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워다나즈. 어떻게 부순 거야!?”
“후후. 내가 설치된 마법을 돌파할 때 자주 쓰는 건데, 마력을 응축시켜서 거대한 면에 투사하듯이 이렇게 때려 박으면...”
“어,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과격하다니! 닐리아.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는 거야. 이건 <발도르오른의 마력 망치>라는 고등한 마법이라고.”
“미, 미안. 몰랐어. 그렇게 고등한 마법일 줄은.”
닐리아는 친구가 정색하자 당황했다.
그렇게 대단한 마법일 줄이야!
사실 발도르오른은 이한이 이렇게 이름 붙인 것 자체를 몰랐지만...
-......
헤카톤케이레스는 믿기 힘든 표정으로 학생들이 마법 풀린 바위에 구멍을 내는 걸 지켜보았다.
만약 해골 교장이 지켜봤다면 헤카톤케이레스를 한심하게 보며 말했을 것이다.
-자기가 못 부쉈다고 다른 사람도 못 부술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백 년은 봉사해야 머리가 좋아지겠구나!
헤카톤케이레스는 분명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력과 그 마력을 육체적인 능력으로 바꾸는 권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카톤케이레스보다 뛰어난 존재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헤카톤케이레스보다 마력도 많고, 그걸 또 영리하게 쓸 줄 아는 존재가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앗. 다시 마법 튕겨낸다.”
“비켜봐. 다시 부술 테니까.”
가끔은 헤카톤케이레스보다 마력도 많고, 그걸 또 무식하게 휘두를 줄 아는 존재가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아르실은 헤카톤케이레스를 툭툭 다독이며 위로했다.
헤카톤케이레스는 빨리 사라지라고 화를 냈다.
* * *
이한을 따라 걸어가던 가이난도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저기. 정령 님. 여기 좀 더 제대로 비춰주세요. 안 보여요.”
빛의 정령은 가이난도의 부탁을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무시했다.
“...정령 님. 정령 님! 듣고 계시잖아요!”
“가이난도. 정령들은 형님 말밖에 안 들어. 나도 예전에 해봤어. 정령 님. 여기 좀 더 제대로 비춰...”
빛의 정령은 쉭 거리를 벌렸다.
이한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저렇게 도망치진 않았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냥 불 켜줄게.”
보다 못한 요네르가 유리병 하나를 공중에 던졌다. 안에 든 물약이 강하게 발광하며 길을 밝혔다.
가이난도가 그걸 보며 감탄했다.
“저렇게 보니까 연금술도 좋은 거 같다...”
“무슨 일이야, 가이난도? 너 원래 연금술 무시했었잖아.”
이한은 깜짝 놀랐다.
평소 연금술에 대한 헛소리로 요네르의 분노를 사는 게 가이난도의 취미인 줄 알았었는데?
“흑마법이랑 비교하니까 다 좋아보이더라구.”
“......”
가이난도가 풀죽어서 대답하자 이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닐리아가 뒤에서 속삭였다.
“야. 워다나즈. 흑마법도 좋다고 말해줘야지.”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딱히 좋은 점이 바로 안 떠올라서...”
쿵, 쿵, 쿵-
통로 끝을 지나자 바위 헤카톤케이레스가 침입자의 등장에 벌떡 일어났다.
가이난도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언제 달려온 거야?!”
“원래 헤카톤케이레스는 세쌍둥이잖아.”
“아. 그래?”
둘째 헤카톤케이레스는 가이난도를 경멸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법사가 저렇게 멍청하다니!
아르실은 다시 한 번 나서서 방금 무슨 일이 있었고, 첫째 헤카톤케이레스를 어떻게 설득시켰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첫째 헤카톤케이레스가 방심하다가 어떻게 파멸했는지,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정령계에 퍼질 것이라고...
“형님. 제발...”
이한은 수치심 가득한 목소리로 아르실을 말렸다.
둘째 헤카톤케이레스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요네르는 이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특이한 형제자매가 있으면 참 고생이야. 그렇지?”
“...요네르. 내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너 진짜 신난 거 아니지?”
둘째 헤카톤케이레스는 씩씩대며 거대한 바위를 갖고 왔다. 그 모습에 넷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와 다른 바위인가?”
“...느낌이 비슷한데? 같은 거 같은데?”
아르실이 대신 설명해줬다.
“아까 시험으로 지쳤을 테니까 이건 절대 못 부술 거라고요? 음...”
‘이 몬스터들은 교장 선생님 밑에서 배운 게 없나?’
이한은 의아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1년만 지나도 많은 걸 배우는데, 이 헤카톤케이레스들은 지나치게 오만했던 것이다.
마법에 절대란 건 없는데...
* * *
셋째 헤카톤케이레스는 무덤의 깊숙한 내실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분통을 터뜨렸다.
쾅쾅쾅쾅쾅!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바닥과 벽을 두드리며 외치는 모습에, 이한의 친구들은 궁금해져서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두 번 했으니까 지쳐서 세 번째는 못 부술 거라고 생각했대.”
“......”
“......”
학생들은 이 헤카톤케이레스들이 왜 해골 교장 밑에서 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헤카톤케이레스마저 굴복하자 아르실은 신이 나서 문을 열었다.
고대 지하 무덤 내실을 막고 있던 청동과 황금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암흑의 합창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주문의 이름조차 잊혀진 마법들로 짜여진 합창은 장엄하고 비장했으며 무엇보다 마법사들의 정신을 타격했다.
“어... 어어어어.”
“어어어...”
이한을 제외한 친구들은 텅 빈 광활한 내실 안에서 웅장한 환상을 목격했다.
그건 옛 왕국의 가장 번영했던 시절이었다.
하늘의 질서가 왕국을 위해 조율되고 땅의 규칙이 왕국을 위해 조정되던 시절.
이색적인 복장을 한 궁정 마법사들이 벌거벗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포효하는 왕을 찬양하고, 그 밑에 모인 사람들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축가를 불렀다.
왕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여기 남겨놓은 것이다.
아르실은 학생들이 무덤의 합창을 듣고 그 광경을 목격하는 모습에 흐뭇해했다.
이 경험은 어린 마법사들에게 커다란 보물이 되어주리라.
기록도 남지 않은 옛 왕국 시절의 풍경과 그 마법들.
마법사에게 이만한 영감도 없었다.
“어, 형님.”
이한이 아르실을 불렀다.
이한 혼자서 아무것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조금 머쓱했던 것이다.
“혹시 이 노래 들려주려고 데려오신 겁니까?”
“......”
아르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 동생한테는 고대 무덤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실은 허둥지둥 대신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떤 왕국의 무덤이었는데...
“...저 괜찮은데... 아니, 정말 괜찮습니다.”
이한은 친구들이 신난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아르실은 진심으로 분해서 밖에 있는 헤카톤케이레스한테 항의했다.
-아, 아니. 내가 만든 무덤도 아닌데 왜 나한테...
* * *
환상에서 깨어난 친구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정... 정말 대단해. 이런 모습일 줄이야!”
“맞아! 개선식 때 썼던 마법 봤어? 대체 무슨 마법이지?”
“궁전 멋지더라! 엄마한테 부탁해서 저택을 그렇게 바꿔볼까?”
재잘거리던 친구들은 이한이 가만히 있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환상 별로 재미없었어?”
“아냐. 아냐. 재밌었어. 그... 궁전 멋있더라.”
“그렇지?! 어디가 특히 좋았어?”
“반짝이던게 좋던데.”
“반짝이고 눈부셨지!”
“눈부신 것도 좋더라.”
“그치, 그치! 이한은 뭘 좀 안다니까!”
가이난도가 신나하는 동안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을 설명하는 이한의 어휘가 무슨 가이난도마냥 단순했던 것이다.
덜컥!
옆 벽면에 새겨진 부조(浮彫)에서, 갑자기 조각이 살아있는 것마냥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신이 난 가이난도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떠들었다.
“내가 저택 개조를 끝내면 꼭 와야 해. 이한.”
“알겠어. 같이 갈게.”
“...어, 요네르하고 닐리아도?”
“야.”
닐리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네 저택 가기 싫거든? 메이킨 가문 저택이 더 좋거든?”
“아, 아니. 둘이 오면 좋지... 아니야...”
속마음을 들킨 가이난도는 재빨리 닐리아를 달랬다.
닐리아, 요네르가 안 오면 이한도 왠지 안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원에 사슴 풀어놓을 테니까 와. 어때?”
“내가 사슴 풀어놓는다고 신나서 달려가는 사냥꾼으로 보여 지금?”
“사슴 안 좋아해?”
“좋아하긴 해.”
“뭔...?”
가이난도가 의아해하는 사이 이한이 재빨리 뒷덜미를 붙잡아서 당겼다.
“깩!”
“습격이다!”
이한은 그제야 드넓은 벽에서 걸어 나온 적들이 친구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닥에 넘어진 가이난도는 캑캑대며 외쳤다.
“교, 교장 선생님이야?”
“아니. 무덤의 파수꾼! 다들 움직여!”
저번에 지젤의 언니한테 어이없게 진 뒤 스스로의 안일함을 자각했던 이한이었다.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굴지 않겠다고 강하게 다짐하며, 이한은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적들이 접근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마법을!
파파파파팡!
캄캄하고 넓은 내실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한이 날린 빛의 구체들이 부조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 형체들을 강하게 비췄다.
파수꾼들의 면모를 확인한 이한은 바로 언데드들을 소환해 길을 막았다.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허공에서 던져진 뼛조각들이 마법과 얽혀 전사로 변했다.
그걸 본 가이난도는 친구를 돕기 위해 흑마법을 시전했다.
“뼈여, 갑주와 검이 되어라!”
언데드를 강화시키기 위해 뼈 원소 마법을 시전한 가이난도는 집중하다가 순간 삐끗했다.
그러자 주문이 엉켜서 뼈 스웨터와 뼈 깃발이 되어버렸다.
“...야, 너 공부 제대로 안 했지!”
“공, 공부했어! 긴장 상황이라 실수한 거야!”
닐리아의 욕을 먹어가며 가이난도는 허겁지겁 다시 주문을 준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집중한 채 빠르게 주문을 연속 시전했다.
전투 준비가 얼추 끝나자 이한은 무덤 파수꾼들을 훑어보았다.
‘암흑 원소 마법인가?’
아까 들린 합창은 생각해보니 꽤 특이한 마법이었다.
일단 노래 형태의 마법인 것이다.
해골 교장이 말했듯이, 언령이면 언령을 쓰고 아니면 아니었지 그 사이 어중간한 형태의 음악 마법은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이라 전승 자체가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런 마법의 흔적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옛 무덤인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암흑 원소, 음악, 환상. 세 학파 정도인가. 그렇다면 암흑 원소 마법은 쓰지 말고...’
지금 이한의 언데드나 가이난도의 흑마법이 좀 더 강하게 시전되는 걸 보니 암흑 원소가 충만한 건 사실 같았다.
파지지직!
이한의 지팡이가 번개가 응축된 창으로 바뀌더니 접근하는 파수꾼을 후려쳤다.
그림자가 뭉쳐진 파수꾼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가이난도, 안쪽으로 들어와!”
“교,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저기 있어! 이한!”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자꾸...”
“아, 아니야!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설인 약탈자야!”
“!”
이한은 닐리아까지 갑자기 헛것을 보자 사태가 심상찮다는 걸 깨달았다.
“요네르, 내 뒤쪽으로 피해! 환상 마법을 쓴다! 가이난도, 닐리아! 이쪽으로!”
가이난도의 망토를 잡아당기며 강하게 뺨을 때린 이한은 요네르한테 손짓했다.
요네르는 즉시 닐리아에게 물약을 먹였다. 강한 충격 물약을 마신 닐리아는 공포에서 깨어났다.
‘저런 방법이?!’
이한은 가이난도한테 살짝 미안해하며 화염을 불러왔다.
“타올라라... 아프하의 이름으로!”
신성한 백염(白焰)의 불씨가 허공에 일렁거렸다.
어쩐지 거칠게 달려들지 않는다 싶더니, 적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환상 마법 계열의 공격을 하는 놈들이었다.
‘마력 흐름을 느껴야 한다. 분명히 징조가 있을 거다!’
집중하자 주변의 마력 흐름이 더욱 더 예민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이한은 마력이 꿈틀거리며 싹트는 장소를 찾아냈다.
‘찾았다!’
화르륵!
화염이 공포를 날리려던 파수꾼을 태웠다. 그러나 파수꾼은 끝끝내 마법을 완성시켰다.
이한은 시전 되어서 날아오는 마법을 몸으로 막으며 가이난도를 밀어 넘어뜨렸다.
“피해라, 가이난도!”
“그, 그냥 맞으면 안 돼?”
옆으로 구겨진 가이난도가 가냘프게 말했다.
차라리 공포에 걸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