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625화 (625/687)

625화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가주님.”

알시클은 예의를 갖추며 상석을 양보했다.

상대 가문의 영지에 방문한 손님으로서 존대를 받았으니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줄 차례였다.

“그렇게 하지. 펭에린 군.”

“저도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고맙네. 워다나즈 군.”

서로 가볍게 인사를 마친 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영지에 머무르던 기사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펭에린 님. 오늘 빙벽 수리를 도와주신다고 하셨... 헉! 죄송합니다!”

“아니다. 먼저 선약이 있었나보군.”

가주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손짓했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 오늘, 펭에린 님께서 오름바위 곶 요새의 빙벽이 약해져서 마법을 걸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되어서 찾아왔는데...”

“아. 그랬었지.”

알시클은 아차 싶었다.

기사들의 부탁을 받고 순찰에 도움이 될 수 있게 마법을 약속해줬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니. 선약이라면 그럴 수 있지. 오히려 모라디 가문이 감사해야 할 일이오. 펭에린 군을 모시고 잘 다녀오도록 해라.”

“예!”

알시클은 기사를 책망하지 않고 서로의 체면을 배려해준 가주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헉!’

이한은 배신자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알시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건 아니야!”

“뭐가 아닙니까?”

“이건 저번과 달리 정말 우연이야!”

“아. 예. 그러시겠죠.”

이미 알시클을 쳐다보는 이한의 눈빛은 해골 교장을 쳐다보는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 변화를 느낀 알시클은 가슴이 아팠다.

‘크흑.’

“다녀올게. 다시 이야기하자.”

“예. 뭐.”

“진짜 고의가 아니라니까...”

알시클은 끝까지 질척이며 밖으로 나갔다.

‘음.’

이한은 모라디 가문의 가주와 단둘이(사실 후배가 있긴 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남게 되자 괜히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당장 지클린도 일대일로 대면하면 사람 숨 막히게 하는 재주가 뛰어났는데 가주는 어떻겠는가.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인상의 엘프였다.

이한은 가문에 대해 이야기 들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북부의 기사 가문 중 손꼽히는 가문, 철혈에 냉혈, 원한을 잊지 않고...

대충 모라디스러운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문의 가주라면 누구보다도 가문의 미덕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리라.

“악신숭배자 이야기를 들었네. 워다나즈 군. 가문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지.”

“혼자서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단하다는 건 변함이 없지. 지젤하고도 친하다고 들었는데, 탑이 다른데 어떻게 친해진 건지 궁금하군. 말해줄 수 있겠나?”

“컥.”

이한은 커피를 뱉을 뻔했다. 옆에서 책을 읽던 후배가 괜찮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차마 가주 앞에서 ‘모라디가 저한테 자꾸 시비 걸었어요’라고 말해줄 수는 없고...

“에... 에인로가드의 역경을 같이 극복하면서 친해졌습니다.”

가주는 이한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에인로가드의 졸업생들은 다 같이 역경을 극복했겠지만, 탑이 다른데도 서로 친한 이들은 드문 걸로 아네.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선배들이 극복한 건 가짜 역경이고 저희가 극복한 건 진짜 역경이라서 그렇습니다.”

이한은 매우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왕 우긴 거 그냥 당당하게 우길 생각이었다.

가주가 에인로가드 내부 상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

이한의 말을 들은 가주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잠깐 멈칫했다.

자기 자신이 에인로가드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가짜 역경과 진짜 역경의 차이점이 무엇이지?’

고민하던 가주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지젤이 친구를 사귄 것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젤이 알아서 할 일이었고, 가주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워다나즈 가문의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렇군. 워다나즈 군. 가주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여전히 칩거하고 계십니다. 외계(外界)를 탐사하는 것에 푹 빠져 계시지요.”

“훌륭하시군. 어렸을 때부터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를 존경해왔네.”

차가운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이한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표정 연기를 할 줄 모르시나?’

이한 같은 제국 최고 표정 연기자에게 눈앞의 직선적인 엘프 가주는 좀 낯선 존재였다.

“그럼 워다나즈 군의 목표는 무엇이지?”

“제국 관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음. 그런가.”

‘역시 쉽게 말해주지 않나.’

가주는 눈앞의 소년이 말한 대답에도 놀라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모라디 가문의 가주는 기사들의 대화보다는 귀족들의 대화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 만남에 속마음을 털어놓는 귀족들은 드물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나중에 손을 잡을 만한 상대라는 걸 알게 되면 속마음의 파편을 들려주는 게 바로 귀족의 대화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무엇이 아쉬워서 제국 관료를 꿈꾼단 말인가?

저건 그냥 겸양의 표시가 분명했다.

‘고나달테스 님께서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높게 평가하셨다. 자신의 후계자로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지. 그렇다면 관료라는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비범한 대답이로군.’

겸양의 표시에 은근한 비유까지 담아서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 가주는 적잖이 감탄했다.

과거에 만난 워다나즈 가문의 다른 핏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목표로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한은 반색했다.

다른 가문 가주가 응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물론!”

“감사합니다.”

“관료라면 제국의 영지를 돌아다니게 될 텐데, 가문의 영지를 직접 소개해주고 싶네.”

가주는 적당한 핑계를 들며 가문의 영지를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상대가 야망이 있다면 모라디 가문의 힘을 보고 분명 어떤 반응을 보일 테니까.

“오... 감사한 마음으로 승낙하겠습니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승낙했다.

지클린 경 같은 사람이 와서 사냥이나 가자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영지 구경 정도는 아주 온화하고 편안한 휴식이었다.

그리고 아부하기도 좋았다.

‘추운 북부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음. 식상한데. 추운 북해 바다의 정기가...’

‘눈빛이 바뀌었군.’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한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보자, 가주는 한층 더 기대가 되었다.

*         *         *

“여긴 지하 목장이지.”

거대한 암반 위에 자리 잡은 모라디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서 각종 시설을 완성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런 시설들 중에는 북부의 다른 가문들에서는 찾기 힘든 귀한 시설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동굴 깊숙한 곳을 뚫어서 만든 지하 목장이었다.

“훌륭하십니다!”

“고맙네.”

“이렇게 바위를 뚫어서 공간을 만든 다음 목장으로 사용하다니. 어떤 가문도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과찬이군.”

가주는 이한의 칭찬에 예의상 대답할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칭찬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어떤 약속이 맺어지느냐뿐.

‘신기하군.’

이한은 대충 아부를 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장은 아무래도 탁 트인 공간이 필요한 만큼 지상의 평지를 생각하기 쉬웠는데,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가면 나오는 이런 지하 목장이라니.

안에서 기르는 동물들 중에는 평범한 가축뿐만 아니라 희귀한 동물들도 있었다. 과연 자랑할 만한 시설이었다.

“마법도 많이 사용되고 있군요.”

“기사 가문이라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네. 워다나즈 군. 실제로 모라디 가문에는 마법사들도 제법 많네. 물론 워다나즈 가문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저희는 더 적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떠들썩하지 않아서.”

가주가 방금 말에 무슨 뜻이 담긴 건지 분석하는 동안, 이한은 지하 목장의 동물들과 주변에 설치된 마법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번 한 해 동안 열심히 배운 게 효과가 있었는지 설치된 마법들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해골 교장과 버두스 교수 같은 이들이 혹독하게 단련시킨 덕분이었다.

이한은 새삼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아니. 감사하진 않군.’

...가지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발열에, 바람... 아. 공기를 순환시키는 건가. 이건 물을 끌어오는 건가? 이건 정화 계열 마법 같은데, 더러움을 싫어하는 동물들이 있나보군.’

흥미롭게 마법들을 구경하는 이한의 행동을 가주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답게 마법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혹시 궁금한 게 있나?”

“아. 좀 더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나 잠깐 고민해보고 있었습니다.”

이한의 말에 가주는 흥미로워했다.

저 자신감이 타당한 자신감인지, 혹시 오만한 과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이라 하더라도 이제 막 2학년이 되는 마법사가 저걸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지만...

상대는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이지 않은가. 무언가 비범함을 보여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결과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는 점이었다.

상대는 가주 본인이 베풀어 준 친절에 호의를 느낄 테니까.

“그렇다면 한 번 만져보게. 워다나즈 군.”

“예? 아닙니다. 문제라도 생기면...”

“가문의 다른 마법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네. 문제가 생기더라도 바로 해결할 수 있지. 젊은 마법사에게 경험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가주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워낙 인상이 차가워서 다른 사람이라면 겁먹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이제 저런 걸로 겁먹기에는 너무 대담해진 상태였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그러면 잠깐만 해보겠습니다.”

마법진에서 마력 유지와 증폭을 위해 복잡하게 얽힌 부분을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에 마력을 과부하에 가깝게 불어넣으면 훨씬 더 간단한 마법진으로도 구성이 됐다.

마석의 숫자를 줄이고서도 자신의 마력으로 커버가 가능한 이한만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

작업이 진행되고 마력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자 오늘 내내 똑같았던 가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가주는 놀라운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가주 본인도 뛰어난 기사인 만큼 이한이 뭘 하고 있는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런 식으로 마력을 줄이다니!’

“다 된 것 같습니다. 혹시 잘못된 게 있을까요?”

“아니. 훌륭하군. 워다나즈 군. 감탄했네.”

“하하. 감사합니다. 에인로가드에서 연습한 보람이 있군요.”

가주는 방금 작업으로 절약된 마석의 숫자를 빠르게 계산했다.

“다른 곳도 한 번 봐주겠나? 의견을 듣고 싶네.”

“그런데 제가 방금 한 건, 일종의 땜질 같은 거라 복잡한 마법진에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면 고맙겠군.”

가주는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 있던 워다나즈 가문과의 협력은 빠르게 희미해졌다.

눈앞의 소년이 가진 천재성으로 영지의 어느 부분까지 개선시킬 수 있을지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린 것이다.

*         *         *

“저 왔습니다?”

연무장에 도착한 지젤은 언니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깊숙한 곳에 지클린이 고민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지젤.”

“네.”

“음. 아닙니다.”

“...왜요? 그냥 말해주셔도 됩니다!”

지젤은 언니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나 싶어서 재촉했다.

지클린이 하는 고민은 대부분 쓸데없는 것이었지만, 가끔 ‘거인 검사와 겨뤄보고 싶군’처럼 위험천만한 고민도 있었던 것이다.

“동생이잖아요. 믿고 말해주시죠.”

“음.”

고민하던 지클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젤은 뭔 고민인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워다나즈를 계속 데리고 있어서 검술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

지젤은 물어본 걸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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