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알시클은 부리만 뻐끔거렸다.
“거, 거짓말하지 마. 두 분께서 그러실 리가 없어. 그렇게 평범하게 육욕에 빠져서 결혼하셨을 리가...”
“가주님께서 직접 말해주신 거라 확실합니다.”
이한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종종 가주와 이야기할 때면 묻지도 않은 사랑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꽤나 괴로웠던 것이다.
“진짜 사랑이 마법을 강하게 만드는 건가?? 사랑은 마법에 방해되는 찌꺼기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교장 선생님하고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워다나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알시클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 후배의 폭언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떠올라서 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난 고나달테스 님하고 달라. 물론, 고나달테스 님께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을 수 있지.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고. 나는 위대한 마법의 완성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더라도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결혼할 거야.”
‘이거 교장 선생님은 납치혼 할 사람이라고 돌려서 욕하는 거 아닌가?’
알시클이 생각보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자 이한은 궁금해져서 물었다.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라도 있으십니까?”
“이야기가 나온 사람은 있긴 해. 맞아. 워다나즈. 좀 들어볼래? 너라면 잘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젠장. 습관 고쳐야 하는데.’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물은 방금 전의 자신을 후회했다.
자꾸 호기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말을 던졌다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가주의 사랑 이야기도 지겨웠는데 알시클 약혼자 이야기는 또 얼마나 지겹겠는가.
‘그리고 내 조언이 여기서 의미가 있나?’
마법이나 사업 계획서 같은 건 조언이 가능해도 알시클이 누구와 약혼할지 고민하는 건 이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떠오르는 질문이 ‘상대도 정어리 좋아하나요?’정도인데...
“지금 가문에서 이야기가 나온 상대 중 하나는 아르바 가문의 여식이야. 알바트로스 수인 가문이지. 전통적으로 펭귄 수인과 알바트로스 수인은 뛰어난 자식을 낳을 확률이 높아지는 만큼 이게 장점이라고 생각해.”
“......”
이한은 귀를 막고 싶은 감정을 꾹 참아야했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 생물학적 지식이다.’
펭귄 수인과 알바트로스 수인의 궁합에 대한 제국 속설이라니.
옆을 보니 후배는 벌써 졸고 있었다.
“그... 렇군요.”
“이야기가 나온 다른 상대는 세빙 마탑의 부관이야. 냉기 원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인만큼 서로 같이 주제를 맞추기에 좋겠지.”
“와. 정말 너무 행복하겠어요.”
이한은 가식적으로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자기가 들어도 너무 성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대충 말했나?’
그러나 알시클은 흐뭇해했다.
“그렇지? 네가 높게 평가해주니 기쁘다.”
“......”
그 반응에 이한은 괜히 미안해졌다.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드려야겠군.’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나온 상대는 ■■■■■■ 경이야.”
“...방금 무슨 언어였습니까?”
“아. 네 귀로는 못 들을 거야. 정령 이름이거든. 우리 가문과 인연이 있는 정령인데. 이 정령하고 계약을 맺으면 어떨까 고민 중이야. 장점은 추위의 정령이라 내 마법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제국에서 정령과의 계약은 그 형태가 생각보다 다양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한 것처럼 평범한 형태의 계약도 있었지만, 가끔 강대한 정령과 특이한 형태의 계약을 하는 마법사들도 나타났다.
그 중 가장 특이한 축에 속하는 계약이 저런 혼약 형태의 계약이었다.
질투심 강한 정령들은 마법사를 독점하길 원했고, 마법사는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정령의 힘을(혹은 정령과 사랑에 빠졌거나) 빌리기를 원한다면...
이런 식으로 강하게 계약하게 되는 것이다.
“정령은 좋은 파트너죠. 참. 저 정령하고 계약한 거 아세요? 여기 다람쥐하고 참새 정령인데.”
“?”
알시클은 이한이 갑자기 자기 정령을 자랑하자 살짝 당황했다.
희귀하거나 드문 정령도 아닌 그냥 평범한 하급 정령이었던 것이다.
‘어, 무슨 뜻이지?’
“그... 참 귀엽고 똑똑한 애들이네?”
“그렇죠?”
이한은 저택에 들어와서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알시클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자기가 잘 대답했나 싶어 안심했다.
“그래서 셋 중 누가 가장 좋아 보이지?”
“음. 펭에린 님. 셋 중 어느 분을 만나셨을 때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이한은 정석적인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이런 걸 묻는 것도 귀찮았지만 다 들은 이상 아예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응? 만나본 적 없는데?”
“네?”
“만나본 적 없어. 세 분 모두 이름만 들어봤다고.”
“......”
이한은 깊숙이 좌절했다.
알시클은 생각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냥 예지 마법으로 고르라고 할까?’
고민하던 이한을 도와준 건 아까 나간 부정형의 악마였다.
정어리를 들고 돌아온 악마는 지친 목소리로 주방에 말했다.
-갖고 왔다.
“아참. 악마님. 좀 있으면 친구들 초대할 텐데 도와주시겠습니까?”
-......
악마는 주사위 눈을 낮게 뽑은 자기 자신을 저주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왜 하필 이런 날에 주사위 눈을 낮게 뽑았단 말인가?
“펭에린 님. 저희 저택의 만찬이란 게 사실 그리 다양하지가 않아서 걱정입니다.”
알시클은 이한이 화제를 돌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예. 애초에 대부분 다 밖에 계시고, 그나마 있는 기사들이나 시종들은 호화롭게 식사하는 걸 좋아하지 않다보니...”
가문에 식료품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짓수가 많지 않고 대부분 검소한 편이었다.
가이난도 같은 친구가 왔을 때 평소 먹던 대로 차리면 ‘이건 전채고 메인 요리는 따로 있지?’라고 물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알시클은 저택 밖의 살풍경한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오는 친구들에게 대접할 만찬을 준비하기보다는 다른 걸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마을에 가서 쓸만한 걸 긁어오면 그만이지. 오면서 보니까 마을이 꽤 크던데.”
-빌어먹을 펭귄...
악마는 중얼거리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시킬 거면 한 번에 시키지 이렇게 나눠서 시키다니!
알시클은 당황해서 해명했다.
“아니, 그쪽을 시키겠단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손님이신데!”
이한의 외침에 부정형의 악마는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워다나즈 님. 제발 형기는 늘리지 마십시오.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하여간 펭에린 님. 말씀하신대로 전 마을에 가서 쓸만한 것 좀 사오겠습니다. 후배. 넌 여기까지 공부 끝내놔. 갔다 오면 시험볼 거야.”
“저, 저도 장 볼 수 있슴니...”
“안 돼.”
악마는 얼굴도 없었지만 에안두르데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저 꼬마가 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워다나즈.”
“예?”
“그 악마를 데리고 마을에 가는 거야?”
“예. 괜찮습니다. 계약으로 묶여서 사고 못 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닌데.’
아무리 계약으로 묶인 악마라 하더라도 시장 구경 가는데 짐말 대용으로 쓰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기겁을 하겠는가?
알시클은 지적을 하려다가 말았다.
손님으로 왔는데 상대 가문의 전통에 너무 많은 참견을 하는 것도 좀 그랬던 것이다.
“음... 그래... 잘 다녀와.”
“예.”
이한은 악마와 같이 정문을 나섰다.
둘이 묵묵히 오솔길을 걸어가던 도중 문득 아까 대화가 생각이 난 이한이 물었다.
“악마님. 약혼 상대로 뛰어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이 좋겠습니까, 마법 연구가 잘 맞는 사람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강한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겠습니까?”
-제가 마법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약혼은 가슴이 뛰고 사랑하는 상대와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
* * *
알시클은 에안두르데의 공부를 봐주면서(이 고르곤 혼혈 꼬마는 끊임없이 탈주와 딴짓을 시도했다) 이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가주님은 안 오시나?’
<탐사의 방> 정문을 보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 외계 탐사로 바쁜 게 분명했다.
알시클은 아쉽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했는데 라야나 워다나즈 부인을 뵌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끼익-
저택 1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알시클은 이한이 돌아왔나 싶어서 고개를 내밀었다. 에안두르데는 도망치기 위해 재빨리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
처음 보는 낯선 정령이 1층의 현관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알시클은 놀라서 눈을 깜박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령이 아니잖아!?’
처음에는 워낙 자연의 기운이 강해서 정령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정령이 아니었다.
상대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대지의 정령들이 엉켜서 놀고 있었고, 콧등과 눈썹 위로는 작은 우레 정령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성격 까다로운 우레 정령들이 사람을 다치지 않게 노는 모습에 알시클은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정령 마법사도 저렇게 친화력 높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던 것이다.
상대는 들고 있던 커다란 가죽배낭을 내려놓았다. 낡은 배낭은 금방이라도 터질것마냥 가득 차있었다.
알시클은 그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몰라 긴장했다.
“...?”
안에서 나온 건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었다.
이가 빠지고 금이 간 도자기 컵, 글자가 뭉개진 오래된 석판, 촉에 녹이 슬고 깃대가 부러진 화살...
상대는 그건 하나씩 세심하게 내려놓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수십의 정령들이 옆에서 그 일을 전력으로 도왔다.
그 모습에 알시클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안에서 나온 게 잡동사니인 것도 놀라웠지만, 정령들이 저렇게 아무런 불평도 없이 일에 전념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도 어떠한 마법도 명령도 없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친화력만으로 저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분명 아티팩트 같은 게...’
뚫어져라 쳐다보던 알시클 뒤에서 에안두르데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다 의자를 넘어뜨렸다.
쾅!
“?”
낯선 손님은 고개를 들더니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알시클은 그대로 멈췄다.
“어... 음...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입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잡동사니를 관리했다.
“저 왔습니다. 펭에린 님.”
“!!!”
이한의 목소리가 들리자 알시클은 다급하게 외쳤다.
“워다나즈! 저기!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사람으로 위장한 정령 같...”
“어, 형님?”
“...???”
워다나즈 가문의 둘째, 아르실 워다나즈는 이한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아. 제가 에인로가드에서 1년을 마쳐서 축하해주려고 오셨다고요? 아니. 이러실 것까지는 없는데... 너무 먼 길을 오신 것 같아서 제가 죄송합니다.”
“??”
알시클은 혼자 대화하는 이한을 보며 당황했다.
둘째 형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한 혼자 계속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워, 워다나즈. 아르실 님께서 말하고 계신 게 맞나? 안 들리는데?”
“정령어에 가까우셔서 잘 안 들릴 겁니다. 저도 핏줄이라서 들리는 거거든요.”
“잠깐. 인간이 정령어를 할 수가 있나?”
“형님께서는 원래 하셔서...”
“......”
제국 정령 마법사들이나 언어학자들이 듣는다면 기절할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워다나즈의 모습에, 알시클은 자신이 새삼 어느 가문의 영지에 와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