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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화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왔다면서?”
마침 알시클이 정어리를 우물거리며 응접실 건물로 들어왔다.
“갔습니다.”
“벌써?”
알시클은 의아해했다.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 있는 걸 알면서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건 꽤나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약 주머니도 두고 갔네요.”
“내가 가져다줘야겠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시클은 두 발드로가드 학생의 목숨을 구했다.
훗날 익명의 두 가문이 알시클에게 막대한 연구 지원을 해줄 만큼의 선행이었다.
“혹시 너희들, 괴롭힌 건 아니겠지?”
“그쪽이 마법 보여주겠다고 해서 마법 조금 보고, 저희도 답례로 마법 보여줬을 뿐인데요.”
“아차...”
알시클은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럼 당연히 기가 죽겠지.”
“예? 뭔 마법을 보여줬다고 기가 죽습니까?”
이한은 어이없어했지만 친구들은 살짝 공감했다.
작년 신입생 중 ‘나 정도면 재능 있을지도?’하는 학생들의 자존감을 학기 초반부터 박살내고 다니던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가 한 명 앞에 있지 않은가.
“발드로가드 애들이 마법 실력이 썩 좋지 못해. 아무래도 취미로 하는 놈들이 많다 보니까.”
“발드로가드는 제국의 마법학교들 중에서 에인로가드와 같이 손꼽히는 쌍두마차 아닌가요?”
시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알시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온 놈들도 그랬고, 가끔 들리는 소문 중에 ‘발드로가드는 에인로가드와 함께 손꼽히는, 제국 마법학교의 쌍두마차다!’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건 발드로가드 학생들이 퍼뜨린 소문인데?”
“......”
“......”
이한과 친구들은 경악했다.
제국의 소문이란 건 정말로 믿을 게 안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다른 마법학교들도 다 자기네들이 에인로가드와 같이 손꼽히는 쌍두마차라고 해. 발드로가드 학생들 중에 신분이 높은 애들이 많아서 유독 잘 퍼지는 거고.”
“아니 이런 비열한 놈들!”
가이난도는 펄펄 뛰었다.
마법은 안 하고 저런 비열한 수법으로 명성을 퍼뜨리다니!
“저래도 됩니까?”
“안 되긴 해. 너희들한테는 모욕적인 일이지. 고나달테스 님도 되게 싫어하시고.”
“확실히 교장 선생님은 싫어하실 거 같습니다.”
“응. 저번에 칼라로가드 졸업생이 고나달테스 님 앞에서 술 취해가지고 쌍두마차 이야기했다가 무덤 아래로 생매장 당했지. 너희들도 고나달테스 님 앞에서는 말조심해라.”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과격한 이야기에 학생들은 못 들은 척했다.
이한은 발드로가드에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그런데 알시클 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법학교인데 취미로 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시험?”
알시클은 날개를 퍼덕이며 의아해했다.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시험?”
“발드로가드 내부의 시험 말입니다.”
“아. 발드로가드는 시험 안 봐.”
충격적인 말에 주변이 조용해지고 공기가 싸늘해졌다.
알시클은 몰랐지만 학생들은 전부 다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품위 있는 귀족들을 멋대로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학교 내부 규칙이라서.”
“미... 미친 새끼들!”
“시아나 님...”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어떻게?”
“황제 폐하한테 투서를 보내! 이 개자식들!”
“아예 가서 불을 질러버리자!”
“...그, 그렇게 화낼 일인가?”
알시클은 생각보다 너무 격렬한 반응에 당황했다.
발드로가드가 시험 안 보는 게 에인로가드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학생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가이난도는 발을 구르고 마도서를 위로 집어던지다가 이한한테 한 대 맞았다.
이한은 친구들을 말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거기 학생 중에 자기 실력이 손에 꼽힌다고 말하는 학생이 있던데, 시험이 없다면 그냥 자기들끼리 판단하는 겁니까?”
“어... 발드로가드 교수들은 학생들이 자기 실력 물어보면 다 손에 꼽힌다고 해줄 거야.”
“......”
“발, 발드로가드 갈 거 그랬나?”
가이난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배신자를 발견한 친구들은 성난 목소리로 매도했다.
“이한! 가이난도가 발드로가드 가고 싶대!”
“이 배신자! 어쩐지 초대했을 때부터 수상했어!”
“아,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알시클은 너무 발드로가드 욕만 한 것 같아서 헛기침을 했다.
“발드로가드의 가르침이 조금... 느슨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조금이요?”
“혹시 조금 뜻을 모르시는...?”
학생들의 성난 반응에 알시클은 귀를 닫고 못 들은 척 했다.
“하지만 발드로가드에서도 뛰어난 마법사는 나온다. 저학년 학생들이야 자기 부족한 걸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슬 자기들이 부족하단 걸 눈치채는 녀석들이 나오거든.”
학년이 올라가고 자기들의 마법 실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중요한 건 마법이 아니라 고귀한 혈통이다’라고 정신승리를 하며 사교 활동을 즐기러 가는 부류.
다른 하나는 마법이란 학문에 뒤늦게라도 정진하는 부류.
그리고 보통 후자가 훨씬 적었다.
‘이건 말해주지 말아야지.’
알시클은 후자가 훨씬 적다는 사실은 양심적으로 숨기려고 했다.
너무 발드로가드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만 해준 것 같았다.
“나오는 거 맞아?”
“한 학년에 한 명쯤 나오는 거 아닌가?”
“......”
눈치 빠른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모습에 알시클은 화제를 돌렸다.
“무슨 마법을 보여줬지? 혹시 워다나즈 네가 마법을 보여준 건 아니지?”
“전 안 보여줬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보여줬어요.”
“휴. 다행이다.”
알시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한이 직접 마법을 준비해서 보여줬다면 발드로가드 학생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럼 걔네들도 괜찮을 거야.”
“그럴 겁니다.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꽤 많이 나눴으니, 돌아가서라도 마법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군요.”
친구들은 복잡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차라리 이한이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
* * *
발드로가드 학생들의 방문이 끝나고(이상하게도 발드로가드 학생들은 그 이후에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이한은 크라하 부인의 부름을 받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크라하 님.”
크라하 부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쥘부채를 접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택에 방문한 학생들이 정말 다 가이난도의 친구인가요?”
“...예.”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그걸 상대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조금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 그렇군요.”
“오늘은 무얼 할 계획이신지 궁금한데요. 외출할 곳을 정하지 않았다면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아. 오늘은 갈 곳이 있습니다. 후배하고 상점가를 돌려고요.”
이한은 친구들과 같이 에안두르데를 데리고 상점가를 돌 생각이었다.
에안두르데의 짐이 워낙 없어서 이것저것 필요한 걸 챙겨주고 싶었다.
워낙 번화한 상업도시인 만큼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여러 물건들을 살 수 있으리라.
“후배? 제가 알기로 에인로가드의 후배는 지금 만날 수 없을 텐데요...”
크라하 부인은 베일 너머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이한은 이번 겨울방학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까지 간단하게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
크라하 부인은 깜짝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저렇게 다른 사람을 잘 돌봐주다니!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혹시 워다나즈 군은 안타까워 보이는 사람을 돌봐주는 취미가 있습니까?!”
“예? 아닌데요.”
“가이난도도 그렇고...”
“......”
상대의 말에 이한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 후배는 재산이 없을 텐데, 물건값은 어떻게 지불할 생각이죠?”
“일단 제가 지불할 생각입니다만.”
제국의 부자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이한 기준에서 이한 본인은 제법 재산을 모은 상태였다.
작년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아무나 제국 금화를 백 닢 넘게 모으진 못했다.
그런 만큼 후배한테 이 정도는 써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안 됩니다.”
“네?”
“크라하 가문이 지불하겠어요. 저택에 온 손님한테 이런 것도 못 해줄 수는 없지요.”
“어, 정말 괜찮습니다. 학교로 돌아가면 교장 선생님한테 청구할 생각이었습니다.”
“......”
크라하 부인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제 곧 2학년이 될 소년이 해골 교장한테 청구서를 내밀러 가겠다니.
배짱도 배짱이었지만 친분이 없다면 불가능한 짓이었다.
“...진짜 안타까워 보이는 사람을 돌봐주는 취미가 없는 게 맞겠지요?”
“아니, 대체 왜 그런 오해를?”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제가 워다나즈 군에게 금화를 선물하겠어요. 워다나즈 군은 후배를 위해 사용해주세요. 자기 돈을 사용했으니, 교장 선생님한테 청구서를 제출해도 되겠지요.”
“세상에! 그런 좋은 방법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
상대가 예의상 거절하면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던 크라하 부인은 즉시 수락하는 이한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교장 선생님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셔도 되겠습니까? 금화를 너무 낭비하시는 것 아닐까 걱정됩니다만...”
“괜찮습니다. 아낄 곳이 있거든요.”
* * *
“어머니가 용돈을 끊었어!”
가이난도는 울상이 되어서 친구들 사이를 걸어갔다.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그러게 늦잠 좀 작작 주무셨어야죠.”
“가이난도. 네가 기사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일찍 일어나는 건...”
“아, 그런 거 아니라고! 다 너희들 때문이라고!”
“???”
갑작스러운 누명에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우리가 뭘 했다고??
닐리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혹, 혹시 쿠키를 너무 많이 먹어서 화나셨대?”
“너희들 대부분이 방학에도 용돈 안 받고 스스로 일해서 번다니까, 친구들 따라다니면서 배우라고 하시잖아!”
“......”
이한은 크라하 부인께 받은 주머니를 슬며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에 새겨진 가문 문양을 보면 가이난도가 진실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가이난도. 저기 솜사탕 사줄 테니까 기분 풀어라.”
“이... 이한...!”
이한의 말에 가이난도는 감동하려다가 멈칫했다.
“저거 먹으면 그만큼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그냥 사주는 거야.”
“이한...!”
가이난도는 울상을 풀었다.
그래도 진짜 친구가 한 명은 있었던 것이다.
“에안두르데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지?”
“일단 옷을 좀 더 살까? 저택에서 받은 옷들은 다 너무 움직이기 불편한 예복이라... 편한 옷들이 필요할 거 같아.”
옷 이야기가 나오자 에안두르데는 드레스가 싫다고 발버둥쳤다. 이한은 후배를 달래며 말했다.
“아냐. 아냐. 옷 사러 가는 거 아니야. 무기 사러 가는 거야.”
“...무기는 좋슴니다...”
이한은 눈짓했다. 후배가 깨닫기 전에 옷 가게로 끌고 가자는 신호였다.
“연금술용 소형 솥이나 막자사발도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건 왜?”
“방학 때 나와서 연금술로 돈 벌 수도 있잖아.”
‘연금술을 안 배울 수도 있지 않나...?’
요네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네르도 후배를 위한 연금술 도구를 골라주는 건 매우 즐거웠던 것이다.
“저도 추천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자물쇠 해제용 도구...”
“음. 나는 그럼 쓸만한 방어구를 추천하고 싶군.”
“마법사 카드! 마법사 카드도 필요해!”
에안두르데를 빼면 모두가 즐거운 쇼핑이었다. 이한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돌...”
걸어가려는 이한의 앞쪽 길 끝에, 낯익은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건 볼라디 교수였다.
“...오늘은 저택으로 돌아가고, 내일 돌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