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화
“감사드립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은 되지 않을 걸세.”
해골 교장은 심드렁하게 조언했다.
가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다.
아마 제국의 몇몇 야심가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제국의 가장 강력한 마도명가인 워다나즈 가문과 손을 잡고 제국 내의 권력 구도에서 한 발 앞서나가겠다!
이런 생각들은 야심 좀 있는 가문들이라면 다 하는 생각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제국 내의 가문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가문이 더 강해지고 부유해지고 명성 높아지길 원했으니까.
그런 이들에게 워다나즈 가문 같은 가문은 매력적인 파트너였다.
오랜 역사, 강한 힘, 넓은 영향력을 가진 대귀족 가문.
...문제는 워다나즈 가문이 더 강해지고 부유해지고 명성 높아지길 원하는 보통의 가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해골 교장이 가문을 세워서 제국의 최고명문가를 노리지 않듯이 워다나즈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은 세태를 초월하고 세상에 초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반짝이는 진리가 있는데 제국 내의 질척이고 성가신 권력다툼에 관심이 가겠는가?
그러나 눈앞의 가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소년은 목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글쎄, 그 놈이 더 상대하기 힘들 걸...”
“...?”
* * *
“프라흐갈은 생명의 신입니다.”
“?”
돌아온 이한은 지클린의 설명에 귀를 의심했다.
“촉수나 키메라의 신이 아니라?”
“원래 악신도 주장은 그럴듯하잖아.”
지젤은 가문 내에 기록된 프라흐갈 교단과의 전투를 찾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원래 악신 교단들도 주장하는 바는 그럴듯했다.
주장부터 이상하면 광신도들이 왜 생겨나겠는가.
프라흐갈 교단은 대충 ‘프라흐갈 님은 생명의 신이고 현재 제국의 사람들은 불완전한 존재니, 프라흐갈 님의 정수를 받아들여 더 위대하고 강한 존재가 되자’의 교리를 갖고 있었다.
“그 위대하고 강한 존재가 키메라인가?”
“정확히 따지면 키메라는 아니지 않나...? 신성 마법으로 변환 마법을 사용한 것에 가까운데.”
이한과 지젤이 소곤대며 이야기를 나누자 지클린은 살짝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둘이 마법사인 건 알고 있지만 빼놓고 이야기하니 소외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악신숭배자가 출몰했다는 건, 인근에 다른 동료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렇지. 지금 정찰을 맡은 기사들이 주변을 확인하고 있어. 아마 벌써 도망쳤겠지만.”
“그림자 순찰대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때?”
“하, 하, 하. 정신나갔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한은 나름 진지하게 제안한 게 막히자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 반응에 지젤이 오히려 당황했다.
“...놀린 줄 알았지.”
“괜찮지 않나?”
“흰 호랑이 탑이 맡은 일을 해결하려고 검은 거북이 탑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꼴을 상상해봐.”
“!”
이한은 바로 이해했다.
‘근데 너희들 필요하면 힘 합치고 그랬잖아?’
필요하면 자기 명령 들어가면서 은근슬쩍 잘 협력했으면서!
“으흠.”
동생과 동생 친구가 자기들끼리만 놀자 지클린은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둘은 고개를 들고 지클린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
“음... 음... 그러니까, 지금 붙잡은 용병들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까?”
“아, 네. 기꺼이 참가하겠습니다.”
“아는 거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쉿. 조용히 해. 기껏 배려해주셨잖아.”
“네 언니냐?”
* * *
붙잡힌 용병들은 뒤늦게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젠장. 악신숭배자 놈이었나? 어쩐지 후하다 했더니...”
“쉿. 입 다물어.”
경험 많은 용병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입을 다물고, 말을 줄이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몰랐으니 더더욱 유리했다.
가장 위험한 건 괜히 겁먹고 떠들다가 이상한 말실수라도 저지르는 것.
악신숭배자와 친밀한 사이다, 악신숭배자와 연결고리가 있다, 이런 오해를 받으면 이제 바로 지하뇌옥에서 십 년 이상 썩어야했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겠지.”
“너나 잘 해라. 누굴 신참으로 아나.”
용병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서로에게 강하게 못을 박았다.
기사들의 압박에 겁을 먹고 다른 용병이 하지도 않은 일을 날조해서 넘기면 일이 귀찮아졌다.
“따라와라.”
기사들은 용병들을 따로 가둔 뒤 심문하기 시작했다.
“악신숭배자는 어디서 만났지?”
“샹, 샹트마 시에서 만났습니다. 기사님. 정말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돈을 준다길래...”
“목적지는?”
“얼음항구였습니다. 얼음항구까지만 데려다주면 된다길래... 정말 몰랐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보수가 너무 후한데 의심하지 않았다고?”
“아이고, 보수 후하게 주는 의뢰인을 의심하면 어떻게 용병 노릇을 한단 말입니까!”
“알겠다. 그럼 악신숭배자에 대해 아는 점을 다 말해봐라.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뭐든지 좋다.”
“글, 글쎄요.”
“악신숭배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눈 용병이 있나?”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병들은 필요한 것들만 말하고 나머지는 그냥 질문을 듣자마자 모른다고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떠올려서 이야기해봤자 귀찮아지기만 할 뿐.
거기에 용병으로 의뢰주에 대해 나불거렸다는 소문이 굳이 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기사들도 그걸 느꼈는지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닳고 닳은 놈들입니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도 하는 짓이 똑같군요.”
“괜히 입을 놀려봤자 이득되는 게 없으니 말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하여간 용병 놈들이란.”
“어떻게 할까요? 결탁한 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악신숭배자 놈이 저런 용병을 자기 교단으로 꼬드기진 않겠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들인데.”
“과연...”
“그래도 심문은 계속해라. 작은 단서라도 얻어야 하니까.”
“고문을 하거나 매수를 할까 고민 중입니다.”
“둘 다 지금 상황에서는... 엇, 지클린 님!”
이야기를 나누던 기사들은 지클린과 지젤, 이한의 방문에 대화를 멈추고 인사했다.
“지금 놈들의 심문을 잠시 멈추고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음.”
지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예!”
동생과 동생의 친구를 데리고 온 만큼 지클린은 기사로서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지금 기록해놓은 대화는 다음과 같...”
콰직!
서류를 받으려던 지클린이 옆의 벽과 살짝 부딪치자 단단한 바위벽이 으스러졌다.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외감에 찬 시선을 보냈고, 용병들은 공포에 질렸다.
어느 정도 고문을 각오하긴 했지만...
‘저건 처형 아닌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실수했습니다.”
“그러실 수 있습니다!”
용병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바위벽을 부술 수 있나 싶었다.
“흠. 그러니까 지금...”
“으, 으어어어억!”
용병 중 입구와 가장 가까운 독방에 있던 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용병은 이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벌벌 떨었다.
“너, 너, 너...!”
“?”
“너, 그 마법사...!”
“무슨 소리신지?”
이한은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아무래도 다른 기사들 보는 앞에서 이한이 했던 짓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한이 생각하기에도 친한 척 위장해서 솥에 수면 물약 넣고 튄 건 조금 비열하긴 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그 마법사잖아! 우리한테 와서... 잠깐, 우리가 기절한 것도 설마?! 언제부터! 언제부터 한 거냐? 대답해라!”
용병은 패닉에 빠져서 외쳤다.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 인원 모두가 저런 새파랗게 어린 놈한테 속아서 쓰러졌다고?
차라리 악신숭배자가 이상한 짓을 해서 쓰러졌다고 믿고 싶었다.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
“기, 기사님. 저 마법사 보십시오! 저 마법사가 저희한테... 저희한테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다!”
“가문의 손님께 그 무슨 무례한 말이냐, 이 용병 놈들!”
좋게 말해줘도 체면을 무시당한 기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독방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입을 놀린 용병에게 본때를 보여줬다.
“억, 어억! 크어억! 잘, 잘못했습니다! 제가 실언을...! 살려주십시오!”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적당한 선에서 공격을 멈췄다.
흠씬 두들겨 맞은 용병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니, 아니다!’
용병은 그 잘생긴 마법사 옆에 익숙한 기사가 있는 걸 발견했다.
둘 다 놀랍게도 모라디 가문의 사람이 맞았다!
‘언, 언제부터 모라디 가문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거지? 설마 모든 게 모라디 가문의 감시 하에 있었던 건가? 지금 저 심문도 설마...?’
용병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북부에 발을 들이민 순간부터 감시당했다고 생각하자, 지금 이 심문도 사실 다 알고서 떠보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입을 다물고 고집을 부리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다 알고 있는 기사들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괘씸죄로...
“생,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 악신숭배자 놈이 자기는 서쪽에서 왔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더 말해봐라.”
“그리고... 그리고 또... 아! 이틀 전에 다른 용병 놈 하나가 악신숭배자와 몇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놈을 심문해보십시오.”
“오호.”
기사들은 갑자기 협조적이 된 용병의 모습에 매우 신기해했다.
닳고 닳은 용병 놈이 왜 갑자기?
“용병들이 원래 저렇게 협조적인가요?”
“아닙니다. 놀라운 일이군요.”
이한의 질문에 기사들도 이유를 알지 못해 놀라워했다.
그 모습에 건틀렛을 착용하던 지클린은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동생과 동생 친구 앞에서 기사로서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 * *
사냥과 심문까지 마친 이한은 숙소에서 후배를 가르치며 쉬고 있었다.
“그래. 에안두르데. 이 약초는 먹을 수 있는 약초. 이건 먹으면 안 되는 독초다. 학교 가면 쓸만할 거야.”
“먹을 수 있는 약초!”
“그리고 강을 따라가면 오두막들이 종종 나오는데, 만약 오두막에 사람이 없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선반 밑을 확인해. 보통 교수님이 거기에 지하실 문을 만들어놓으시거든.”
“...?”
옆에 있던 알시클은 둘의 흉흉한 대화에 의문을 품었다.
저게 대체 무슨 대화?
“워다나즈 님. 안에 계십니까?”
“또 손님이야?”
“이게 다 알시클 님 때문 아닙니까!”
이한은 투덜거렸다.
자기 혼자 빠져나가려고 기사들한테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다 던져놓으니 자꾸 손님이 찾아오는 것 아닌가.
“미, 미안하다. 근데 없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힝.”
알시클은 이한의 눈치를 봤다.
저번의 배신이 꽤나 쓰라렸는지 정어리를 먹어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워다나즈 님을 뵙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는데...”
“예. 들어오십시오.”
이한은 시종의 말에 책상 위를 대충 치우며 대답했다.
또 기사들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 들어온 건 한 명뿐이었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엘프 기사였다.
어딘가 지젤이나 지클린을 닮은 인상에 이한은 설마 싶었다.
“혹시...”
“모라디 가문의 지더프라고 합니다. 먼 길을 온 손님들을 환영합니다.”
“힉.”
알시클은 모라디 가문의 가주가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짓도 안 했습니다!’
‘...어제 악신숭배자 잡았다면서?’
‘...그거 빼고 아무짓도 안 했습니다!’
알시클은 앞으로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아무짓도 안 했다’라고 말해도 절대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