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좀 더 빨리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한은 뒤에서 쏟아지는 기사들의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기사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울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느긋했다.
“그럴 필요 없다.”
“어, 또 설득할 신입생이 있으십니까?”
“아니. 이 주변 기사 놈들 만나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그건 그거대로 섭섭한 짓 아니겠느냐.”
수도의 부유한 귀족들처럼 북부의 기사 가문들 또한 에인로가드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다.
물론 수도 귀족들하고는 관계가 조금 다르긴 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딱히 아쉬운 게 없는 만큼 언제나 해골 교장이 부탁하는 입장이었지만, 북부의 기사 가문들은 해골 교장과 상부상조하는 관계인 것이다.
척박하고 험악한 북부의 지형은 언제나 마법사들을 필요로 했고, 에인로가드를 이끄는 해골 교장은 북부 기사 가문들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우군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람들을 속이신 겁니까?”
“속이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정당한 승부였다.”
“정당한 승부!”
후배가 좋은 걸 배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후배의 귀를 막았다.
알시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방금 일이 만남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북부가 얼마나 넓은데 방금 만난 기사들을 또 만나겠느냐. 그냥 편하게 쉬고 온다고 생각해라.”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과 알시클은 안심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냥 기사 가문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적당히 맛있고 즐겁게 먹고 마시면 되는 일 같았다.
“과연. 만찬은 어디서 열립니까?”
“모라디 가문의 성채에서. 북부에서 거기만한 장소가 또 없지.”
“오. 잘 됐습니다. 저 모라디하고 친한데.”
“?”
해골 교장은 의아해했다.
그랬나?
* * *
전형적인 북부 기사 가문인 모라디 가문의 영지는 제국의 대귀족 가문의 영지와는 전혀 달랐다.
도시와 마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세상의 번잡한 시름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 속에 예술품처럼 만들어진 저택을 세워놓는 게 제국 대귀족 가문의 풍습이었다.
그러나 북부 기사 가문들은 저택이 아니라 성채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지의 실용성과 전투력을 매우 중요시했다.
북부에 몇 안 되는 커다란 강을 끼고, 그 위로 삐죽이 솟은 거대한 산 위에 촘촘하게 성벽과 가문의 시설들을 배치해놓은 모라디 가문의 성채는 그야말로 북부 기사 가문 그 자체였다.
‘오.’
딱 봐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법한 거대한 성채에, 이한은 왜 모라디가 흰 호랑이 탑 안에서 발언권이 강한지 알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다른 기사 가문의 성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규모.
그리고 영지의 규모는 가문의 경제력과 비례하기 마련이었다.
‘모라디가 내 생각보다 돈이 많았나?’
맨날 흰 호랑이 탑 놈들하고 이야기하면 ‘우리 기사들은 제국을 위해 헌신하고 시민을 지키느라 돈이 없다 흑흑’하고 투덜대길래 ‘진짜 돈이 없나보다’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속은 것 같기도...
“고나달테스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성채의 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 안에서 기사들이 나오더니 깍듯하게 말했다.
“각하. 올해는 정문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이한과 알시클은 황당해했지만 해골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히 감사해해야지. 가주는 있나?”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도록. 너희들은 만찬 때까지 쉬고 있어라.”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마령관이자 제국 마도방벽의 수호자인 만큼, 해골 교장은 모라디 가문의 가주와 할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산맥의 정세부터 시작해서 최근 북부의 동향이나 지원금 액수 같은...
“모라디 가문의 영지는 처음 방문해보는데 신기하네.”
알시클은 바위로 된 좁은 통로를 따라서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
이렇게 전투에 특화된 영지는 제국에서도 드물었다. 모라디 가문의 역사가 느껴지는 영지였다.
“친구가 여기 가문이라고?”
“네.”
“신기한데? 보통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하고 안 친하잖아.”
“검술 강의 들으면서 친해졌습니다.”
“...보통 푸른 용의 탑 학생이 검술 강의를 듣나?”
알시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반대쪽에서 기사들이 다가왔다.
“손님께서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올라가셔야... 엇.”
“......”
아까 울간을 데리러 온 기사가 무리에 끼어있자 이한과 알시클은 멈칫했다.
“모라디 가문의 기사셨습니까?”
“...예...”
원래 휴식 기간이었는데 기사단의 일을 돕기 위해 잠깐 나갔다가 돌아온 모라디 가문의 기사, 잉칸은 마법사들을 만나자 매우 머쓱해했다.
알시클도 좀 머쓱했는지 사과했다.
“그,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울간이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그게 마법사 님들 잘못은 아니지요.”
에안두르데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한은 후배의 턱을 붙잡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모라디 가문은 손님으로 오신 분들을 언제나 존중합니다.”
잉칸이 기사들과 함께 물러나자 이한 일행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손님들이 묵는 탑은 넓고 쾌적했지만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들 생각보다 안 많은 거 아닙니까? 만찬회 자리에서 또 기사단 기사들 만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괜찮을 거야. 기사들은 만찬회 때 죽을 만큼 마시잖아. 알아보지도 못할 걸.”
“......”
이한은 알시클의 말에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빛을 보냈다.
‘이 사람, 기사들하고 별로 친하게 지냈을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기사들이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당장 이한이 참석했던 모임에서도 신나게 마셔대지 않았던가.
격식이나 예의를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귀족들의 모임과 달리 기사들의 모임은 좀 더 활발한 편이었다.
똑똑-
“마법사 님. 안에 계십니까? 기사들 중에 마법사 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
이한은 예상 밖의 제안에 의아해했다.
만찬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다른 기사들이 만나고 싶어하다니.
“혹시 함정 아닙니까?”
“...아니야!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알시클은 기겁해서 부정했다.
원래 제국의 유명 인사들은 어딜 가든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쌓은 명성과 업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고, 나중에 돌아가서 ‘내가 이런 사람하고 이야기도 나눠봤다’ 자랑도 하고...
이런 대화 자체가 즐거움이자 이득이었으니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알시클이나 이한이 제국의 유명 인사까지는 아니었지만 둘 다 대귀족 가문 출신에 한 명은 에인로가드 소속 학생이었다.
북부의 기사들 중에서는 이런 전도유망한 마법사와 인맥을 맺고 싶어하는 이들이 제법 될 터.
“잠깐 나가서 이야기나 해주자. 인사해두면 나중에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잠시만요. 정어리 통조림 챙겨놓은 게...”
“야. 통조림은 필요 없어.”
* * *
모라디 가문의 영지에는 꼭 가문의 기사들만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더 많을 때도 많았다.
손님이나 초대받은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그 숫자는 제법 됐는데, 자기 가문의 기사를 다른 가문에 보내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일은 기사 가문에서는 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라디 가문처럼 영향력 있는 기사 가문이라면 더더욱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리고 젊은 기사들이 훈련받으며 서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 알시클과 이한을 부른 기사들도 북부의 여러 가문에서 온 기사들이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라고 했지? 몇 학년이라고 했나?”
“정확히 듣지 못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아마 3학년일 거야. 너도밤나무 기사단에서 복무하는 친구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허, 아직 3학년인데 그 정도 업적을!”
“괜히 워다나즈 가문이 아니지.”
“알시클 님은 그, 펭에린 가문 맞으신가?”
“맞지.”
“그럼 혹시 정어리를 먹어달라고 부탁해도 괜찮을까?”
“음. 대놓고 말하기는 좀 부끄러우니 간식으로 미리 꺼내놓자구.”
기사들은 음흉한 흉계도 꾸며가며 마법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 일행이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 님!”
“이 분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시고, 이 분이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이시겠군요! 이 분은...?”
“제 후배입니다. 에안두르데라고.”
“에안두르데!”
이한의 설명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이 분은 2학년이신가요?”
“...아직 입학도 안 했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워다나즈 님이 3학년이신 만큼 무심코.”
“...저 3학년 아닙니다!”
이한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해골 교장의 함정인가?
“어, 3학년이 아니셨습니까? 4학년?”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갑니다만.”
“......”
“......”
기사들이 마치 석화 저주를 맞은 것처럼 일제히 뚝 움직임을 멈추자 이한은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나 싶었다.
‘1학년인 게 그렇게 문제였나?’
“그... 그렇... 그렇군요.”
“좀, 좀 놀랐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그, 구울의 왕을 토벌했다고 들으셔서 최소한 3학년쯤은 되시는 줄...”
“컥.”
이한은 북부까지 퍼진 소문에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떤 놈들이?
“제 친구가 너도밤나무 기사단에서 복무하는데, 워다나즈 님이 반마법주의자들을 쓸어버리셨다고...”
“그거 혼자 한 거 아닙니다!”
범인을 찾은 이한은 쿨럭이며 해명에 나섰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보여주는 호의는 고마웠지만 너무 부풀리면 뒷감당을 해야 하는 건 이한이었다.
“다른 조력자와 행운이...”
“겸손하시기까지!”
“...앗. 알시클 님. 여기 정어리 있습니다.”
이한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알시클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까 식사해서 배부른데?”
“이런...” “저런...” “아...”
곳곳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사들은 비 맞은 아기새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을지도.”
“!”
미안해진 알시클이 정어리를 하나 집어먹자 기사들은 까르륵 웃었다.
‘화제가 넘어갔군.’
“그런데 워다나즈 님. 반마법주의자들과 싸운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만.”
‘안 넘어갔군.’
이한은 기사들의 집념을 얕본 걸 후회했다.
생각해보니 여기 기사들은 애초에 이걸 듣고 싶어서 부른 것 같기도 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아주 상세하게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게...”
“잠깐! 모임 시작부터 말해주십시오. 그 날에는 어떤 옷을 입고 가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음... 교복에 외투 걸쳤던 것 같은데...”
기사들은 이한의 기억력을 쥐어짜듯이 집요하게 하나하나 물어댔다.
이한은 어떻게든 버티며 대답해갔다.
“...운이 좋았습니다. 기사분들이 협력해주셔서 버틸 수 있었던 거죠.”
“듣고 보니 워다나즈 님은 기사들과 참 사이가 좋으십니다. 마법사들 중에서 그런 분이 드문데 말입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모라디 가문의 지젤 님도 같이 싸우셨다고 들었는데, 친하신 겁니까? 같은 에인로가드 출신이신 만큼 당연히 친하실 것 같습니다만...”
“하하. 친하죠.”
“잠깐. 그럼 모라디 님도 불러오자!”
“좋은 생각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