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4화
“후배. 배움을 싫어하면 안 돼.”
“으흑.”
“공부는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여기서는 편하게 하지? 에인로가드 들어가면 더 괴롭게 해. 시험 못 보면 징벌방 간다니까!”
‘거짓말이 너무 심하잖아.’
알시클은 속으로 질색했다.
물론 저 야만인한테 교육이 필요하단 건 알시클도 공감했다. 특히 펭에린 가문 같은 귀족 가문의 역사와 존중에 대한 교육이 절실했다.
하지만 저런 거짓말에 누가 속는단 말인가?
“징벌방 싫슴니다...”
“그래그래. 그럼 공부해야지.”
‘아니. 저게 통하네.’
파지직-
<탐사의 방>의 정문에서 답장이 돌아왔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알시클은 호다닥 달려갔다.
-환영. 관장 출발.
“?”
알시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장이 누구지?
“관장님이 누구야? 형님이신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관장이 출발했다고 되어있는데.”
이한은 깜짝 놀라서 뛰어왔다.
평소 워다나즈한테서 볼 수 없었던 다급한 모습에 알시클도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뭔가 잘못됐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한은 답장을 받아서 읽었다.
하지만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환영. 관장 출발.
“아니... 잘못 온 거 아닌가?”
“관장님이 누구신데 그래?”
“어, 가모님이시죠.”
가모(家母).
그러니까 이한의 어머니였다.
알시클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계셨어?!?!”
“......”
“......”
이한과 에안두르데는 알시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안두르데는 특히 쓰레기를 보듯이 시선을 던졌다.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알아차린 알시클이 당황해서 외쳤다.
“미, 미안하다. 그게, 그러니까.”
“쓰래기...”
“아니야!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 워다나즈 가주님께서는 그나마 가끔 나오긴 하시는데, 부인께서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신 적이 없어서, 있는지도 몰랐다고!”
알시클은 절절하게 항변했다.
보통 대귀족 가문의 가주나 그 배우자는 얼마나 사교적이든 간에 제국에 그 신분이 알려져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도 참가해야 할 공식 행사들이 있는 만큼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워다나즈 가주의 부인은 그냥 소문 자체가 없었다.
가주는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부인은 어떤 이야기도 없었기에 알시클도 ‘혹시 요절하신 건가?’하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아. 관장님께서는 좀 비사교적인 분이라 그렇습니다. 외부 활동을 싫어하시거든요.”
“?”
알시클은 뭔 개소린가 싶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이미 제국에서 가장 비사교적인 가문이었던 것이다.
당장 가주도 제국에 대마법사가 정말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등장도 하지 않은데 뭔?
“어... 워다나즈. 이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너희 가문은... 이미 비사교적이잖아? 가주님께서도 사교적인 분은 아니시고...”
“에이. 관장님하고 비교하면 가주님께서는 사교적인 분이시죠.”
“...!!!”
알시클이 경악해하는 사이 이한은 추가적으로 좀 더 설명해줬다.
흔히 제국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해서 착각하기 쉬웠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가모이자 새벽장서관의 관장인 어머니는 멀쩡하게 살아계셨다.
다만 외부 활동을 싫어할 뿐.
“아무리 싫어해도 그렇지 이렇게 안 알려질 수가 있나?! 관계자들이...”
“음. 마법이죠.”
“...나도 마법사거든. 마법이 만능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워다나즈 가주는 ‘제국 서부에 대가뭄이 일어났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하는 연락을 받으면 바닷물을 통째로 옮겨서 소금기를 빼버린 다음 저수지를 만들어줬다.
그 정도는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그냥 연락을 무시했다.
그런 다음 연락을 전달한 전령의 기억을 지우고, 전령을 보낸 관료의 기억을 지우고, 상관도 관련되었으면 상관도 기억을 지워버리고...
“......”
알시클은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환상 마법의 지고한 경지 중에서는 상대의 기억을 잘라낼 수 있는 마법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 그것도 직전의 기억을 살짝 건드리는 수준이었다.
워다나즈 가문 정도 되는 중요한 인물과 관련된 기억을, 제국의 관계자 중 단 한 명도 빼먹지 않고 모두 다 조작했다고?
“말이 되나?!”
“말이 되니까 알시클 님이 모르시는 거죠.”
“...그, 그러네.”
알시클은 등골에 차가운 얼음을 댄 것처럼 전율했다.
올 때만 해도 워다나즈 가문의 놀라운 마법과 가주의 뛰어난 지혜를 견문하고 정진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마법을 처음 배운 소년이 대마법사를 만났을 때처럼 두려움 섞인 경외심만 들었다.
이게 마법인가?
“음. 관장님께서 왜 나오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몇 번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언제인데?”
“여덟 살 때 생일이었나? 그 때 오셔서 선물 주고 바로 차원 들어가셨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란 건 알았지만 알시클은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뭘 주셨지?”
“비싸 보이는 마도서였는데, 가주님께서 위험하다고 다시 갖고 가셨습니다. 그냥 돈으로 주시지.”
이한은 아쉽다는 듯이 투덜댔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덜컹.
작은 소리와 함께 <탐사의 방>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알시클이 본 것 중 가장 흉악하고 위협적으로 생긴 악마가 걸어나왔다.
알시클은 자신의 방어용 아티팩트가 뿜어내는 빛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악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체에게 데미지를 줬는데, 눈앞의 악마는 바로 그런 악마였다.
이한은 재빨리 에안두르데의 눈을 가렸다.
“관장님! 변신 안 풀리셨습니다!”
-아.
악마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변신 마법을 풀었다. 창백하고 가냘픈 인간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서 알시클은 아까 워다나즈가 한 말이 사실 농담이나 거짓말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저렇게 지적이고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마법사가 어떻게 그렇게 괴팍한 인물일 수가 있겠는가?
“펭귄 수인이군.”
“예.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이십니다.”
“그래.”
새벽장서관의 관장이자 이한의 어머니인 라야나는 손가락을 뻗었다.
알시클은 곧 일어날 일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가만히 서있었다.
“관장님! 기억 지우시면 안 됩니다!”
“왜지?”
“알시클 님의 입은 제국에서 가장 무겁습니다!”
“...헉! 절, 절대 어디 가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알시클은 방금 자기 기억이 날아갈 뻔했다는 걸 깨닫고 기겁해서 외쳤다.
라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나 알시클의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한 끄덕임이었다.
“에인로가드에 들어갔다고.”
“예.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난 범속한 마법사들 밑에서 배우는 게 좋은 방법인지 잘 모르겠다.”
졸지에 범속한 마법사들이 된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었다.
이한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 수준도 낮아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필요한 마도서는 없고?”
“괜찮습니다.”
알시클이 옆에서 ‘왜 거절해!?’하면서 쳐다봤지만 이한은 냉정했다.
필요한 마도서 이름을 말해봤자 어차피 제대로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분명 ‘그 범속한 마도서는 읽지 마라’하면서 읽는 순간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는 이상한 마도서를 추천해주시리라.
“그런데 관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네가 에인로가드에 입학해서 일 년 동안 수련했다길래.”
알시클은 살짝 뭉클해졌다.
“괜찮은가 걱정되셨던 거군요.”
“마법이 얼마나 늘었나 보러 온 건데. 그것도 괜찮은가 걱정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옆의 고르곤 혼혈은 네가 펭귄 수인하고 낳은 자식?”
“아닙니다.”
알시클은 경악해서 부리를 뻐끔거렸지만 워다나즈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장으로 일하면서 필요한 마도서가 있다면 언제든 사양하지 말고 말하고.”
“...관장님. 저 이제 막 1학년 마쳤는데요.”
“아.”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라야나는 착각했다는 듯이 말했다.
“예지를 좀 과하게 썼나.”
“마법이 실패하신 거군요.”
“내 마법은 틀리지 않아. 이한. 둘 중 하나가 틀렸다면 미래가 틀린 거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시는군.’
이한은 어머니의 말에 속으로 반항했다.
에인로가드의 교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미래를 봐놓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신단 말인가.
“범속한 마법사들 밑에서 배우면서 마도서가 그리워진다면 언제든지 편지해라. 답장은 늦어도 찾아서 보내줄 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그럼 일이 바빠서 이만.”
라야나는 가볍게 손짓하더니 다시 문을 지나 차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알시클은 긴장을 놓고 거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한테 ‘저건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 쓴 마법이다’라는 소문이 돈 적 있었는데, 부인은 그냥 거죽을 뒤집어쓰지도 않은 마법 같았다.
지팡이도 쓰지 않고 손가락 하나로 알시클의 기억을 잘라내려고 하다니.
“정말...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
두려움이 가라앉자, 알시클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압도되어서 눈치를 못 챘지만 돌이켜보니 정말로 굉장한 경험이었다.
부인의 등장부터 시작해서 퇴장까지.
그 주변의 모든 마력들이 관장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지팡이도 없이 손가락으로 마법을 시전하려고 한 것도 그 자신감의 발로였다.
알시클도 마법사인 만큼 두려움과 별개로 그 광오함에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거 아님...?”
“쉿.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밖으로 내뱉으면 실례야.”
에안두르데와 이한은 알시클의 반응에 질색하며 거리를 벌렸다.
방금 그걸 보고 좋은 경험이라고 하다니?
“아, 아니... 야, 워다나즈. 너는 친족이라 자주 뵈어서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충격이었다고.”
“저도 살면서 몇 번 못 만났는데요?”
‘아차. 이 자식은 마력 때문에 충격을 덜 받는구나.’
생각해보니 아까 악마 형태일 때도 워다나즈는 그냥 덤덤했다.
저항력도 저항력이었지만 주변의 마력 통제권도 마법사에게는 생득권처럼 중요한 요소였다.
주변의 마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지는 순간 마법사는 정신에 강한 타격을 받았다.
잘 갈무리된 집중력과 신념이 마법의 원천인 만큼 이건 매우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워다나즈는 달랐다.
주변의 마력 통제권을 전부 뺏겨도 마력이 워낙 많다보니, 본인 주변으로는 일정 이상 통제권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무거운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워다나즈가 바로 그랬다.
“하여간! 정말 놀랐다고.”
“예... 뭐...”
“부인께서 관장이라고 자처하시는 걸 보면, 되게 대단한 장서관이겠다.”
제국에서 장서관이나 도서관은 지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비전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러한 장서관이나 도서관의 관장 직위는 가문과 함께 계승되었고 그 자체로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워다나즈 부인께서 관장으로 자처할 정도인 걸 보면 아마 고대 때부터 내려오는 장서관이리라.
“저 어렸을 때 형님이 거기 있는 책을 하나 선물 받으셨는데 죽으실 뻔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장서관이겠는데?”
알시클은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하긴 생각해보니 차원 탐사가 취미인 부부가 평범한 마도서는 넣지 않았을 터였다.
아마 한 권 한 권이 치명적인 금서일 터.
“그래도 부럽다.”
‘진짜 미치신 건가 혹시?’
이한의 생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시클은 감명 받은 얼굴로 말했다.
“한 분은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 다른 한 분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장서관의 관장이시라니. 두 분께서는 분명 위대한 마법의 완성을 위해 손을 잡으셨을 거야. 나도 저런 배우자를 만나고 싶어.”
알시클 생각에 가장 하찮은 결혼은 서로 육욕에 빠져서 결합하는 결혼이었다.
그 다음은 서로 가문의 명예와 이득을 생각해서 결합하는 결혼이었다. 이건 평범한 결혼이었다.
가장 위대한 결혼은 바로 숭고한 목적과 지식을 위한 결합이었다.
어떠한 사심과 육욕도 없이 마법이라는 위대한 학문을 위해...
“두 분께서는 그냥 첫눈에 반하셔서 결혼하셨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