨가추워지고눈이내리는계절에는이런일화가떠오릅니다백이십년전마법사올로에데가말하기를...
‘...누가 보낸 거지?’
정해진 양식보다 훨씬 더 빽빽하게 써넣은 편지 내용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어찌나 빽빽하게 써넣었는지 띄어쓰기가 잘 안 느껴질 정도였다.
-제국의 핏줄, 아덴아르트가
“......”
이한은 예상 밖의 인물에 할 말을 잃었다.
황녀가 편지 위에서는 이렇게 말이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모든문제가해결되었다는점에서우리는많은교훈을얻을수있을것같습니다그러고보니저번에해준고기파이가떠오릅니다정말로훌륭한요리였습니다요리사한테부탁해도그맛이나오지않더군요아,편지를쓰는도중에편지를먼저받았습니다읽고마저쓰겠습니다...
‘눈 아프군.’
이한은 읽다가 인상을 찡그린 채 내려놓았다.
대충 앞에도 쓸데없는 내용이 많은 만큼 뒤에도 쓸데없는 내용이 많을 것 같았다.
다음에 마저 읽어야겠다!
...편지잘받았습니다워다나즈편지에감사드립니다그런데하나말씀드리고싶은게있다면제가흰호랑이탑학생들의빵을훔친건제친구들의빵을그들이먼저훔쳐갔기때문에돌려주기위해서그런것입니다아시겠습니까?절대오해하시면안됩니다...
* * *
수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이한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수도를 제외한 제국 전역의 학생들 중 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날아다니는 마차 안에서 알시클은 이한의 후배에게 ‘펭에린 가문의 역사’를 알려주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펭에린 가문은 이 때 비버 수인들의 반란을 막고 제국 귀족의 칭호를 얻은 거지.”
“그 뒤로 뭘 했슴니까?”
“그 뒤로는... 음... 딱히 한 거 없긴 한데 그건 뭐 다른 가문들도 마찬가지고...”
“워다나즈 가문은 마력의 역류로 제국 서부에 대가뭄이 일어났을 때 가주께서 바닷물을 통째로 옮겨서 소금기를 빼버린 다음 저수지를 만드셨슴니다?”
“......”
알시클은 설마 이런 풋내기한테 허를 찔릴 줄은 몰랐다.
“워... 워다나즈 가문이 이상한 거야!”
“알시클 님...”
“아, 아니. 네가 이상하단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있던 해골 교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은 어떻게 입학하지도 않은 녀석한테 말로 지는 거냐?”
“이렇게 많이 배웠을 줄은 몰랐죠...!”
“쯧쯧. 변명도 참 추하구나.”
빠르게 지나가는 아래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이한은 저 멀리 보이는 북부 대산맥을 발견하고 물었다.
“잠깐, 신입생이 북부 산맥에 있습니까?”
“아니. 산맥 아래쪽이다.”
‘휴.’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맥에 들어가서 그림자 순찰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림자 순찰대원들이 좀 귀찮은 사람인 것과 별개로, 해놓은 거짓말들이 있는 만큼...
탁-
마차가 분지에 도착해서 내리자, 길 아래쪽에서 일련의 무리가 올라왔다.
그림자 순찰대였다.
“!!!”
“그림자 속의 종복이 인사드립니다. 고나달테스 각하. 산맥에 방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오늘은 산맥에 방문하려고 온 게 아니다.”
해골 교장은 익숙하게 그림자 순찰대의 환영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서 이한은 해골 교장이 여기 한두번 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제국에서 열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산맥에서 활동하는 사냥꾼들이라 하더라도 마법의 힘은 필요할 터.
그리고 이런 곳을 도와줄 수 있는 제국의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저희가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그래. 고맙군.”
“참. 저희 어린 사냥꾼은 잘하고 있습니까?”
“아주 잘하고 있네. 미래가 기대되더군.”
“감사합니다! 저희 사냥꾼을 자랑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정말로 기특한 녀석입니다. 이번에 특별히 내주신 숙제를 하기 위해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더군요.”
“앗. 교장 선생님. 저기 기사들입니다! 와! 여기 기사들도 있군요!”
이한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해골 교장은 눈치 채지 못하고 대답했다.
“북부 산맥 인근 기사들이다. 저 녀석들도 신입생을 탐내나보군.”
“저런! 괘씸한 기사놈들입니다.”
“기사들이 원래 배은망덕하고 괘씸한 놈들이지.”
“동의합니다!”
그림자 순찰대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저 어린 소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맞는 말만 하는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