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안장에 <잠열 부여>를 걸어주면 탑승자는 물론이고 말도 좋아합니다.”
이한은 1학년 때 가르시아 교수 밑에서 배운 각종 생활 마법들을 꺼냈다.
지클린의 말은 따뜻하게 마법을 걸어주는 이한을 보고 푸드득대며 머리를 비벼댔다.
“지젤. 나머지를 부탁합니다.”
“마법은 그렇게 낭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원래.”
언니의 명령에 지젤은 소심하게 반항했다.
마력 많다고 낭비하는 워다나즈가 이상한 거지, 원래 이렇게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마법을 시전하지는 않는 것이다.
지클린은 동생이 변명을 한다고 생각해 눈빛이 엄해졌다.
“지젤. 자신이 못한다고 해서 원래 그렇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마저 하겠습니다!”
지젤은 다른 쪽 짐에 마법을 걸기 위해 뛰어가는 이한을 째려봤다.
이한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잖아.”
“고맙다. 아주 고맙다. 응. 왜. 언니한테 더 아부하지 그래.”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라고. 에인로가드 습관이 묻어나온 것뿐이니까.”
“......”
이한의 말에 지젤도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저런 식으로 여행 전에 마법을 닥치는 대로 걸어대는 건 에인로가드에서도 워다나즈가 했던 일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밖이라는 점!
에인로가드 안에서도 워다나즈는 미친놈이긴 했지만, 밖에서 보니 워다나즈는 정말 새삼 미친놈이었다.
마법사라면 보통 자기 능력을 최대한 아끼고 중요할 때만 마법을 시전해야 하는데 그냥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다 마법을 시전해버리니...
워다나즈를 붙여놓으면 어떤 마법사도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없어. 이게 다야.”
“...?”
이한은 멈칫했다.
물론 기사들의 사냥이 귀족들의 사냥보다 더 불편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길도 없는 험준한 지형에, 사냥터지기나 몰이꾼도 없고, 짐을 들고 따라오는 하인이나 짐꾼도 없다니!
하지만 사실 닐리아 같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소리였다.
-워다나즈. 기사들 말에 속지 마. 기사들 말은 절반이 허풍이고 나머지 절반은 엄살이라니까. 걔네는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까지 상세히 기록된 지도 들고서 좋은 날씨에만 들어가. 사치품까지 넣은 물자를 견습기사들이 들고 온다구! 진짜 사냥은 역시 사냥꾼들이...
귀족들의 사냥보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역시 기사들도 완전히 불편하게 나가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원이 다라니?
“다른 기사들은? 견습기사들은?”
“없다니까... 내가 말했지? 초대해봤자 좋을 거 없다고.”
지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워다나즈가 1년 동안 에인로가드에서 보여준 능력을 아니까 받아들인 거지, 아니었다면 정말 목숨 걸고 반대했을 것이다.
각자 말 두 마리씩.
거기에 올릴 수 있는 짐만 챙기고 나머지는 없다.
이게 지클린의 사냥이었다.
“흠. 그렇군.”
“...더 놀랄 줄 알았는데??”
“우리 가문에도 비슷한 짓을 하는 기사가 있어서...”
“너 워다나즈 가문 맞지??”
* * *
지클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마법학교에 들어간 동생이 데리고 온 친구가 예의 바르고 유쾌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 가문이라 걱정했는데 이렇게 기사와 말이 잘 통할 줄이야.
어쩌면 기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워다나즈. 저 옆의 강이 보입니까?”
“예. 보입니다.”
“예전에 이무기 하나가 저 강으로 기어 올라왔던 적이 있습니다.”
지클린은 무뚝뚝한 시선 끝에 추억을 담아 강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다.”
“...왜 죽었나요?”
이한은 대충 물은 자신을 탓하며 다시 물었다.
“목이 베였습니다.”
“누가 어떻게 베었을까요?”
지젤이 퉁명스럽게 대신 대답했다.
“언니가 단독으로 3일 동안 혈투를 벌여서 놈의 목을 잘랐어.”
“하하하... 잠깐. 농담이 아니구나.”
농담인 줄 알고 가식적으로 웃으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지젤이 진지했던 것이다. 지젤의 언니도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농담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
이한은 경악했다.
이무기 같은 대형 몬스터를 기사 혼자서 3일 동안 싸워서 잡다니.
경지에 오른 기사는 걸어 다니는 요새와 같다고 하지만 상상을 초월했다.
‘설마 알라르롱이나 잉걸델 교수님보다 더 센 건 아니겠지??’
“대체 왜 혼자서 싸운 거지?”
“언니가 혼자서 싸우고 싶어해서. 난 강가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지젤은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며 질색했다.
혹시라도 언니가 잘못될까봐 걱정하면서 지켜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것이다.
“지원 부르지 그랬어.”
“지원 부르면 언니가 싫어한다니까.”
“알 게 뭐야. 부르고 변명하면 그만이지.”
“...?!”
의외로 그럴듯한 이한의 말에 지젤은 솔깃해했다.
“잠깐, 그러니까 이 사냥의 목적도 저런...?”
“그래. 괜찮은 사냥감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거야.”
지젤은 건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춥고 험준한 북부의 땅을 돌아다니며 기사가 일대일로 상대할 만한 사냥감을 찾는 것이다.
괜찮은 사냥감을 발견하면 즉시 싸우라고 한 뒤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서 기다렸다.
기사의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사냥감의 수준도 따라서 높아지는, 절대 방심할 수 없는...
“그거 그냥 배그렉 교수님 시험 아니야?”
“야. 말 조심해. 언니가 아무리 그래도 에인로가드 교수님 같은 사람은 아니지.”
지젤은 자기 언니 한해서는 냉정한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학해서 놀러왔는데 교수님 같은 사람이 밖에도 있다니.’
실로 슬픈 일이었다.
“음.”
지클린은 높은 지형을 확인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인근에 몬스터들이 제법 많이 서식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머무릅니다. 주변의 몬스터들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워다나즈. 잠시 휴식하십시오. 마법사는 체력이 약하지 않습니까.”
“......”
지젤은 속으로 ‘쟤가 나보다 튼튼해요’라고 투덜댔다.
잠시 지클린이 정찰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이한은 바로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해 야영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젤이 뭔가 나서기도 전에 순식간에 주변에 간단한 목책과 침상용 자리, 가운데의 모닥불과 간단한 요리용 삼각대, 경보 마법이 설치되었다.
지젤은 눈을 깜박였다.
에인로가드에서 몇 번 같이 야영을 하긴 했었지만 그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못, 못 보던 사이에 야영만 했나...?’
“왜 그래, 모라디?”
“아무것도 아냐. 준비 잘 해서 고맙다.”
“...왜 그래, 모라디?!”
“......”
고맙다는 말에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워다나즈를 보자 지젤은 정말 한 대만 때리고 싶어졌다.
‘참자. 곧 언니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지클린이 돌아왔는데 이한과 멱살 잡고 싸우고 있으면 본인만 손해였다.
이한은 양철 잔에 끓인 커피를 담아 지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라디.”
“?”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었던 지젤은 문득 얼마 전이 떠올랐다.
이 새끼 이 표정 하고서 ‘누님이 아니라 언니 맞지?’같은 말 꺼내지 않았나?
“너 또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아니. 진지한 이야기야. 모라디. 좀 진지해져라. 사람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야 이...!”
“적당한 사냥감을 찾아서 상대하면 사냥이 빨리 끝나겠지?”
“!”
놀랍게도 이번에는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였다.
지젤은 이한의 예리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괜찮은 사냥감을 만나면...”
지클린이 보기에 ‘이 기사는 이번 사냥에서 괜찮은 싸움을 했다’싶으면 사냥도 끝이 났다.
“너, 나. 둘 다 에인로가드 마법사잖아. 마법을 활용해서 적당한 사냥감을 빠르게 찾아보자.”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리 쉽지는 않을걸.”
지젤은 그렇게 대꾸하며 턱을 괴었다.
이 주변에 몬스터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상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지 않은가.
“혹시 교장 선생님한테 배운 비전의 마법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있냐?”
“신체 능력 향상시키는 마법들은 있는데.”
“야. 너 그거지? 우리 탑 놈들 근육통에 빠뜨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보다 모라디. 적절한 상대는 원래 개인이 판단하기 나름이야.”
“...우기자고?”
“꼭 그런 건 아니고, 설득을 할 수도 있겠다는 거지.”
“언니가 어리숙해보여도 설득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감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짓말은 잘 안 통할걸.”
지클린 정도 되는 기사의 직감은 거의 예지 마법이라고 봐야 했다.
따라온 기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사냥감과 어떤 싸움을 할 수 있을지 감을 잡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럼 뭐 좀 강한 사냥감을 찾으면 되겠지.”
“자신 있나봐?”
“미리 준비해놓으면 유리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젤은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기사로서의 싸움에 저런 걸 허락해줄지 잘 모르겠는데.”
“흠.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안 남았군.”
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젤은 이 에인로가드의 교활한 학년수석이 대체 어떤 방법을 남겨놨는지 궁금해했다.
“지클린 님 없는 사이에 치열한 싸움 했다고 우기자.”
“...나쁘지 않을지도...?”
지젤은 의외로 수긍했다.
다른 것들과 달리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지? 지금 계약한 소환수들 풀어서 주변을 수색하게 하려고. 정령도 있어.”
“그래. 알겠어.”
“지금 계약한 소환수 풀어서 주변을 수색하려고 한다니까. 정령도 있어.”
“...? 알겠다니까?”
지젤의 반응에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이 대단함을 모르다니!
“잠깐. 한 가지 더.”
“?”
“사냥 끝내고 돌아가고 싶으면 언니한테 맞는 사냥감도 찾아야 해. 생각보다 어려울 거야.”
“그래? 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래에서 지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마땅한 몬스터들이 없었... 워다나즈, 이 야영지를 마법으로 만든 겁니까?”
지클린은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한 놀라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나 이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클린의 다른 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미노타우로스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아.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지나가길래 잡았습니다.”
“...오, 오오...”
이한은 생각보다 이 기사에게 걸맞은 상대를 찾아주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 * *
“큰일났군.”
이한은 잘게 다진 미노타우로스 고기와 감자를 넣고 볶은 수프를 지젤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러다가 만찬회 전까지 계속 밖에 있게 생겼어.”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언니 사냥은 지옥이라니까.”
지젤은 수프를 홀짝였다. 분할 정도로 맛있었다.
지클린과의 지옥사냥에서 이런 요리를 먹을 여유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지클린 님은 별 말 안 하시던데 잘 드신 건가?”
“언니? 그 정도면 엄청나게 좋아한 거야. 한 그릇 다 먹었잖아. 원래 한 그릇도 안 드셔.”
“보통 맛있으면 다섯 그릇 정도는 먹지 않나?”
“어떤 무식한 자식이 그렇게 먹는데?”
“가이난... 으흠. 아니다.”
“......”
말을 돌리던 이한은 하급 냉기 정령이 신호를 보내자 깜짝 놀랐다.
“적 찾았다는데?!”
“뭐, 어떤 몬스터지!”
지젤은 급히 칼자루를 움켜쥐며 물었다.
“이런.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군. 범죄자 같다고.”
“아...”
실망해서 다시 앉으려던 지젤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야! 범죄자면 잡아야지!”
“아차.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