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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654화 (654/687)

654화

“이쪽으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크라하 가문의 저택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은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도착하자 하인들을 불렀다.

드넓은 저택 부지에 학생들은 새삼 감탄했다. 역사 깊은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크라하 가문처럼 부유한 가문은 많지 않았다.

“크라하 가문은 정말 대단해. 발드로가드에 크라하 가문 출신이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 동감이야.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마법사가 하나 있는데, 에인로가드에 들어갔다고 들었어.”

“아. 황자님을 말하는 거구나.”

“흥. 난 황족들을 좋아하지 않아. 숫자만 많은 주제에 콧대가 지나치게 높다고.”

“말 조심해, 바시우! 황족들은 위대한 황제 폐하의 핏줄을 이은 사람들이야. 이들은 존경 받을 자격이 있어.”

제국의 귀족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황족 중 뛰어난 이들을 차기 황제로 믿고 지지하는 충성파.

다른 하나는 황족을 믿고 지지하는 대신 귀족들끼리 연합을 주장하는 귀족파.

마지막 하나는 둘 다 관심 없는 중립파. 워다나즈 가문 같은 가문들이 대표적인 중립파였다.

잉센은 충성파 가문 출신이었고 바시우는 귀족파 가문 출신인 만큼, 둘의 우정이 친밀하다 하더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서로 타협할 수가 없었다.

“잉센. 네 명예를 존중하는 만큼 방금 말은 취소하겠어. 몇몇 황족들은 분명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 하지만 다른 황족들은?”

“모든 황족들이 다 뛰어나다고 하진 않겠어! 하지만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들은 몇몇 되지 않아. 그들이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는 거지! 크라하 가문의 황자는 분명 존경 받을 사람일 거라고.”

“흥. 발드로가드 학생이면 모를까, 에인로가드 학생인 이상 인정하지 않을 거야. 비열하고 배배 꼬인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고.”

“아니야. 크라하 가문 출신인 만큼, 에인로가드의 선배들이 비열하고 천박해도 쉽게 물들지 않을걸.”

잉센은 크라하 가문의 이름을 믿었다.

크라하 가문의 피를 이은 황자라면 분명 충성파 가문의 믿음을 살 자격을 갖고 있으리라.

“아, 더럽게 없어!”

“?”

“차라리 안이 나았지. 거긴 썩은 흙 투성이었는데... 헉. 내가 무슨 소리를! 이 미친 입, 이 미친 입!”

밝은 금발을 갖고 있는 소년이 허름한 복장으로 호미와 흙삽을 든 채 그늘진 곳의 땅들을 헤집고 있었다.

둘은 그걸 보자 흥미가 생겨 말 위에서 내린 뒤 다가갔다.

“바시우. 저게 뭐하고 있는 것 같아?”

“글쎄. 복장을 보니까 저택의 하인 같은데... 썩은 흙을 파내는 건가?”

“혹시 마법 시약 아닌가?”

“썩은 흙을 쓰는 마법이 있어?”

발드로가드에서는 흑마법을 다루지 않았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썩은 흙을 시약으로 쓰는 마법이 있나 의아해했다.

“제국에는 온갖 이상한 마법들 투성이니... 있을지도 모르지.”

“바시우. 도와주자.”

잉센은 지팡이를 붙잡고 말했다. 바시우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하인의 일을 도와주자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귀족이 하인의 일을 도와주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기 하인들도 능력이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방문한 귀족이 천한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하지만 네 생각과 다른 건, 바로 마법으로 도와줄 거란 거지.”

“잉센, 언제나 네 지혜에는 감탄할 뿐이야!”

바시우는 친구의 지혜에 감탄했다.

귀족이 길을 가다가 하인과 같이 쭈그리고 앉아 흙을 캐면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마법으로 흙을 캐는 걸 도와주면 멋진 자비였다.

도움을 받은 하인이 저택에 얼마나 소문을 내주겠는가?

“이봐, 거기!”

잉센은 하인 소년을 불렀다. 가이난도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흙을 파내야 하는 것 같은데 도와주록 하지. 자. 비켜봐라!”

“뭔...?”

“모여라, 흙이여. 모여라, 흙이여. 모여라, 흙이여...”

잉센은 주문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했다.

느릿한 주문 시전 속도에 상대가 뭘 하는지 모르고 눈을 끔뻑거리던 가이난도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 지금 설마...”

“...모여라!”

푸드득!

주문과 함께 가이난도가 파던 지하 흙이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충분한 양의 썩은 흙이었다.

잉센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네가 충분히 챙길 만한 양이 될 거다.”

“...뭔 헛소리야! 이 자식아!”

가이난도는 분노해서 소리쳤다.

“?!”

잉센과 바시우는 충격을 받아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님으로 방문한 저택의 하인한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감, 감,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뭘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백 번이고 할 수 있어! 이 멍텅구리들! 이 징벌방에 보낼 가치도 없는 구더기들!”

가이난도는 발을 쾅쾅 구르며 억울해했다.

모르툼 교수에게서 배운 욕설들이 튀어나오자 두 귀족 소년들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네... 네가 감히, 네 일을 도와준 우리한테 이런 모욕을...”

“도와주긴 뭘 도와줘! 누가 흙 못 파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모여라, 흙이여!”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자 바로 옆에서 흙이 솟구쳤다.

둘은 너무나도 놀라서 말도 하지 못했다.

하인이 욕을 한 것보다 더 놀라웠다.

하인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니.

그것도 둘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이깟 쉬운 주문 갖고! 너희들 진짜 바보야? 이 흙은 마법이 닿으면 효과가 줄어든다고! 여기 묘철(墓鐵)로 된 장비로 캐내야 그 효과가 유지된단 말이야!”

“그... 그런...”

“몰, 몰랐어. 우린.”

“모르면 마법 끝나냐! 어쩔 거냐고! 안 그래도 썩은 흙 찾기 힘들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가이난도는 방방 뛰었다.

흑마법 시약을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웬 지나가는 미친 놈들 때문에 다 허사가 되다니.

이대로 돌아가면 이한이 ‘너 혹시 놀다 온 거 아니야?’하고 의심할지도 몰랐다.

“따라와! 너희가 해명해!”

“우, 우린 이만 가봐야 해.”

“가자!”

둘은 허둥지둥 달려서 말 위로 도망갔다.

저 따라오라고 하는 마법사 소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어디 가?! 당장 내려! 돌아와!”

“우, 우린 손님이야! 우릴 공격하지 마!”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가이난도는 기가 막혔지만 등짝에 저주를 날리진 않았다.

그래도 나름 가문의 손님이라는데 공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잡히기만 해봐라! 잡히기만 해봐! 흙구덩이에 거꾸로 묻어버릴 거야!”

“빨, 빨리! 빨리 몰아!”

“하인이 아니었어. 가문 마법사가 분명해!”

둘은 말을 타고 후다닥 도망가면서 깨달았다.

저 소년은 하인이 아니라 크라하 가문에 소속된 마법사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괴팍한 반응이 설명되지 않았다.

제국의 마법사들만큼 권위와 질서를 무시하고 괴팍하게 구는 자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려 보이는데 가문 마법사 맞아?”

“나이를 속이는 비약을 마시고 있었던 거겠지!”

“마법사들이란 정말 괴팍한 자들밖에 없다니까. 그런 점에서 발드로가드는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         *

“그러니까 웬 낯선 손님들이 기껏 찾은 썩은 흙에 마법을 걸고 튀어서 다 날아갔다고?”

“응.”

“......”

친구들은 묘한 눈빛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에안두르데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아니야! 너, 너 후배 주제에 선배를 의심해?! 못 믿겠으면 따라와! 보여줄 테니까!”

“진정해. 가이난도.”

이한은 가이난도를 달랬다.

사실 가이난도의 말을 크게 믿지는 않았다. 비슷한 거짓말을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한.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이 내 숙제를 훔쳐갔어.

-이한.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이 내 마도서를 씹어 먹었어.

-이한. 교장 선생님의...

-야. 작작해라.

이런 거짓말들은 에인로가드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기에 더더욱 효과적이었다.

거짓말의 진위와는 별개로 이한은 일단 지금 필요한 물건을 꺼냈다.

“여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어?! 갖고 있었어?!”

“나도 흑마법을 할 줄 아니까 시약은 갖고 다니지.”

이한은 시약 주머니에서 썩은 흙이 담긴 병을 꺼내 가이난도에게 내밀었다.

“받아. 꽤 품질 좋은 흙이니까 흑마법을 시전하기에는 충분할 거야.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시약은 갖고 있어야지.”

“이한...!”

가이난도는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요네르는 그 흙을 보고 의아해했다.

‘어디서 구한 거지?’

에인로가드야 흑마법 학파 학생들이 따로 마탑을 만들고 근처에 거주하니 구하기 쉽다지만 밖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구했어?”

“모라디 가문 영지 들렸을 때 남는 시간에 챙겼는데.”

“......”

다른 가문 저택 방문해서 남는 시간에 썩은 흙을 챙긴 이한의 철두철미함에 요네르는 경악했다.

‘모라디한테는 비밀로 해야겠다...’

지젤이 안다면 ‘남의 가문 방문해놓고 남는 시간에 썩은 흙 캐는 사람이 어디 있냐’하면서 분노할 일이었다.

“가이난도.”

“어?”

“난 널 믿는다.”

“...이한!”

가이난도는 울컥했다.

못돼먹은 친구들은, 아니, 친구들도 아니었다.

못돼먹은 에인로가드 동급생들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이한은 달랐던 것이다.

“네가 진짜 친구야!”

“그래그래. 하여간 믿으니까, 발드로가드 학생들한테 절대 지지 마라.”

“......”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가이난도는 감동을 멈추고 눈치를 봤다.

이한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진지했다.

“...어, 그, 마법이란 게, 잘하는 분야가 있고 서투른 분야가 있잖아.”

“그렇지.”

“그럼 운이 나쁘면 내가 발드로가드 학생들한테 질 수도 있지 않나...?”

“그렇지. 그런데 지지 말라고.”

“......”

가이난도는 친구들한테 도와달라고 시선을 보냈지만 친구들은 슬쩍 눈을 피했다.

그들도 지금 이한이 무서웠던 것이다.

“가이난도. 네 약점이 있다면, 네가 먼저 상대의 약점을 찌르면 되잖아. 하여간 지지 마라. 지면... 아니다. 굳이 먼저 알 필요 없지.”

“이한...!”

가이난도는 갑자기 에인로가드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여러분. 발드로가드 학생분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을 뵙고 싶어 하시는데, 어떻게 대답을 전달할까요?”

“왔군.”

이한의 말에 친구들은 괜히 긴장했다.

어지간해서는 발드로가드 학생들한테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지면...

‘가이난도하고 같이 죽을지도 모르겠군.’

‘가이난도 님하고 같이 죽을지도...’

‘가이난도하고 같이 죽기 싫은데!’

“들어오라고 하도록. 어차피 저택 안에서 머물면 만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         *         *

“여긴 메이킨 가문의 요네르 님이십니다. 여긴...”

귀족들끼리 만날 때는 보통 하인들이 서로 가문과 이름을 소개해줬다.

먼저 소개를 끝낸 잉센과 바시우는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소개를 차례대로 들으며 집중했다.

“...여긴 크라하 가문과 황실의 핏줄을 이은 가이난도 님.”

“컥.”

“크헉.”

“너... 너희들은...!”

둘은 물론이고 가이난도까지 경악했다.

가이난도는 ‘흙 파괴꾼들!’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한이 노려보는 탓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대, 대체?’

‘가문 마법사가 아니었나...?’

둘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애썼지만, 그래봤자 더 헝클어지는 기분만 들었다.

“여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5... 5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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