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제국의 무덤이나 유적들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오래된 곳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옛 왕국 시절에 만들어진 무덤이나 유적들은 침입자를 막기 위해 각종 강력한 수단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런 수단들은 별 생각 없이 들어온 불운한 침입자들을 찢어발기고도 남았다.
이런 무덤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힘으로는 안 됐다. 온갖 학문, 특히 고고학에 박식해야 했고 돌발상황에도 침착할 수 있는 지혜와 담대함도 갖고 있어야 했다.
동시에 일이 틀어졌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수 있는 직감과 행운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이런 무덤이나 유적이 발견되면 들어가는 대신 모험가들을 고용해서 보냈다.
딱히 모험가들을 위의 재능을 가진 인재라고 인정해서 보내는 건 아니었고, 실패해도 자기가 다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이난도는 자신도 모르게 이한 뒤로 숨으며 아르실에게 물었다.
“괜, 괜찮은 곳인가요?”
“이 정도면 괜찮긴 하네.”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꽤 멀쩡해보였던 것이다.
“......”
“......”
닐리아와 가이난도가 경악해하며 이한을 쳐다보는 사이, 요네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한. 괜찮다는 게 어떤 의미로 괜찮다는... 거야?”
“너무 뜨겁지도, 너무 춥지도 않잖아?”
이한에게 아르실은 친절하고 상냥한 형이었지만, 정령하고만 너무 오래 어울린 탓에 감각이 좀 마비된 사람이었다.
용암이 끓어오르거나 날숨이 얼어붙는 곳에 가면 인간 종족은 좀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여기 고대 무덤은 비교적 쾌적한 편이었다. 공기가 좀 서늘한 것 빼고는 별다른 위험이 안 느껴졌다.
가이난도는 울상이 되어서 중얼거렸다.
“놀러오지 말걸.”
“뭐라고 했어, 가이난도?”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닐리아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워다나즈. 난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 닐리아.”
“여기는 너희 가문 영지지?”
“그렇지. 외곽이긴 하지만 여기도 영지긴 해.”
“...보통 영지에서 이런 무덤이 발견되면 좀 더 사람을 많이 불러야 하지 않아?”
원래 귀족의 영지라 하더라도 거기서 무덤이나 유적이 발견되는 일은 드물었다.
애초에 사람 손이 많이 탈수록 무덤이나 유적은 빠르게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넓고 외진 영지를 가진 귀족들 중에서는 아직도 무덤이나 유적을 영지 내에서 발견하는 이들이 종종 나오곤 했지만, 이들도 발견하면 보통...
‘사람을 더 부르지 않나?’
가문 휘하의 기사나 마법사를 보내거나 모험가를 고용하거나 용병을 고용하거나 하다못해 가까운 산맥에 있는 든든한 전문가, 그림자 순찰대를 부르던가...
닐리아도 어렸을 적에 북부 남작 가문에서 사람이 나와서 애걸복걸한 기억이 있었다.
영지에 웬 미궁이 하나 발견됐는데 몬스터들이 자꾸 기어 올라와서 가신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원래 그게 맞긴 하지.”
이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가문 영지는 워낙 넓고, 외진 곳이 많아서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거든. 그래서 일일이 사람을 부르진 않아.”
아르실은 동생의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력이 많은 곳에는 기괴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한 곳에 고인 마력이 온갖 변화를 만들어내니 다른 차원과의 균열이 생기고 현실의 규칙이 뒤틀리며 천변만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처럼 제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마법 실험을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가문이라면 주변에 영향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설명을 들은 요네르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래서 저택 주변에 이렇게 사람이 없었던 거구나?”
“아냐. 그건 그냥 부모님께서 주변에 사람 있는 걸 성가셔하셔서 그래.”
“......”
아르실은 ‘사실 그런 목적도 있다’고 변명했지만 친구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여하튼 영지에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어지간히 큰 일 아니면 내버려두는 편이지. 하나하나 대응하려면 기사들 손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큰 일의 기준이 대체 뭔데?”
“골렘 반란 같은 거?”
닐리아는 말문이 막혀서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을 느꼈던 것이다.
가이난도는 요네르와 닐리아를 보며 속삭였다.
“말려줘! 제발! 난 저기 들어가기 싫어! 에인로가드도 아닌데 왜!”
“흑마법사는 무덤 들어가는 거 좋아하지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연금술사는 모두 다 공방에 틀어박혀서 재료 손질하는 걸 좋아해?!”
‘좋아하는데...’
요네르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가이난도의 속삭임과 달리 이한은 상당히 의욕적이었다.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무덤을 보자 욕심이 생긴 것이다.
“형님. 저 안에 장신구가 얼마나 있습니까? 옛날 금화나 은화도 있을까요? 있다고요? 이야. 잘 됐네요.”
아르실의 설명을 들은 이한은 얼굴이 환해져서 돌아섰다.
“잘 됐다. 너희들. 영지 구경하고 나서 덤도 챙겨갈 수 있겠는데?”
저택에 놀러온 친구들이 계속 심심해하는 것도 조금 미안했는데 영지 구경은 물론이고 값진 덤까지 챙겨갈 수 있다니.
친구들을 대접하는 입장에서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 이한.”
가이난도는 가냘픈 목소리로 이한을 불렀다.
저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고대 지하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 여기가 워다나즈 가문 영지인지 에인로가드인지 구분할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왜?”
“......”
그러나 가이난도는 ‘들어가기 싫다’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시켜주려고 신이 난 이한의 감정이 느껴졌던 것이다.
저기에 대고 ‘난 못 들어가!’라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요, 요네르가 할 말 있대!”
“저, 저런 쓰레기가?”
닐리아가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아까 잉크가 가이난도를 요네르의 적으로 삼았을 때에는 ‘좀 심한 거 아닌가?’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주 적절했다.
“요네르? 왜?”
가이난도는 방금 자신이 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눈빛을 친척에게 보냈다.
제발!
‘제발 말려줘!’
요네르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이난도가 무덤이 너무 기대된대. 흑마법을 이럴 때 쓰려고 배운 거라고 하던데.”
“녀석!”
이한은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가이난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르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이한은 뿌듯해져서 친구를 자랑했다.
“여기 이 가이난도란 친구가 흑마법을 전공하는데... 아. 뛰어나죠. 같이 흑마법 듣는 학생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거든요.”
“흑마법 듣는 사람이 다섯이 안 되지 않...?”
“쉿.”
요네르가 닐리아의 입을 막았다.
아르실은 기특하다는 듯이 가이난도를 칭찬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칭찬하는 건 느껴졌기에 가이난도는 울상이 되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감... 감사합니다...”
“가이난도 네가 드디어 마법 공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구나. 기쁘다.”
아르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한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형님.”
“뭐라고 하셨는데?”
“혹시 조카냐고 하시잖아.”
“......”
* * *
입구에서 호들갑을 그렇게 떨었지만, 의외로 무덤 안은 위험하지 않았다.
입구 근처에 별다른 함정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르실의 능력이 사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르륵!
아르실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정령들이 나타나서 길을 관리했다.
바위의 정령들이 무너지기 직전의 바닥을 수리하고 금이 간 천장을 고쳤으며, 모래와 흙의 정령들이 나타나 혹시라도 모를 균열을 채워 넣었다.
빛의 정령들은 아르실이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밝히고 먼저 앞에 날아가 함정이 있는지 확인했다. 만약 함정이 있다면 정령들이 달려가 무효화시켰다.
뒤에서 그걸 본 이한과 친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말, 말도 안 돼...!”
정령 친화력만 놓고 보면 여기서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하는 닐리아였지만, 지금 아르실이 보여주는 건 상상을 초월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정령들에게 맹목적일 정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형님께선 원래 저러셨어.”
이한은 툴툴대며 대답했다.
저건 어떤 이론이나 마법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타고난 친화력이었다.
충격에 빠진 닐리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다나즈는 정령들이 무서워서 피하던데...”
“......”
“아. 아니. 미, 미안.”
“난 괜찮아. 사실인데 뭘.”
“진짜 미안...! 미안해!”
“괜찮다니까.”
“사실 안 괜찮잖아! 그냥 화를 내라고!
“진짜 괜찮은데 왜 화를 내란 거야?”
닐리아는 다시 한 번 편지 블랙리스트 상대에 오를까봐 필사적이었다.
“저게 저렇게 대단한 거야?”
“넌 흑마법 하느라 언데드하고만 놀아서 모르는 거야. 저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흑, 흑마법하고는 상관없잖아!”
괜히 물어봤다가 구박 받은 가이난도는 발끈했다.
확실히 편하다고는 생각됐다.
언데드들이 저 정도만 깍듯했어도 흑마법사를 하는 보람이 느껴졌을 정도로.
“이한. 이한. 언데드로 저런 건 불가능해?”
“...가이난도. 미쳤냐?”
“아, 아니... 이한 너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서 물어봤지.”
물론 가이난도도 언데드로 저런 게 불가능하단 건 알았다.
기본적으로 언데드들은 사납고 난폭한 존재라, 저런 식의 세세한 돌봐줌은 불가능했다.
만약 언데드들한테 ‘내가 무덤을 돌파하려고 하는데 바닥을 확인하고 천장을 확인하고 앞의 함정을 확인해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는 오히려 일부러 함정을 작동시키는 경우가 생겼다.
하지만 이한이라면...
“나라고 다 가능한 건 아니지. 가이난도.”
“그런데 이한 넌 언데드들이 무서워하잖아. 그래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
이한은 앞에서 걸어가는 가이난도를 걷어찼다.
“왜?!”
“돌에 걸려서.”
똑, 똑똑똑, 똑똑-
아르실이 멈춰서더니 무덤의 벽을 두드렸다. 요네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기 안에 길이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거야?”
“정령이 말해줬대.”
‘진짜 사기적이다...!’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법학교 학생으로서 아르실의 능력이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 능력이 있다면 연금술을 할 때에도 그저 노련하고 뛰어난 정령을 불러와서 귀 기울이면 됐다.
각종 고서적을 읽을 때도 이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정령을 불러오면 됐고...
“이 안은 무덤을 지키던 기사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안에는 은으로 만든 부장품들과 약간의 책들이... 아. 책은 이미 형님께서 가져가셨어요? 무슨 책이었죠?”
아르실은 동생의 관심에 신이 나서 무슨 책이었는지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기사들이 궁정의 귀부인에게...
“쓸데없는 소설을 적은 책이었대. 들어가자.”
“......”
아르실은 시무룩했지만 티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거대한 바위 헤카톤케이레스가 앉아 있었다. 어지간한 거인은 완력으로 제압할 법한 괴물을 보자 이한 일행은 경악했다.
“...형님. 저건 헤카톤케이레스 아닙니까? 제가 관심이 없어보여서 안 말해주셨다고요? ...물론 제가 몬스터보다 보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뭐가 있는지는 말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한이 이를 가는 사이 아르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과하더니 헤카톤케이레스한테 말을 걸었다.
사납게 이한 일행을 노려보던 헤카톤케이레스는 아르실의 부탁을 듣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이한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놀다 나가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