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쿠드득!
“!”
굉음과 함께 쓰러진 광신도의 몸에서 거대한 촉수 같은 것들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흉흉하고 사악한 마력과 함께 촉수가 키메라처럼 서로 엉켜서 형태를 갖췄다.
쓰러진 광신도는 이미 사람 형태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프... 프... 프... 프라흐갈 님을 위해서...”
“악신숭배자다!”
지젤은 경악해서 외쳤다.
제국의 수많은 적들 중 가장 음험하고 뒤틀린 자들.
기묘한 악신을 숭배하느라 정신이 오염된 자들이 바로 악신숭배자였다.
쉭!
“강철로 화해라, 망토여!”
곤봉처럼 굵어진 촉수 팔이 날아오자 이한은 피하는 대신 방어에 들어갔다.
뒤에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퍽!
충격에 뒤로 몸이 붕 뜨면서도 이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힘이여, 끓어올라라!”
고나달테스의 검은 책이 가르쳐 준 주문이 강력한 근력을 끌어올렸다.
이한은 팔에 무엇이든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깃드는 걸 느끼며 다시 한 번 망토를 붙잡았다.
퍽!
이번에는 몸이 날아가지 않았다.
“번개여 깃들어라!”
파지지지지직!
동시에 망토에 번개가 스파크치듯 튀기 시작했다.
3서클 번개 원소 계열 부여 마법 중 가장 난이도 높은 <번개 망토 부여>였다.
빠르게 강철 변화, 근력 강화, 번개 부여를 시전하는 전투 마법사의 정석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광신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촉수 팔이 괴사하는 걸 감안하고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왜 안 피해!”
지젤은 반 박자 늦게 쌍검을 들고 광신도의 품에 파고들었다.
워다나즈가 피하지 않고 막는 탓에 깜짝 놀라서 반응이 늦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워다나즈가 피하지 않고 막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지젤은 입술을 깨물고 검을 깨웠다.
가문에서 북부의 부빙(浮氷)을 잘라내 연마한 명검, 얼음빛과 얼음꽃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빛을 발했다.
주인의 마력을 받아 북부의 혹한을 검신에서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쩌저저저적!
“잘했다. 모라디!”
친구 덕분에 시간을 번 이한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다음 주문을 외웠다.
다른 전투 강화 주문들은 이미 아까 시전한 뒤.
“박무여, 퍼져라!”
갑자기 주변이 흐릿해지자 광신도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들을 전진시켰다.
“놈의 발을 묶어라! 뼈여, 쏘아져라!”
시약 주머니에서 뼛조각을 꺼낸 뒤 이한은 뼈를 화살처럼 쏘아냈다.
촉수 키메라처럼 변한 광신도의 몸에 뼈가 박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튼튼한 거야, 이 자식?!’
나름 암흑 원소를 응축시킨 귀한 시약이었는데 저걸 그냥 맨몸으로 버티다니.
강화 스켈레톤 전사들은 광신도를 찌르며 발을 묶었다.
아까 모라디의 공격 때문에 둔해진 광신도는 바로 처리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팔은?!”
“뭔 팔?”
“팔 괜찮냐고!”
이한은 지젤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당황했다.
“괜찮지?”
“그래, 그럼 됐고!”
“뭐가 됐...”
“마법이나 시전해!”
“프라흐갈에 대해 아는 건? 뭐하는 놈이지?”
“예전에 가문에서 한두번 토벌했던 것 같긴 한데, 나도 딱히 정보는...!”
이한은 번개 원소 마법이냐, 수옥탄이냐, 아니면 다른 공격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로 고민했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해서 바로 고를 수가 없었다.
‘악신숭배자 저 놈은 왜 저렇게 강력한 거지?’
분명 처음 봤을 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던 놈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괴력을 발휘했다.
‘미쳐서인가?’
사제들 중에서도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는 그걸 ‘진심으로 미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곤 했다.
맹신은 신성 마법의 가장 큰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악신숭배자가 강한 것도 이해가 갔다.
누구보다도 진하게 미쳐있을 테니 누구보다도 강한 신성 마법을 쓸 수 있으리라.
“어쩔 수 없군. 모라디. 접근하지 마라. 주변에 튈 수 있으니까.”
“뭐?”
“타올라라!”
이한은 허공에 화염을 불러왔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평소 자제하면서 쓰던 크기보다 조금 컸다.
‘추운 북부니까 괜찮을 거다. ...아마!’
“아프하의 이름으로!”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한은 자신이 배운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아프하 교단의 백염(白焰)이 불꽃을 대체하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켈레톤 전사들을 처리하고 포위망을 뚫은 광신도는 아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끄으으으으으!”
‘제대로 골랐다!’
이한은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놈은 다른 교단의 신성 마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다시 한 번 스켈레톤 전사들이 발을 묶음과 동시에 백염의 불씨들이 날아가 광신도에게 작렬했다.
“효과가 있어!”
지젤은 겨눴던 검을 내리고 외쳤다.
아까 어떤 공격을 받아도 단단하게 버티던 놈이 화염을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프, 프, 프... 프라흐갈...!”
“놈이 돌진한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스켈레톤 전사들이 앞을 막고 화염의 기운이 응축되어 더욱 더 강해졌다.
화르르르륵!
날아든 불씨들이 합쳐져 광신도를 거의 불태우듯이 공격했다.
광신도의 비명이 둘의 귀를 찢을 듯이 후려쳤다.
그 순간 광신도가 마지막 힘을 짜내 온몸의 육신을 촉수의 창으로 만들어냈다.
“!”
예지 마법으로 곧 날아올 궤도를 예측한 이한은 지젤을 붙잡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멀리서 달려 온 지클린이 검을 휘둘려 광신도를 쪼개버린 것이다.
서걱!
“...!!”
지클린은 검을 휘둘러 광신도를 반으로 쪼개버린 뒤 다시 한 번 휘둘러 넷으로 쪼개버렸다.
그래도 광신도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려고 하자 연속해서 칼질을 퍼부었다. 조각난 광신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활활 불타버렸다.
‘무슨 위력이...?!’
아까 각종 마법에도 버티던 놈이 무슨 버터처럼 잘려나가는 모습에 이한은 눈을 의심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야. 비켜.”
지젤은 이한의 머리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지클린은 둘에게 다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냥감을 찾느라 둘을 위험에 빠뜨리다니.”
“......”
“......”
이한과 지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빨리 사냥을 끝내려고 둘이 먼저 범죄자에게 접근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뭘...”
“아닙니다. 이건 내 실수가 맞습니다. 이번 사냥은 여기서 끝냅시다.”
“!”
이한과 지젤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어...
‘잠깐. 너무 기뻐하지 마.’
‘나도 알아. 너나 침착해.’
“정말 안타깝습니다...”
“나도 미안합니다. 워다나즈. 하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손님을 더 데리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흑흑.”
“...흑, 흑흑.”
지젤은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장단에 맞춰줬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괴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지클린은 둘을 멈추게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활활 번지고 있는 백염을 끄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주변 나무를 다 태우고 주변으로 기세 좋게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지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화염 마법을 왜 저렇게 통제 안 하고 퍼뜨리지?”
“...비밀이다.”
이한은 대답을 피했다.
* * *
“프라흐갈? 또 지랄이군.”
가주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해골 교장은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악신숭배자들은 곰팡이처럼 치우고 치워도 어디선가 나왔다.
어쩌면 이 고통스러운 세상 때문이리라.
해골 교장은 육신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다른 필멸자들에게 그런 건 바랄 수 없었으니...
‘실로 안타깝도다!’
“고나달테스 님.”
“아. 미안하군. 계속 말하게.”
“몇 년 전에도 가문에서 프라흐갈 광신도를 토벌한 적 있습니다. 북부 어딘가에 놈들의 신전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되는군요.”
모라디 가문의 가주는 중장년을 넘겨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모는 변화가 없었다. 누가 보면 해골 교장과 비슷한 동년배일 줄 알 것이다.
가주의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에 강한 의지가 서렸다.
“다시 한 번 토벌을.”
“하면 되지 않나.”
“뛰어난 마법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끄응...”
해골 교장은 노골적으로 하기 싫다는 티를 냈다.
이 드넓은 제국 북부에서 숨은 악신숭배자를 찾는 건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건초더미의 바늘은 쓰는 마법이나 쉽지 악신숭배자는 정말 작정하고 마법을 갈아 넣어야 했다.
“고민해보겠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한다고 말하는 가주의 눈빛은 전혀 부탁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들어줄 때까지 노려보겠다는 듯이,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인데 저런 어린 엘프 놈의 압박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프라흐갈 광신도를 찾은 건 누구지? 광신도들 구분하기 힘들 텐데 용케 찾았군.”
“지클린 님께서...”
“아.”
해골 교장도, 가주도 ‘그럴 수 있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클린 정도 되는 기사라면 감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지젤 님과 워다나즈 님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셨는데, 두 분께서 찾으셨다고 합니다.”
해골 교장과 가주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당황한 것이다.
‘아니 이 녀석은 뭐하는 거야?’
해골 교장은 어이가 없었다.
만찬회 할 때까지 좀 쉬라고 했더니 그새 그걸 못 참고 밖에 나가서 프라흐갈 광신도를 잡아오다니.
야망에 미친놈인가??
‘뭔 제국 전체에 이름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고...’
해골 교장이 가주를 쳐다보니, 가주도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차가운 얼굴이 흔들려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지클린의 사냥이 평범한 사냥은 아니지 않은가.
초대받은, 그것도 대귀족 가문인 워다나즈 가문의 사람을 그런 위험한 사냥에 데리고 가다니.
효율주의자이자 합리주의자인 가주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해골 교장은 진상을 알았다.
‘분명 워다나즈 놈이 먼저 가자고 했을 것이다!’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해골 교장은 이한이 책임 제공을 했으리라는 것에 이번에 지원받은 금화도 걸 수 있었다.
“이건...”
“아. 아. 너무 놀라지 말게. 둘이 친해서 그런 걸세.”
“네?”
가주는 ‘뭔 개소리를 하십니까’하는 눈빛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이잖나.”
“탑이 다르잖습니까?”
“어허! 탑이 다르다고 우정을 못 쌓는다는 건가? 어떻게 그런 편협한 생각을!”
“......”
탑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만든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니 가주는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친해서 그런 거니 괜히 놀라지 말게. 친하면 같이 사냥도 나가고 광신도도 붙잡을 수 있는 거지.”
“...?”
옆에서 듣던 하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알겠습니다.”
아직도 믿기진 않았지만 가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해골 교장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클린이나 지젤이 아무 이유 없이 가문의 귀한 손님을 위험한 곳에 데리고 나갈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지클린은 그럴 수도 있겠군.’
“고나달테스 님.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만나보고 싶습니다만.”
“어.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군.”
해골 교장은 가주의 혈압이 오를 것 같아서 진지하게 조언했다.
그 말에 가주는 다시 고민했다.
‘제국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워다나즈 가문과의 친분을 막으려는 것인가?’
“이봐, 그냥 만나게.”
해골 교장은 질색하며 말했다.
이래서 생각 많은 어린놈들은 질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