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다들 왜 그러시죠?”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시아나 사제. 혹시 오면서 기사들 못 봤나?”
“봤어요. 서쪽 정원을 지키고 계시던데요? 골렘이 말썽이라고 하시던데...”
“아직도? 아. 하여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이제 저택에서 인사할 사람들의 전부야.”
“......”
“......”
시아나와 더르규는 침묵했다.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
이한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아르실을 붙잡아 둘 거 그랬나?
하지만 그랬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 같았다. 한 명 추가된다고 사람이 북적거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농담 아니야. 거기 계신 분들이 전부거든.”
“우리도 계속 여기 있었어.”
“...저, 저택 주변에 있는 마을 방문은요?”
“시아나 사제가 오면서 들린 우담화 마을이 마지막 마을이었는데.”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시아나가 뭐라고 말할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손뼉을 쳤다.
“마을이 없을 수도 있죠!”
“없으면 이상한 건 맞지...”
옆에서 가이난도가 말하자 시아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럼 가이난도 님은 집에 가세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이상하단... 아냐. 이상하지도 않아. 난 불만 없어.”
혼자 쫓겨날까봐 가이난도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그래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지?”
이한은 친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물론 영지 내 마을이 없고 저택 내 사람이 적긴 했지만, 이한에게는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제국에 있는 수많은 가문들 중 워다나즈 가문보다 이상한 가문이 몇 개 정도는 더 있지 않을까?
“...맞아! 안 이상해!”
“이럴 수도 있지. 제국의 미덕은 문화와 풍습이 다른 가문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친구들의 반응에 이한은 안심했다.
이걸 보니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그래도 바로 출발하는 건 조금 그러니까 며칠 정도 있다가 가자고.”
시아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럼 여러분들은 여기서 뭐 하고 지내셨죠?”
“마법 공부.”
“약초 채집.”
“유적 탐사.”
“...그냥 내일 출발할까요?”
* * *
사흘 후, 이한과 친구들은 알시클의 인도 하에 마차를 타고 영지를 떠났다.
사실 목적지를 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견이 있었다.
-일레이나스 시는 어떠냐? 제국 서쪽 바다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야. 풍경이 아름답고 기후도 따뜻해서 귀족들도 주로 오지.
-어, 펭에린 님. 제 기억이 맞으면 거긴 마법학교 발드로가드 옆의 도시 아닙니까?
-맞지?
-우우우! 발드로가드!
-발드로가드 놈들이 우글거릴 텐데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있나?
-다른 건 몰라도 굳이 발드로가드 학생 분들은...
-......
별 생각 없이 추천했던 펭에린은 학생들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했다.
-어째서? 너희들은 발드로가드 학생들하고 아직 싸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냥 싫어요!
-......
놀랍게도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아무 이유 없이 발드로가드 학생들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자신들은 해골 교장의 공격을 받아가며 딱딱하게 굳은 빵을 씹어 삼키는데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우아하게 코스 요리를 즐겨가며 주말에 제국 서부 해안으로 나들이를 가기 때문이었다.
-그랑덴 시는 어때?
-우우! 에인로가드 근처는 싫다!
-이한. 그랑덴 시가 일하기 좋은 건 알겠지만, 굳이 겨울 방학 때 에인로가드에 가까운 도시를 갈 이유는 없을 것 같아.
-나도 동의한다. 이한. 더 크고 번영한 도시들도 많으니.
이스란 시(작년에 방문한 남부 해안도시로 요네르가 다시 가고 싶어했다), 샹트마 시(제국 서부 교통의 요지라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도시로 시아나가 방문하고 싶어했다), 제국 수도(닐리아가 황궁을 구경하고 싶어했지만 이한이 말렸다) 등 여러 선택지들이 나왔지만 결국 제비뽑기에서 뽑힌 건 플라허 시였다.
눈부시게 번영한 제국 중부의 상업도시이자 가이난도의 본가 저택이 있는 도시!
“와! 애들아! 여기 길을 봐! 다른 지역과 달리 플라허 시의 가도는 흑령석을 사용했어! 덕분에 마차가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게 오갈 수 있지!”
가이난도가 호들갑을 떨며 마차 밖을 가리키자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여기 워다나즈 가문 마차에 이미 충격 흡수 마법이...”
“다른 지역과 달리 플라허 시의 도로수(道路樹)에는 빛 정령들과 계약을 해놨어. 저녁에도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이한. 대단하지 않아?”
“...그, 그래. 대단한데.”
다른 친구들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괜히 가이난도와 눈이 마주쳤다가는 흥분한 황자의 제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한. 저기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을 봐! 저건 음유시인 파파르야! 플라허 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이지!”
‘그건 또 누구야?’
제국에서 손꼽히는 음유시인 이파두르도 헷갈리는 이한에게 도시 음유시인은 기억하기 힘든 상대였다.
“저건 ■■■ 가문의 ■■고, 저건 ■■ 길드의 ■■고, 저건 ■■고...”
이한은 친구가 정신 마법을 쓰나 싶을 정도로 귀에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음을 느꼈다.
“저건 뭐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무거나 가리키며 손을 뻗자, 그 끝에는 어디서 본 것 같은 깃발 문양이 있었다.
옆에서 <음악 마법, 가능성 있는 미래인가 아니면 허튼 소리인가?> 책을 읽고 있던 알시클이 입을 열었다.
“저건 발드로가드 깃발이군.”
“......”
“...어, 왜요?!”
“뭘 왜야? 발드로가드 학생들도 겨울 방학까지 일레이나스 시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겠지. 플라허 시 같은 대도시에 휴가를 보내러 오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
가이난도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은 대번에 비난을 쏟아냈다.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우리를 데리고 오다니!”
“어쩐지 수상했어, 이 첩자 자식!”
“가이난도 님은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오세요!”
“다, 다들. 황자도 좋은 뜻으로...”
친구들이 욕을 하는 사이 이한은 발드로가드 깃발이 걸린 마차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확실히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문화가 좀 다르군.’
이한은 학교 밖에서 방학을 보낼 때에는 에인로가드 깃발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창피한 걸 떠나서 괜히 시비 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참으로 사랑하는지, 마차에도 깃발을 걸고 마차 벽에도 문양을 새기고 심지어 문양 새긴 교복과 외투까지(에인로가드의 거친 누더기 교복이 아닌, 제국 남부의 최고급 벨벳으로 만든 교복이었다) 걸치고 있었다.
이한은 딱히 발드로가드 학생들에게 원한은 없었다.
재수 없게 에인로가드에 끌려간 이한 잘못이지 발드로가드 학생들의 잘못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밝게 웃으면서 점잔을 빼는 발드로가드 학생들을 보자 괜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내가 이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었나?’
“이번에 토스레 교수가 외부 마탑하고 같이 연구를 진행해보라고 하던데, 깜짝 놀랐지 뭔가. 무려 그쪽 마법사가 노예 출신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예 출신과 같이 마법 연구를 하라니. 내 가문의 명예와 체면은 생각도 안 하는 제안이지!”
“너무하는군! 토스레 교수가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했네.”
“잘했네. 잘했어! 참. 이번 격구 경기 표는 구했나? 이번 경기는 정말 대단한 경기일세. 절대 놓치면 안 돼! 록 드레이크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걱정하지 말게. 벌써 구했으니까.”
“어엇! 어떻게 이렇게 빨리 구했나?”
“가문에서 받은 지원금을 좀 꺼내서 썼네.”
“하하하! 자네도 참! 올해 연구는 그러면 뭘로 하려고?”
“금화가 있어야 연구를 한다는 자들은 무능력한 마법사들이지! 나는 금화가 없어도 연구를 할 수 있네. 무엇보다 친구와 같이 격구 경기를 보는 기회를 놓친다면 내가 어디에서 영감을 얻겠는가?”
“맞는 말이야, 맞는 말! 마법이 중요한가? 인생이 중요하지!”
발드로가드 마법사들은 웃으며 떠나버렸다.
이한은 조용히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가이난도는 친구들한테 공격당한 게 억울했는지 이한에게 일러바쳤다.
“이한. 이한! 도시에 발드로가드 학생들 좀 나올 수도 있지 그걸 갖고...”
“야.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시비걸면 바로 받아쳐라. 절대 물러서지 마.”
“...?!!”
활활 타오르는 이한의 눈동자를 본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 * *
가이난도의 본가는 크라하 가문으로, 대도시인 플라허 시에서도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만큼 친구들이 가이난도의 저택에 머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들아. 잘 들어. 내일 일어나면 일단 제 3 마법사 카드실에서 마법사 카드 게임을 하고, 제 2 연극 관람실에서 연극을 보고, 제 1 연주실에서 연주를 듣고, 그 다음은 이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다음에 나하고 같이 나가서...”
“......”
“...메이킨 님. 혹시 메이킨 가문의 저택에 머물러도 될까요?”
“아, 안 돼! 안 돼!”
친구들이 시작부터 단체로 이탈하려고 하자 가이난도는 온몸을 던져 막았다.
“뭐가 불만인데!”
“미친듯이 꽉 찼잖아...”
닐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도 저렇게 혹독하게 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알겠어. 알겠어! 마법사 카드 게임은 빼줄게. 그러면 됐어?!”
가이난도는 자신이 정말 양보해준다는 듯이 외쳤다.
물론 친구들은 넘어가지 않았다.
“메이킨 님.”
“그, 그럼 이한만 빼고 나머지는 가도 돼.”
그 말에 이한은 정색했다.
친구들도 없이 이한 혼자서 저 스케줄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깐, 다들 진정해.”
요네르가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가이난도가 저 말대로 놀지는 못할 테니까.”
“놀 건데?! 네가 뭔데!”
가이난도는 발끈했다.
이 완벽한 계획을 징벌방에서부터 꿈꿔왔었는데 무례한 친척이 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환상 마법사가 와서 숨겨진 보물을 찾는 놀이도 할 거야!”
‘나한텐 안 통하는 거 아닌가?’
이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요네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좋을 텐데.”
“안 멈춰. 설령 교장 선생님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닐리아는 중얼거렸다.
“학교에 있을 때 저런 용기를 보여주지...”
“그럼 어쩔 수 없고.”
요네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가이난도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뭐지?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자, 베일을 두른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저번처럼 찬란한 빛으로 주변을 휩쓸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들 정말 반갑습니다. 가이난도가 친구들과 함께 저택에 온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요... 다 친구들이 맞습니까?”
가이난도의 어머니는 요네르에게 속삭였다.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들은 좀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면 다 친구는 맞는 것 같았다.
그 대답에 가이난도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를 사귀어 온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가지각색의 친구들을 데리고 오다니.
혹시 가이난도가 어머니도 모르는 능력을 각성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참. 크라하 님. 가이난도가요.”
요네르는 아까 가이난도의 사악한 계획을 그대로 고발했다.
가이난도의 어머니는 가이난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베일 너머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에 가이난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 뭐 때문에 그러시나요?”
딱!
가문의 하인들이 나오더니 가이난도의 양팔을 붙잡았다. 가이난도는 비참한 운명을 직감하고 이한을 불렀다.
“이한! 이한! 여기 악당들이 날 끌고 가려고 하고 있어!”
“저택에 온 걸 환영합니다. 다들 잘 지내면 좋겠네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라하 님.”
“배신자들! 이 배신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