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몬스터한테 원래 저런 설득이 통하는 거야?”
“나야 모르지. 난 정령하고 안 친해.”
“...미, 미안.”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하여간 허락 받았으니까 빨리 뒤지자.”
“이한. 솔직히 아무리 보물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분위기에서 뒤지는 게 쉽지는 않다구.”
가이난도는 툴툴댔다.
바위 헤카톤케이레스가 옆에서 살벌하게 노려보고, 언제 어디서든 언데드 몬스터가 튀어올 것 같은 무덤에서는 보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네르랑 닐리아는 이미 챙기고 있는데.”
“?!”
가이난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요네르와 닐리아는 이미 은으로 된 부장품들 중 가치 있는 것들을 골라서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쟤... 쟤네는 에인로가드 다녀서 이상해진 거고!”
‘너도 에인로가드 다녔잖아...’
쿵-
안쪽에서 헤카톤케이레스가 아르실을 불렀다.
둘이 꽤 길게 대화를 나누자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셨습니까? 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긴 한데...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그런답니까?!”
이한이 당황해하자 가이난도는 불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한? 별 일 아니지? 갑자기 생각 바뀌어서 우리를 잡아먹고 싶어졌대?”
헤카톤케이레스가 아르실에게 말했다. 아르실은 이한에게, 이한은 가이난도에게 말을 전했다.
“재수없는 인간처럼 지껄이지 말라시는데. 너 같은 걸 왜 먹냐고.”
“...죄, 죄송합니다.”
이한은 친구들을 부른 뒤 방금 헤카톤케이레스가 한 말을 전했다.
“여기 헤카톤케이레스는 옛날에 교장 선생님한테 패배한 굴욕이 있으시대.”
헤카톤케이레스가 아르실에게 말했다. 아르실은 이한에게, 이한은 친구들에게 말을 전했다.
“...굴욕은 아니고, 빚 정도라고 하시는군.”
헤카톤케이레스가...
“아. 빚이든 구원(舊怨)이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말 좀 하겠습니다.”
이한은 짜증을 내며 외쳤다.
자꾸 여러 사람 거쳐서 말을 전달받으니 이야기가 두 배로 느려졌다.
“하여간 묵은 원한이 있는데 그걸 우리한테 풀고 싶으시다는군.”
헤카톤케이레...
“우리한테 푸는 게 아니라, 정당한 자격과 권리에 따라 우리를 시험하고 싶다는군. 솔직히 그게 그거 아닌가?”
이한이 작게 중얼거리자 헤카톤케이레스가 분노해서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번에 아르실은 가만히 있었다.
헤카톤케이레스는 왜 가만히 있냐고 항의했다.
아르실이 동생의 귀를 더럽히는 말은 안 전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헤카톤케이레스는 화가 치솟아서 욕을 퍼부었다.
-■■■■ ■!
“이번에는 왜 저러십니까?”
아르실은 웃으면서 ‘신나서 저러는 거다’라고 대답해줬다. 이한은 참 신기한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지능 높은 몬스터들은 다 괴팍한가?’
하긴 교장 선생님도 굳이 따지고 보면...
“아니, 교장 선생님한테 묵은 원한을 왜 우리한테 풀어요!”
가이난도는 뒤늦게 반응했다.
저 몬스터는 머리통도 많은 주제에 생각하는 수준은 머리 하나인 가이난도 자신보다 떨어졌다.
헤카톤케...
“스승의 명예가 제자에게 이어지고, 스승의 지식은 제자에게 이어지는 만큼, 스승의 빚도 제자에게 이어진다고 하시는군. 아니. 너무 억지 아닙니까?”
이한의 항변에도 헤카톤케이레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가이난도는 길게 고민에 잠겼다.
평소 이렇게 깊게 고민하지 않는 친구인 만큼 요네르는 신기하다 싶어서 물었다.
“뭘 생각하고 있어?”
“근데 여기서 교장 선생님의 진짜 제자는 이한 혼자 아니야?”
“......”
“와, 쓰레기 같은 놈.”
닐리아의 중얼거림에 가이난도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내... 내가 참가 안 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해본 것뿐이야!”
“워다나즈. 가이난도는 참가 안 한대.”
“아니야! 아니야! 참가할 거야! 참가하게 해줘!”
헤카톤케이레스도 쓰레기를 보는 눈빛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고나달테스의 제자가 저렇게 동료를 버리려고 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 * *
헤카톤케이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일어난 자리에서 거대한 통로의 입구가 드러났다.
몬스터는 단순히 이 방을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 방에서 이어지는 통로를 지키고 있었던 거였다.
아르실이 그냥 통과시켜달라고 쾌활하게 부탁했지만 헤카톤케이레스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정령들이 일제히 야유하자 헤카톤케이레스는 꽥 고함을 질렀다.
쿠르릉!
헤카톤케이레스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서 드러난 통로의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는 넷에게 외쳤다.
“이걸 통과해보란 게 시험입니까?”
통역을 해주던 아르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바위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마력의 흔적이 절대 평범한 바위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장품 챙겼는데 포기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동생의 속마음도 모르고 아르실은 헤카톤케이레스와 다퉜다. 아까 대화로 앙금이 좀 남은 모양이었다.
“...아니, 형님. 제가 그 정도는... 아니, 진짜 그러지 마십시오!”
이한이 당황해하며 아르실을 말리자, 요네르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형님께서 자꾸 헤카톤케이레스한테 나 정도면 눈 깜박할 사이에 해결할 수 있다고 조롱하시잖아.”
“......”
요네르는 이한이 아르실 때문에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자 안쓰러우면서도 아주 조금 신이 났다.
자기 자신도 미친 언니 때문에 이한 앞에서 망신을 당했듯이, 이한도 미친 형제로 같이 망신을 당해줬으면 좋겠다!
“...그거 정말 곤란하겠다!”
“요네르. 너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데.”
“아, 아니야. 오해야. 아까 부장품을 챙겨서 그런가?”
이한과 친구들은 머리를 맞댔다.
에인로가드에서 한두번 해본 게 아닌 만큼 서로 이런 난관을 만나는 일에 익숙했다.
가이난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넷의 힘을 모으면 그래도 에인로가드 4학년 정도의 마법은 나올 거야. 저 짜ㅈ... 아니, 저 분의 시험을 그냥 통과해버리자.”
“가이난도. 설마 지금 1학년 네 명 모았다고 4학년이란 건 아니지?”
요네르는 친척이 보여준 기적의 산술 솜씨에 경악해하며 물었다.
“응? 이한이 4학년 마법을 쓰니까 4학년 정도라고 한 건데?”
“......”
“......”
딱히 힘을 모아서 4학년이 된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이 4서클 마법을 쓰는 걸 봤었기 때문이었다.
“애들아. 4서클 마법 쓴다고 4학년 수준이 되는 건 아니야.”
“그건 알지만, 이한 네가 쓰는 4서클 마법은 선배들보다 더 대단할...”
자꾸 귀찮게 헛소리를 하는 가이난도의 입을 막고, 이한은 설명에 들어갔다.
“쟤는 선배들 마법을 못 봐서 그래. 같은 마법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르다니까.”
‘솔직히 이한은 선배들하고 붙어도 안 밀릴 거 같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요네르와 닐리아는 눈빛으로 대화했다. 이한은 그것도 모르고 바위를 움직일 방법에 열중했다.
“조종 계열 주문은? <하급 조종>만 익히긴 했지만, <중급 조종>도 이번 기회에 한 번 시도해볼 수 있긴 해.”
“중급으로도 무리일 거야. 십몇 킬로그램도 아슬아슬할 텐데.”
무속성 염동력 특화 계열의 마법, 조종 마법 시리즈는 많은 마법사들이 익히는 범용성 높은 마법이었다.
물체를 들어서 뜻대로 움직인다는 간단함이 매우 폭넓게 쓰이는 것이다.
잡일을 많이 해야 하는 조수들을 포함해 특히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법사들은 청소나 편지 같은 각종 일들에 이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주문 한 번으로 깔끔하게 치워지는 실내를 보여주는 것만큼 괜찮은 자기소개도 없었다.
가끔 피에 미친 전투 마법사들 중에 이 ‘조종’이라는 마법이 가진 빠른 시전과 범용성에 눈독 들이고 전투용으로 개량한 마법사도 있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마법사 밑에서 배우지는 않겠지만 가끔 스승만큼 이상한 제자가 나와서 배우기도 했다.
하여간 이 조종 마법 시리즈는 이런 편리함과 범용성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만큼 강한 제약이 있었다.
낮은 마력 소모, 빠른 시전, 섬세한 조종을 위해 무게 제한이 꽤 빠듯한 것이다.
당장 중급 조종도 십몇 킬로그램이 아슬아슬한데...
“다 같이 중급 조종을 익혀서 한다고 하더라도... 음. 무리겠군.”
“잠, 잠깐. 워다나즈. 난 지금 중급 조종 마법 익힐 자신 없어! 없다고!”
닐리아는 워다나즈가 자신을 너무 고평가하자 깜짝 놀라서 부정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상수로 놓고 진행하다니!
그러나 이한은 닐리아가 또 겸손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웃어넘겼다.
“무슨 소리야. 할 수 있어.”
“못 한다고...!”
“그래그래. 못 하는 걸로 하자. 어차피 조종 마법은 지금 무리니까.”
‘친구지만 때리고 싶네!’
닐리아는 순간 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워다나즈 놈 덕분에 낙제 면했지만 그래도 뒤통수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라고 중얼거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는 사람을 약 올리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또 다른 마법들은... 변환 마법, 흙 원소 마법.”
“연금술도 있긴 해. 저런 바위를 녹이는 건 별로 어려운 물약이 아니기도 하고.”
단단한 재료를 융해시켜서 써야 할 때가 많은 만큼 연금술사들은 산성이나 부식 물약을 많이 다뤘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문제지 저 정도 바위라도 구멍은 분명 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암석 모래 변환>을 배우긴 했는데.”
“어? 올해 배운 변환 마법 중에 그런 게 있었어?”
“밤에 교장 선생님하고 에인로가드 수리하느라 배웠어.”
“...?!”
“그보다 내가 걱정인 건... 아니다. 일단 해보자.”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 다가갔다.
“바위여, 모래로...”
캉!
마법사만이 들을 수 있는 충돌음을 내며 마법이 튕겨나갔다.
이한은 바위 안에 아주 강력한 마법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해골 교장한테 망신을 당한 헤카톤케이레스가 그리 쉬운 난제를 내주지는 않았을 터.
아마 이 바위는 마법이 통하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누가 만든 거지? 구조를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인데. 외부 마력을 튕겨내고 충격을 분산시키고...’
고나달테스의 제자들이 헤매는 모습을 보자 헤카톤케이레스는 여러 손을 모아 박수쳤다.
지금 고나달테스의 제자들이 헤매는 바위는 헤카톤케이레스 본인이 당했던 바위였다.
-헤카톤케이레스여! 자네들 세쌍둥이가 이 대륙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들었네. 하지만 과연 이 바위까지 부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네.
-허, 허튼 소리 하지 마라. 마법사. 이런 바위는 눈 감고도 부술 수 있다!
-그래?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보잘것없는 마법사는 자네들을 위해 백 년 간 봉사하겠네! 하지만 부수지 못한다면? 솔직히 부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부, 부수지 못한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 마법사. 하지만 부순다면, 네놈의 골통도 같이 부숴버리겠다!
-하하! 잘 결정했네!
작정하고 찾아온 마법사가 내민 속임수 바위에 걸려 헤카톤케이레스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이제 그 제자들이 끙끙 앓을 차례였다.
각종 마법을 던져보던 마법사들이 반쯤 포기했는지 바위를 붙잡고 직접 마력을 때려박기 시작했다.
그걸 본 헤카톤케이레스의 머리통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절박해도 그렇지 마법사들이 마법을 버리고 저런 무식한 방법을 선택하다니.
저런 건 헤카톤케이레스처럼 타고난 마력과 근력을 가진 괴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헤카톤케이레스 본인도 시도하다가 실패하지 않았던가.
쾅!
“된 거 같은데?”
“와. 이런 방법이 통하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