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난 안 쓰러져서 놀란 줄 알았는데.”
“......”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발파탄은 나름 진지했다.
보통 지클린과 단독으로 대화한 사람들 중에 멀쩡하게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쓰러지거나, 졸거나, 호흡곤란을 일으키거나...
그 뒤로는 이제 지클린이 멀리서 다가오기만 해도 기겁해서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놀랍게도 지클린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건 설마...”
“?”
“...그...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일상적인 대화를 전설에 나올 법한 검술처럼 이야기하는 게 짜증이 났지만, 지젤도 발파탄이 왜 저러는지는 이해했다.
지젤의 언니는 별로 화술이 좋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대의 숨통을 막는 화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누구를 앞에 앉혀놓으면 죽음 같은 침묵이 맴돌기 마련인데...
“좀 신나시긴 한 것 같습니다.”
“뭐? 신나신 거라고 저게?”
발파탄은 한 번 더 놀랐다.
수다스러운 것도 놀라운데 저게 신난 거라니.
아무리 봐도 무표정한 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갑옷까지 입고 있어서 누가 보면 포로로 붙잡은 마법사를 심문하는 줄 알 것이다.
“신나실 수도 있는 분이셨어!?”
“언니가 신나면 안 됩니까?”
“아, 아니... 신나셔도 되지. 신나시면 좋지...”
지젤이 날카롭게 쳐다보자 발파탄은 꼬리를 내렸다.
* * *
‘할 수 있다.’
이한은 지클린의 ‘17년 전 물방울 요새 공략전에서 있었던 강철 기사단의 우회 전술과 그 분석’ 이야기를 들으며 박수를 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음.”
지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황했겠지만 이한은 이미 상대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런데 강철 기사단이 언덕을 우회할 때 어떻게 한 겁니까?”
“아주 빠르게 했습니다.”
“...과연! 빠르다는 건 알았습니다. 어떤 탈것을 사용했죠? 또, 언덕의 어느 경로로...”
지클린은 숨막히는 상대였지만, 이한이 상대해 온 숨막히는 상대들은 지클린이 처음이 아니었을 뿐더러 마지막도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클린 정도면 상대하기 쉬운 편에 속했다.
최소한 악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말하다가 공격하지도 않고.
‘말재주가 없을 뿐이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는 전혀 모르고, 그나마 관심 있는 전투나 전쟁 이야기도 미사여구 없이 핵심만 딱딱하게 던져대니 이야기가 끊기는 것도 당연했다.
이한은 자신이 상대해 왔던 미친 교수들을 떠올리며 인내심 있게 상대의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인근 목장에서 불발톱표범들을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저런. 불발톱표범들을 탔던 기사들이 불평을 하진 않았습니까?”
“기사들 중 화상을 입은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런. 화상을 입은 기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쿨쿨쿨-
이한 옆에 있던 에안두르데는 잠에 빠져든 지 한참이었다. 지클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충격에 빠져있던 지젤과 발파탄은 정신을 차리고 문을 두드렸다.
지클린은 동생을 보고 반가워했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지젤. 네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친한... 친구 맞죠...”
들어오면서 지젤은 이한에게 ‘너 뭐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한은 ‘나도 해골 교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 친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원래 상대가 가장 얄미울 때는 반박할 수 없는 소리를 할 때였다. 지젤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발파탄. 아까 훈련량을 벌충하러 간걸로 아는데, 왜 다시 돌아온 겁니까?”
“예? 어, 그게, 그, 여기 길을 안내하느라...”
지클린은 감정 없는 눈빛으로 발파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발파탄은 숨이 턱턱 막혔다.
“...다시 하러 가보겠습니다!”
“발파탄. 한 번만 더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처벌하겠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발파탄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긴장한 태도로 외쳤다.
선배가 주목을 끈 사이 이한은 지젤에게 속삭였다.
“여기 처벌은 어떤 거지? 징벌방이라도 있나?”
“언니의 처벌은 가문의 감옥하고 별개야. 저기 절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게 가장 가벼운 처벌이지.”
“......”
이한은 경악했다.
알라르롱이나 잉걸델 교수는 검객들 중에서도 특히 엄하고 훈련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둘을 능가하는 광인이 앞에 있었던 것이다.
‘역시 좀 미친 사람 같긴 했다.’
“...언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나쁜 사람 아니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트윈헤드 오우거를 직접 토벌한 모라디 가문의 지클린 경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니 이 자식은 대체 얼마나 이야기를 들은 거야?’
보통 지클린은 방 안에 앉혀놔도 한 시간에 몇 마디 할까 말까인데 그 짧은 사이에 어렸을 적 토벌 이야기까지 듣다니.
누가 보면 너무 친해서 워다나즈 가문이 아니라 모라디 가문인 줄 알 것이다.
“그보다 모라디.”
이한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지젤의 표정도 같이 진지해졌다.
이 자식이 저런 태도로 말할 때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뭐지? 교장 선생님과 관련된 일인가? 에인로가드와 관련된 일? 내년에 뭔가 변화가 있나? 아니면 모라디 가문? 북부에 관련된 일이라면 대산맥?’
“그, 지클린 님 말이야. 네가 언니라고 했잖아?”
“그렇지.”
“누님이 아니라 언니. 맞지?”
“언니지. 뭔 소리를 하는 건데?”
“음... 그렇구나.”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리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설마 이 새끼...?!
“야, 너... 설마...?”
“지클린 님. 트윈헤드 오우거를 토벌하실 때 사용한 전술에 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야. 이 새끼야. 야!”
“지젤. 예의 바르게 행동하십시오.”
지클린은 엄한 목소리로 동생을 훈계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너무 무례하게 구는 건 내버려둘 수 없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도 고쳐야 했다.
“하지만 언니 저 새ㄲ...!”
지클린은 엄격한 눈빛으로 지젤을 쳐다보았다. 지젤은 억울해서 뒷목을 잡을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손님을 그렇게 대접했습니까?”
“저희가 친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한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양심적으로 자기가 착각한 게 있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안에서는 이렇게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게 보통이라서요. 하하. 그렇지?”
“...그렇지.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한과 지젤은 서로 쳐다보며 마르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지클린은 엄격한 태도를 풀고 일출 직전의 이슬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생이 마법학교에 들어가서 믿을 만한 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기뻤던 것이다.
“지젤. 우정은 훌륭한 겁니다.”
“예...”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이한은 바로 꺼진 대화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지클린 님. 우정에 관한 좋은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요.”
“워다나즈는 너무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하.”
지클린이 농담하는 모습에 지젤은 이한의 발등을 콱 밟았다.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속삭였다.
“방금은 왜?”
“야. 언니랑 멋대로 농담하지 마.”
“......”
차라리 그냥 한 해 동안 오해한 걸로 발등을 밟았으면 덜 어이없었을 것 같았다.
* * *
곤히 잠든 후배가 깨어나고(지젤은 에안두르데가 후배라는 걸 듣자 매우 흥미로워했다), 격식 없는 비공식 모임도 마무리 될 때가 되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대로 숙소에 돌아가면 됐다.
‘이건 양심적으로 알시클 님이 정어리 열 개 정도는 눈앞에서 먹어줘야 한다.’
혼자 고생한 만큼 이한의 불만도 당연했다.
돌아가면 알시클의 포만감과 상관없이 정어리 공연을 보고 말겠다고 이한이 다짐하는 사이 지클린이 입을 열었다.
“워다나즈. 내일 사냥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잠, 잠깐!”
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지젤이 경악해서 외쳤다.
언니와의 소풍에 외부인이 끼어드는 게 꺼림칙한 것과 별개로, 지클린의 사냥은 절대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사냥터지기와 몰이꾼들이 나서서 사냥감을 다 몰아다주고 사냥꾼은 편하게 앉아 있으면 되는 귀족식 사냥을 생각하면 안 됐다.
지클린의 사냥은 말 그대로 기사로서의 한계를 경험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수련에 가까웠다.
모라디 가문의 기사들이야 탈진하고 쓰러져도 되니까 저런 곳에 끌고 가도 되지만, 워다나즈는 외부인 아닌가.
문제가 생기거나 불만이라도 나오면...
“위, 위험할 것 같은데...”
“어떤 점을 말하는 건지 정확히 말하십시오. 지젤.”
“일단 마법사잖아요. 체력적인 문제가 있을 텐데요.”
“워다나즈가 검술 강의 수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지젤은 고개를 돌려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그걸 또 말했냐는 눈빛이었다.
이한은 눈빛으로 ‘발파탄 그 선배가 말했어’라고 해명했다.
‘도움 안 되는 새끼!’
지젤은 이 친척을 절벽 너머로 밀어버려야 했다고 후회했다.
“모라디. 힘내. 나도 내일은 그냥 쉬고 싶다.”
“득츠...”
뒤에서 속삭이는 이한의 모습에 지젤은 이를 갈았다.
“검술 실력은 있지만 본인의 의사도 생각을 해주셔야죠. 워, 워다나즈는 타고난 마법사라 방 안에서 연구하는 걸 좋아하지 시련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지젤은 정말 이한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는지 필사적으로 이유를 만들어냈다.
지클린은 이해했다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지젤. 아까 이야기할 때 워다나즈가 먼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야, 진짜 장난해?!”
지젤은 참지 못하고 뒤에 있던 이한에게 소리쳤다.
이 자식은 대체 아까 대화할 때 뭔 이야기까지 한 것인가?!
* * *
“큭. 알시클 님을 끌고 왔어야 했는데...”
이한은 어제의 자신을 후회하며 말 위에 올라탔다.
알시클을 반드시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과연 펭에린 가문의 마법사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그 기사님하고는 이야기 다 끝났고?
-하하. 즐거웠습니다. 알시클 님.
-내가 먼저 나가서 미안한데. 뭐라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면 부탁이 있습니다. 알시클 님. 내일...
-설마 기사들끼리 사냥 가는 거 아니지? 난 기사들 사냥에는 절대 안 가. 차라리 저기 절벽 밖으로 던져줘.
-......
알시클은 이한보다 오래 산 제국 귀족인 만큼 사냥이 얼마나 귀찮은 건지 잘 알았다.
그나마 귀족들의 사냥은 좀 편하기나 하지 기사들의 사냥은 매우 불편했다.
자기들 실력을 키우겠다고 초대 받고 온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길도 없는 험준한 지형에, 사냥터지기나 몰이꾼도 없고, 짐을 들고 따라오는 하인이나 짐꾼도 없고...
다 같이 불편한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은 마법사였다.
기사들이 은근히 마법을 써주기를 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압박을 가해오는 것이다.
그럴 거면 그냥 하인이나 짐꾼을 다 데리고 가지!
-자기들 체면 세우겠다고 마법사 데리고 가서 괴롭히는 놈들이야, 난 안 가! 못 가!
-...알겠습니다. 대신 여기 있는 정어리나 다 드셔주세요.
-...화난 거 아니지?
졸지에 놀러왔다가 에인로가드에서처럼 일하게 된 이한은 한숨을 내쉬며 짐을 꾸렸다.
옆에서 본 지젤이 말했다.
“그러니까 언니한테 적당히 말했어야지. 너 때문에 지클린 언니가 얼마나 신이 나신 줄 알아? 계속 사냥 어디를 가겠다, 어디도 가겠다 떠드셨다고.”
이한은 그 말에 지클린이 신나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마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볼라디 교수처럼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야. 그보다 어제 대체 그 미친 질문은 설마...”
“지클린 님. 안장에 마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