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화
“그렇지. 싸움을 싫어한다면 기사보다는 마법사가 어울리지 않겠나.”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알시클은 잘됐다는 듯이 설득했다.
과연 에인로가드 안 다녀본 사람답게 자신감 있게 헛소리를 했다.
“기사는 매일 피와 땀을 흘리고 철을 휘두르니까. 그에 비해 마법사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공방에서 연구만 할 수 있지.”
“으음.”
“??”
이한이 동의하는 대신 침음성을 내뱉자 알시클은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과연 마법사가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직업일까요?”
“!?”
갑자기 당황스러운 소리를 하는 이한의 모습에 알시클은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우리는 얘를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에인로가드가 싸움 싫어하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곳인가 싶어서요.”
“그래봤자 얼마나 싸우겠어! 야. 여길 봐라. 주말마다 몬스터를 만나겠는데!”
“에인로가드는 이틀마다 몬스터를 만날 텐데...”
“......”
알시클은 말문이 막혔다.
뭔...?
고민하던 이한은 예비 후배를 보며 물었다.
“마법에는 관심이 있고?”
“그... 그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다.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
“있긴 합니다.”
울간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딱 봐도 대단한 마법사들 같은데 자기 같은 나무꾼이 마법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이한이나 알시클은 전혀 구박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물었다.
“오. 그래? 관심이 있다면 잘 됐는데. 어떤 마법에 관심이 있지?”
“그 마법사 분들 중에 도끼나 팔다리에 마법 걸어주시는 분들 있잖습니까.”
“부여 마법... 그 중에서도 강화계 특화쯤 되려나.”
“전통적인데. 흰 호랑이 탑 출신들이 보통 저쪽 학파에 능하다면서?”
이한과 알시클은 흥미로워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울간이 더 말했다.
“그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좋지. 뭐든지 말해봐.”
“정령을...”
“정령과 계약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정령 퇴치 마법도 배워보고 싶습니다. 벌목에 방해가 되어서 말입니다. 또 나무들을 한 번에 죽이는 물약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가끔 살아 돌아다니는 나무들이 귀찮게 굴어서...”
“......”
“......”
‘일렌딜 선배하고는 절대 만나게 하면 안 되겠군.’
에인로가드의 산림을 초토화시킬 것 같은 후배의 잠재력에 이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울간. 에인로가드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말해줄게. 에인로가드가 싸움을 안 할 환경은 아니야. 여기 산맥만큼 넓은 곳이라 몬스터들도 돌아다니거든.”
“아. 이야기 들었습니다.”
울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로가드의 소문은 가끔 놀러오는 순찰대 사냥꾼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엄청나게 넓다고!”
“그렇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 출신 선배가 수석에 인기도 좋고 교수님들이 다 자기 제자로 삼으려고 한다고!”
‘그런 사람이 있었나?’
이한은 의아해했다.
“미안. 내가 선배를 다 알지는 못하거든. 여하튼 넓은 만큼 싸움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는 거야. 산맥 들어가서 연금술 재료 캐다가 몬스터를 만날 수도 있어. 가끔 교장 선생님이 습격할 때도 있고.”
“과연... 예?”
울간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면 선배 특유의 농담이거나.
“이해했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저는 싸움을 싫어합니다!”
울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시클과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싸움에서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북부의 나무꾼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알시클은 날개를 움직여서 박수를 쳤다.
이 어린 마법사의 각오를 보니 설득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에인로가드는 널 환영할 거다!”
“맞아. 내가 말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에인로가드에서 싸움을 피할 방법이 없지는 않아. 자기 연구에만 집중하면 싸울 일이 별로 없어. 실제로 나도 싸움을 별로 안 좋아하고.”
옆에서 졸면서 듣고 있던 에안두르데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과연. 선배님도 싸움을 별로 안 좋아하셨군요.”
“난 완전 평화주의자지.”
“어, 너 배그렉... 아니다.”
알시클은 ‘너 배그렉 제자 아니었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런 화제를 꺼내는 건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콰득!
“!”
멀리서 들리는 굉음에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뽑아들고 주문을 외웠다.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동시에 몸을 옆으로 날려서 굴렀다. 혹시라도 원거리 공격을 하는 상대일 경우 조준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
알시클은 나무 부러지는 소리에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이한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무 부러진 거야.”
“그렇습니까? 전 또.”
이한은 툭툭 털며 일어났다.
마치 이 정도는 숨쉬듯 자연스럽다는 태도였다.
“아니! 진짜 몬스터입니다!!”
울간이 다급하게 외치며 도끼를 붙잡았다.
부러진 나무 뒤에서 귀신나무가 나타난 것이다.
사악한 악령이 영체 형태가 아닌 나무와 결합한 형태로 움직이는 몬스터인 귀신나무는 언제나 나무꾼들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나무를 베는 행위 자체가 숲의 질서와 균형을 흔드는 만큼 저런 몬스터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뒤에서 도와주십시오!”
울간의 말에 이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앞에 설 테니까 알시클 님이 뒤에서 도와주시죠.”
이한의 말에 에안두르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내가 앞에 선다!”
“???”
마법사들치고는 지나치게 전위를 선호하는 모습에 울간은 당황했다.
원래 마법사들은 뒤에서 마법을 지원해주는 게 일반적인 전투 아닌가?
“뒤에 있도록. 후배.”
“힝.”
“뭘 힝이야. 어차피 에인로가드 가면 귀신나무 또 만날 텐데, 그 때 싸워. 지금은 나한테 맡기고.”
그래도 선배인 만큼 이한은 후배들이 앞장서게 둘 수 없었다.
<배그렉의 일순 예지>와 <고나달테스의 끓어오르는 힘>을 시전하고 <공간 인지>까지 영창했다.
“공간이여, 인지되어라...”
“...보통 싸울 때 그 주문들을 다 거는 거야?”
“걸죠?”
이한은 알시클이 왜 묻는지 몰랐다.
사자가 토끼 한 마리 잡을 때에도 왜 전력을 다하겠는가?
정답은 ‘에인로가드의 토끼라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에’였다.
토끼가 공간이동하거나 맹독을 내뿜거나 사악한 저주를 걸 수 있으니 그냥 최대한 대비를 하는 게 맞았다.
‘마력 많은 녀석은 차원이 다르구나!’
알시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른 마법사가 봤다면 기겁했을 만한 낭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걸 보니 새삼 놀라웠다.
전투 마법사로 전장에 참가하면 극찬을 받을 능력 아닌가.
-■■■...
귀신나무가 다가오자 이한은 가볍게 수옥탄을 날렸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귀신나무가 비틀거렸다. 회전하는 물구슬이 살벌한 소리와 함께 안에까지 충격을 준 것이다.
동시에 이한은 새벽별을 한 손에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흑자석(黑紫石) 검이 한 번 베고 지나가자 나무 안의 악령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마력 흡수!’
알시클은 새벽별의 칼날이 상대 몬스터에게서 마력을 뜯어내는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이한이 새벽별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한 번 더 놀랐다.
‘아니 마법사가 왜 저런 아티팩트를...’
마법사한테 마력 흡수 장비는 금기에 가까웠다.
당장 마력 흐름에 영향을 주는 아이템들도 꺼림칙하다고 쓰지 않는 마법사들이 여럿인데, 심지어 마력 흡수 장비라니.
귀신나무가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반격을 시도했다. 기다란 나뭇가지가 채찍치듯이 물결치더니 이한을 위협했다.
그러나 반격이 날아왔을 때 이한은 이미 거리를 벌린 뒤였다.
예지 마법과 공간 인지 마법으로 상대의 단순한 움직임은 손바닥 위에 있는 수준이었다.
푹!
이한은 알시클이 지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귀신나무를 끝내버렸다.
반격한 탓에 무너진 균형을 노리고 수옥탄을 날린 뒤 쓰러진 놈에게 일격.
새벽별을 납검하고 돌아온 이한은 울간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화 마법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 방금 본 마법들이 꽤 마음에 들었겠군.”
그러나 후배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이 싸우시는 걸 보니 제가 에인로가드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
싸움을 별로 안 좋아하는 평화주의자 선배도 저런 실력인데, 자기 같은 사람이 잘 버틸 수 있을지 갑자기 걱정이 됐던 것이다.
* * *
“그렇게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지.”
“대, 대단하시군요.”
‘허풍이 심하시군.’
해골 교장은 통나무집 앞에서 기사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최근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기사들은 호응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허황됐던 것이다.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로 지원금을 받아내다니...
아마 다른 지원금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꼭 내 제자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 녀석은 정말 관료 격멸자란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어. 자네들도 이런 인재를 길러놔야 지원을 받기 쉬울 걸세.”
“...저, 저희는 실력으로 승부할 겁니다.”
기사들은 부러우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색하면 자존심이 상했다.
“실력 같은 소리 하고 있군. 에인로가드가 제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나? 그런데 관료 놈들은 금화 뺏을 생각만 하고 있지.”
‘에인로가드가 제국에 입힌 피해는 생각 안 하시는 건가?’
‘정말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로 지원금을 받으신 거면 저런 소리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관료 놈들이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해도 기사들은 일단 동의했다.
그들도 제국의 관료들에 대해서는 안 좋은 기억이 많았으니까.
특히 북부처럼 험준한 환경에서 몬스터와 싸울 일 많은 기사들에게 관료들의 인색함은 언제나 원한 대상이었다.
“저번에 요새에서 반 년 가까이 버티는데 이 자식들이 지원 한 번 안 해주더군요. 비축한 물자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렇지.”
“마법사가 부족해서 요청했더니 마법범죄자가 탈주해서 그쪽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하고!”
“음. 관료들도 사정이 있었겠지.”
“!?”
기사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당황했다.
“각하.”
기회를 엿보던 노기사는 대화가 잠시 멈추자 끼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골 교장의 의도가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저희에게 이렇게 지혜를 나눠주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지혜?’
옆에 있던 기사들은 이게 뭔 지혜 전수냐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고나달테스 공의 권력이라면 헛소리도 지혜가 되는 법.
“저희가 아둔해서 각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텐데, 이렇게 계속 베풀어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음. 슬슬 말해줄 때가 된 걸지도 모르겠군.”
해골 교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기사는 귀를 기울였다.
대체 이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그 때 밑에서 이한 일행이 울간과 함께 올라왔다.
“교장 선생님. 후배가 에인로가드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잘했다. 관료 격멸자야.”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다 됐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다들 이야기 즐거웠다.”
해골 교장은 가볍게 일어나더니 기사들을 격려해주고 이한 일행과 함께 유쾌하게 떠나버렸다.
기사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 뒷모습만을 노려보았다.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