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그 모습에 주교가 오히려 더 놀랐다.
“제자분과 사이가 좋으시군요?”
“이게 말입니까?”
원래 자제력과 수양의 화신인 이한이었지만 ‘해골 교장과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자제심을 잃게 만들었다.
“내 인품 덕분이지.”
해골 교장이 대신 대답했다.
이한은 순간 자제심을 한 번 더 잃어버리고 의자를 들어서 해골 교장을 칠 뻔했다.
‘방금 혹시 나한테 정신 마법을 쓰신 건가?’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이한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도둑인 게 무슨 문제가 되는 겁니까?”
에인로가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 제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마법사들이 모이는 만큼 참으로 품위 있고 교양 넘치겠구나’생각하기 쉬웠지만 에인로가드는 사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활발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건 도둑이지 귀족이 아니었다.
당장 이한만 해도 잘 키운 랫포드 하나가 열 가이난도 부럽지 않았으니까.
랫포드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몇 번은 더 징벌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도둑이라면 오히려 더 필수 인재 아닌가? 내가 초대장을 보내고 싶다.’
이한은 이런 인재가 더 에인로가드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족이나 귀족들은 좀 줄이고...
“감동했습니다. 워다나즈 님. 도둑이라 하더라도 배움의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다니.”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하여간 에인로가드는 도둑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골 교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의 입을 막았다.
다른 학생 놈들은 금제가 걸려 있다지만 이 워다나즈 놈은 아니었기에 가끔 진실이 튀어나오곤 했다.
“물론 도둑도 에인로가드에 들어가도 됩니다. 그 또한 좋은 일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빌도츠칼을 섬기고 있는 사제가 도둑이라면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냥 도둑이라면 도둑질을 해도 됐다.
하지만 빌도츠칼을 섬기는 사제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둑질을 한다면?
그건 사제로서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사제라면 도둑을 감싸고 포용해서 교화할 줄 알아야지 지가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아. 하긴 그렇군.’
이한은 좀 머쓱해졌다.
에인로가드에 너무 물든 모양이었다.
‘도둑이면 좋지 않나?’라는 생각부터 떠오르다니.
“하긴 사제들하고 같이 있는데 도둑질을 하면 조금 곤란하긴 하겠군. 거북이 탑 놈들이야 그런 걸 통제할 수 있어도 불사조 탑 사제들은 좀...”
해골 교장도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네 탑 중에서 불사조 탑 사제들은 가장 평화롭고 온순한 편이었다.
그런 양떼들이 머무는 곳에 늑대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법.
“에이. 불사조 탑 사제들도 그렇게 무르지 않습니다. 도둑질하다 잡히면 바로 두들겨 팰 걸요.”
“......”
“......”
이한의 말에 해골 교장과 주교는 동시에 침묵했다.
주교가 놀라워하는 사이 해골 교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학년 사제들이 특이한 거다.”
“그렇습니까?”
‘네놈이 원인이잖아...’
해골 교장은 이한을 쳐다보며 기막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워다나즈 놈 말고는 변화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해골 교장도 올해 입학한 사제들의 변화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사제라 하더라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면 마법의 성취를 이루기 힘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좀 너무 많이 변하지 않았나?
저번에는 데스 나이트들이 ‘불사조 탑 신입생들이 주방 털었습니다!’란 보고를 했던 거 같은데...
“알겠다. 한 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신기해했다.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교장 선생님은 빌도츠칼 사제도 아니시고 다른 신도 안 섬기시잖습니까.”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이 불경한 신입생을 설득한단 말인가?
‘혹시 협박하시려는 건가?’
“아. 오해가 있구나. 이야기는 네가 하는 거란다. 내가 아니라.”
“......”
“자. 설득하고 와라.”
“아니. 진짜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처음 보는 사제를 어떻게 설득합니까? 아무 공통점도 없는데?”
이한은 투덜거리면서 주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주교가 당황해서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걱정 안 해도 되네. 저렇게 투덜거리면서 해내는 게 저 녀석 취미거든.”
“...???”
* * *
“카르레 사제? 카르레 사제?”
이한은 신전의 평사제들 구역을 돌아다니며 이번에 새로 들어올 신입생을 찾아 헤맸다.
나이가 있는 사제들 사이에 이한과 비슷한 연령대의 다람쥐 수인 사제가 보였다.
“카르레 사제?”
“아닌데요. 저는 이네스에요.”
“?”
이한은 상대에게서 왠지 낯익음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전 워다나즈가 아니라 모라디인데요?’라고 하고 다니던 그 때의 낯익음이었다.
“떠올라라. 감정이여.”
이한은 <오고닌의 감정 인지> 마법을 시전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 카르레 사제가 아닙니까?”
“왜...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흑흑. 저는 이네스에요.”
“이네스는 주교님 이름인데.”
“동명이인이에요.”
“카르레 사제. 사실 다 알고 왔습니다.”
“쳇.”
다람쥐 수인 사제는 툴툴대며 인정했다.
“카르레 사제 맞습니다. 주교님도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외부인한테 제가 누군지 순순히 말해주시다니.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사실 말 안 해줬습니다.”
“......”
카르레는 경악했다.
거짓말 한 번 해본 적 없게 생긴 곱상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당한 것이다.
“사... 사기꾼!”
“음. 에인로가드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됩니다. 저는 원래 거짓말을 안 좋아합니다.”
“!”
상대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깨닫자 카르레의 눈빛이 반짝였다.
“선배님이셨어요!?”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카르레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냉큼 앉았다.
“에인로가드 초대장 받았어요. 정말 꿈과 같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어...”
이한은 당황했다.
사제로서 마음가짐을 설득하려고 왔는데 다른 오해부터 설명해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에인로가드는...”
“편하게 말해주세요. 선배님!”
“음. 알겠어. 사실 에인로가드는 개같은 곳이야.”
“너무 편하게 말해주신 거 아닌가요?”
카르레는 당황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로 편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혹시 카르레 사제는 에인로가드에 대해 어떤 걸 들었지?”
“호화로운 파티가 매일 벌어지고, 밤 롤케이크 위에 밤 크림과 밤 마카롱을 얹어 먹고, 신난 귀족들은 주머니가 느슨해지는?”
“네가 말한 모든 게 다 틀렸어.”
“?!”
카르레 사제는 실망했다.
밤도 배 터지게 먹고 주머니도 좀 두둑하게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인로가드는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 곳에 가까워. 마법을 배우고 싶은 게 아니면 굳이 들어올 필요가 없지.”
“하지만 초대장에는 이런 노래도 있었는데요.”
“무슨 노래?”
카르레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에인로가드. 에인로가드. 너무 좋다네. 따뜻한 식사와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 에인로가드. 후배들도 곧 들어와서 이 천국을 즐기겠지. 에인로가드.”
“......”
이한은 해골 교장의 악랄함에 전율했다.
이걸 초대장에 담아서 뿌렸다고!?
“...저건 가짜 노래야. 어떤 비열하고 더러운 놈이 저런 가짜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군.”
“와, 진짜요!? 선배가 그래도 되나요!?”
“에인로가드에서 믿을 만한 선배는 별로 없어. 나도 너무 믿지 말고.”
카르레는 실망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에인로가드에서 크게 벌어서 나올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법에는 관심이 없나?”
“있긴 해요.”
“투명화 마법, 자물쇠 해제 마법, 단거리 공간이동 마법, 어둠의 장막 마법, 암흑 시야 마법 같은 게 끌리는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카르레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이 조각상 같은 귀족 가문 출신의 선배에게는 마음을 읽는 마법도 있는 것일까?
“내 친구 중에는 뛰어난 도둑 출신도 있어서.”
“헹. 제가 더 뛰어날걸요.”
“그건 둘이 알아서 해결하고... 하여간 그런 식으로라도 마법에 관심이 있고, 힘든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에인로가드에 들어오는 걸 추천해. 후배. 마법을 배우기에는 괜찮은 곳이야.”
“어, 저는 선배님이 불순한 의도로 마법에 관심 가지지 말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나도 돈 벌려고 마법 배우는 건데 뭘.”
이한의 농담에 카르레는 빵 터졌다.
저런 얼굴로 농담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찌나 웃었는지 숨까지 헐떡일 정도였다.
“?”
“헉, 헉헉... 갑자기 그런 농담을 하는 건 반칙이죠. 그럼 진짜 들어가도 되나요?”
“힘든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선배님. 전 도둑 길드에도 소속 안 된 도둑이었다고요. 힘든 생활은 그냥 제 일상이죠.”
“하긴. 아까 말한 내 친구도 적응 잘 하더라.”
“도둑들이 원래 뛰어난 법이니까요.”
카르레는 우쭐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네 의사와 별개로, 주교님께서는 걱정하고 계시던데.”
“아.”
카르레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주교님께서 들어가지 말래요?”
“그건 아니고... 네가 사제인데 스스로를 통제 못하니까 걱정하시는 것 같더군.”
“애초에 전 사제가 아니라 도둑이거든요.”
“사제복 입고 있잖아?”
“주교님이 걱정해서 억지로 입힌 거라구요.”
카르레는 불평했다.
이네스 주교는 그 타고난 인품 덕분에 인근 도둑들이나 용병들에게 모두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교단의 사제라고 해서 누구나 다 범죄자들에게 친절하진 않은 것이다.
당장 아프하 교단만 해도 범죄자들이 도둑질하면 바로 화염 세례가 날아오는데...
그런 이네스 주교가 제일 걱정한 사람이 바로 카르레였다.
길드에 소속되어서 보호받지도 않고, 혼자서 자꾸 일을 벌이면 언제 문제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억지로라도 교단에 데리고 와 사제복을 입힌 것도 그래서였다. 사제복을 입으면 최소한 이 인근에서 공격받을 일은 없었다.
물론 카르레는 그 이후에도 도둑질을 멈추진 않았다.
“빌도츠칼에 대한 신앙심은 없고?”
“있는데요? 저 나름 믿어요.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사제복 입었죠.”
“그런데 왜 도둑질을?”
이한의 질문에 카르레는 무슨 멍청한 질문이냐는 듯이 대답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죠?”
‘반박할 수가 없군!’
이한은 저 솔직한 대답에 깊게 공감했다.
하긴 랫포드도 빌도츠칼 믿긴 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어... 인정하실 줄은 몰랐는데.”
“부자는 중요하지. 네가 도둑질로 부자가 되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부자가 되던 마법은 도움이 될 거다. 어쩌면 마법이 네 시야를 넓혀줄 수도 있고.”
“그럼 들어갈게요!”
“아니. 그러니까 들어가기 위해서 주교님을 설득해야 한단 거잖나.”
“아.”
카르레는 풀이 죽어서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생각한 방법이 있긴 한데.”
이한의 말에 카르레는 눈을 크게 떴다.
“뭐죠?!”
“주교님께서는 네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칠까봐 걱정하시는 거지.”
“그렇죠...”
“그럼 주교님 앞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 되지. 도둑질을 끊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려.”
카르레는 그 말에 질색했다.
“그걸 누가 몰라요? 평생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있으면 진작 했죠.”
“평생 참으란 게 아닌데?”
“??”
“에인로가드 들어올 때까지만 참으란 거야. 에인로가드 들어오면 마음껏 도둑질해. 어차피 하기 싫어도 하게 될 걸.”
“......”
카르레는 처음으로 에인로가드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