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야. 워다나즈. 저런 악마가 돌아다니면 미리 말해줬어야지.”
“아니, 원래 안 돌아다닙니다.”
이한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해명했다.
“저희 가문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인로가드도 아닌데 저렇게 악마를 부리는 곳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 저 앞에 있는 건 악마가 아니라 슬라임이고?”
알시클은 이한의 말에 다시 한 번 밖에 있는 거대한 악마를 확인했다.
옆에 있는 에안두르데는 머리카락을 꼿꼿이 곤두세우며 크릉대고 있었다.
“원래는 골렘들이 돌아다닙니다. 악마들은 어지간해서는 돌아다니지 않아요.”
‘그것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것 같은데.’
보통 제국에서 골렘이 보일 때는 부여나 소환, 혹은 흑마법 학파 쪽 마법사들이 작정하고 소매를 걷어붙였을 때였다.
그만큼 한 기 한 기가 강력하고 만들기 까다로웠던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이만한 넓이의 영지를 순찰할 정도로 고도화된 골렘이라면?
만들기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난이도부터 시작해서 제작비용까지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런데 그걸 그냥 순찰용으로 쓰다니. 여러 의미로 무서웠다.
“손님입니다.”
이한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해명했다.
악마는 이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이 자기 자신을 손님이라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닌 만큼 시킨 일만 할 생각이었다.
-따라오시오.
“히익...”
마부는 돈 때문에 워다나즈 가문에 마차를 몰고 온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그런데 원래 골렘이 길을 안내하지 않았습니까? 왜 악마께서?”
-오늘 골렘들을 정비하고 수리하고 있소. 내가 나온 건 내가 가장 낮은 주사위를 굴렸기 때문이고.
“......”
“......”
부정형의 악마는 얼굴 표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참으로 괴롭다’는 티를 낼 줄 알았다.
괜히 미안해진 셋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시클은 마차 안에서 속삭였다.
“저 악마는 어떻게 잡은 거지? 옛 고대 비전에서 소환해냈나?”
“글쎄요. 그러셨을 수도 있긴 한데... 보통 그냥 주워 오셨던 것 같습니다.”
“악마를 어디서 주워와?”
“다른 차원 아닐까요?”
“......”
알시클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풍경을 감상했다.
저 악마가 왜 저렇게 기분이 더러운지 대충 짐작이 갔던 것이다.
* * *
숲길을 따라 쭉 달려가자 저 멀리서 워다나즈 가문의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원래라면 인근의 숲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일 텐데, 어느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게 마치 유령 영지 같은 으스스함을 주었다.
‘진짜 나 같아도 무섭겠군.’
알시클은 질색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자기 가문의 영지라 그런지 뭐가 이상한지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설마 안에도 사람은 없나?”
“몇 명 있습니다. 기사 분들하고, 저택을 돌보는 시종장하고 하인 분들...”
알시클은 더 나오길 기다렸다.
보통 이 정도 되는 규모의 영지라면 최소 인원이 백 명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밭쪽을 담당하는 일꾼들부터 시작해서 숲지기도 있을 것이고, 영지의 목재를 갖고 올 나무꾼들과 사냥감을 바칠 사냥꾼들, 주기적으로 연극을 펼칠 광대와 음유시인들, 영지의 신전에서 예배를 도울 교단 사제들...
그러나 이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없어?”
“예? 그게 전부인데요.”
“나, 나머지 일은?”
“보통 골렘이 하죠. 악마가 할 때도 있긴 한데 그건 정말 가끔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한은 악마를 부리는 가문이라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는지 열심히 해명했다.
물론 별 효과는 없었다. 알시클은 벌써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다그닥다그닥!
“기, 기사다!”
알시클은 멀리서 달려오는 기사들의 모습에 울컥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사람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기사를 좋아하셨습니까?”
알시클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기입니다! 여기!”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이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또한 제국에 명성이 자자한 알라르롱 경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시클은 날개를 퍼덕이며 알라르롱을 반겼다.
물론 제국에서 이름 높은 기사기도 했지만, 지금 이 열렬한 반응의 이유에는 방금까지 사람을 못 만난 외로움도 상당했다.
알라르롱은 악마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안내하겠네.”
-기쁘군.
“손님 앞에서 태도를 똑바로 하지 못하겠나? 가주님께 말해 네놈의 형기를 늘릴 수도 있음을 잊지 마라.”
-잘... 잘못했다... 기사여. 용서해다오.
알라르롱은 엄한 시선으로 악마를 노려보았다. 부정형의 악마는 풀이 죽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손님 안내가 끝났으니 이제 과수원의 포도를 따야했다.
“아.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원래 워다나즈 가문에서 악마를 부리진 않습니다. 하필 오늘 골렘을 수리하는 날이라서...”
“그, 그렇군요. 당연히 오해하지 않죠.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알시클이 등에서 진땀을 흘리는 것도 모르고 알라르롱은 흐뭇하게 콧수염을 매만졌다.
알라르롱 또한 워다나즈 가문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탓에 감각이 좀 마비된 부분이 있었다.
“이한 님. 이렇게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옆의 분은...”
“내 후배야.”
“이렇게 기세 좋은 전사를 후배로 두시다니, 참 기쁩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르릉.”
에안두르데는 알라르롱과 눈이 마주치더니 슬금슬금 이한의 뒤로 숨었다.
상대에게서 알시클 같은 자와는 다른 어마어마한 강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가주님께서는?”
“외계에 계십니다. 지금 바로 연락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알시클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연락을 보내다니?”
“음. 가주님께서 외계 탐사를 하고 계시는 건 아시죠?”
“응.”
알시클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국에서 몇 안 되는 이들만이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가 뭘 하는지 알고 있었다.
외계, 그러니까 대륙과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탐사하는 일이 바로 현재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가 하고 있는 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위험한 존재들로 가득한 다른 차원에 왜 자꾸 머리를 들이미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이쪽에서 가만히 있는다 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대륙에 관심을 가질 테니까.
기다리면서 수동적인 대응을 하기보다 먼저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능동적인 대응을 하고 싶어하는 게 마법사였고,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는 가장 마법사다운 마법사였다.
그리고 사실 침공의 위협이 없다 하더라도 마법사들은 머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다른 차원의 신비와 지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마법사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게 상당히 본격적으로 하시는 거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외계에서 머무르십니다. 첫째 형님도 같이 돕고 있고요.”
“대부분이라면... 하루에 몇 시간 정도지?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일 년에 하루나 이틀 빼면 대부분 외계에 계시죠.”
“!!!”
알시클은 그 말에 경악했다.
다른 차원에 진입하는 것 위험하고 소모가 심한 일이라, 마법사들은 최대한 빨리 나와서 대륙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당장 정령을 찾아 정령계로 들어가는 마법사들이 얼마나 조심하던가.
온갖 마법진과 마법으로 방어막을 만들고 들어갔다.
다른 차원의 존재들 중 비교적 평화롭고 안전한 정령들을 상대할 때도 그런데, 그냥 외계 차원들을 돌아다니면서 거기를 집으로 삼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차원 관문 아티팩트를 만들어서 안으로 들어가셨죠?”
“아, 아니. 안으로 들어간 방법이 아니라... 하여간 놀랍다.”
알시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들었는데도 워다나즈 가문에 온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마법이란 학문의 저 먼 지평선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연락이라니. 안에 연락도 보낼 수 있어?”
“네. 무슨 마법 아티팩트라고 했는데, 저도 구조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차원 너머로 연락을 보낼 수 있는 아티팩트라니...!”
알시클은 전율했다.
물론 덕지덕지 제약을 걸고 안전한 차원에 잠깐 방문한 사람한테 텔레파시를 보내거나 하는 것 정도는 알시클도 할 수 있었다.
그건 이제 얕은 물웅덩이 아래에 들어간 친구한테 말을 전하는 정도의 난이도였으니까.
하지만 다른 차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탐사하는 마법사라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졌다.
밧줄도 없이 저 심해까지 들어간 마법사한테 어떻게 말을 전한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
‘꼭 뵙고 싶다!’
“대신 단점이 있습니다.”
“단점? 뭐지?”
“다른 차원이 멀어서 그런지 답장 오는 데에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 그럴 수 있지.”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에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한은 깃펜을 들고 편지를 썼다.
-가주님. 안녕하십니까. 에인로가드의 일 년을 마치고...
편지를 쓰던 이한은 깃펜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시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음. 습관적으로 너무 길게 썼습니다. 짧게 보내야 하거든요.”
“어떻게 더 짧게?”
“이런 식이죠.”
이한은 종이를 구겨서 던지고 다시 썼다.
-이한 저택 도착. 알시클도.
“음. 더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야, 이,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앗. 죄송합니다. 펭에린이라고 쓸까요?”
“그게 아니라...!”
귀족의 품위와 권위는 혈연보다 위에 있었다.
아무리 부모자식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정식 호칭으로 부르듯이, 편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알시클은 손님인데 너무 줄였지 않은가!
“조, 조금만 더 써줘.”
“아니. 지금 네 단어도 좀 긴 편입니다. 가주님께서 줄이라고 화내실 수도 있어요.”
“설마 그럴 리가. 그럼 딱 한 단어만!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라고 해줘.”
“그건 두 단어인데요.”
둘은 실랑이를 벌이고 벌인 끝에 편지의 최종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한, 펭에린 알시클.
“그럼 이대로 보내겠습니다.”
이한은 저택 1층에서 <탐사의 방>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홀 앞에 서서 문의 입 안으로 편지를 던져 넣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강력하고 복잡한 마력의 흐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기는 외계 탐사가 진행되고 있는 최전선이었다.
‘놀랍군. 에인로가드에서 1년 배웠다고 이 정도로 다르게 느껴지다니.’
이한은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흐름을 느끼며 신기해했다.
1년 전만 해도 그저 거대한 마력의 질량덩어리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안에서 구분되는 패턴들이 느껴졌다.
옆에서 알시클은 그 마력에 찬탄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마력에 찬탄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배고프세요?”
“아냐! 편지가 너무 무례한 것 같아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답장 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참. 주방 가서 정어리 요리 해달라고 하겠습니다.”
“아, 아니. 괜찮아. 식사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주방에 가서 정어리 요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주방 뒤쪽에서 수십 개의 말발굽을 가진, 부정형의 거대한 악마가 우울한 모습으로 걸어 나갔다.
“...저 악마는 어디 가는 거지?”
“정어리 구하러 가는 걸 겁니다. 자. 후배. 기다리는 동안 마저 공부나 하자.”
에안두르데는 못 들은 척 알시클처럼 저택이 신기하다는 시늉을 했다. 이한은 가차 없이 후배를 끌고 책상 앞에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