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이한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나보군.”
“?”
교수의 말에 이한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배그렉 교수 강의가 적성에 맞는 사람도 있나?’
아무리 제국이 넓다지만 어느 누구도 볼라디 교수 강의가 적성에 맞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적성 말씀이십니까?”
“후배가 병약해서 말리는 것 아닌가? 잘 생각했군.”
볼라디 교수는 이한을 칭찬했다.
에인로가드의 강의는 가혹한 면이 있어서 준비되지 않거나 자질이 없는 학생들을 밀어내고 떨어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볼라디 교수가 생각하기에 본인의 강의도 그런 계열에 들어갔다. 꽤 오랫동안 제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이한이 후배를 세심하게 확인해서 강의에 데리고 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벌써 선배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강의에 새로 들어오려는 학생들은 네게 맡기겠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돌려보내도록.”
“...아니...”
이한은 너무 터무니없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반응이 늦었다.
‘사람 가릴 때가 아니신 것 같은데.’
지금 사실상 볼라디 교수의 전투마법이론 학파(이걸 학파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에서 배우고 있는 사람이 이한 한 명 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후배들 상대로 교육 커리큘럼을 바꾸고, 겸사겸사 이한도 좀 살살 공격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올해에는 또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긍정적인 부분은 학생 한 명만 데리고 와도 숫자가 100% 늘었다고 사기칠 수 있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지금 돌려보낼 때가 아니신 것 같...”
“그르릉!”
“...넌 또 대체 왜 그러니?”
이한은 옆의 후배가 발끈해서 그르릉 소리를 내자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한탄했다.
교수 한 명으로도 속을 썩이는데 후배까지 속을 썩이다니!
“약하지 않다!”
에안두르데는 볼라디 교수에게 사납게 외쳤다. 방금 병약하다고 한 말이 자존심을 긁은 모양이었다.
씩씩대던 고르곤 혼혈 후배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마치 편을 들어달라는 눈빛 같았다.
그러나 이한은 냉정했다.
“후배. 넌 약하다.”
“?!”
“약하니까 빨리 사과드려. 자.”
이한은 진심으로 후배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에안두르데가 사실 강인하고 투기장 싸움의 달인이라는 걸 증명해봤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볼라디 교수의 강의 수강 학생이 100% 증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교수를 제외한 모든 관계자들이 불행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철없는 후배는 이한의 배려도 모르고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안 약함니다!”
“야...”
“증명!”
“야!”
이한은 깜짝 놀랐다.
에안두르데가 볼라디 교수한테 덤벼든 것이다!
‘내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해골 교장한테 덤벼들지 말라고 했을 때 볼라디 교수한테도 덤벼들지 말라고 단단히 못박아놨어야 했는데!
에안두르데는 장난감 가게의 복도를 박차며 자세를 낮췄다.
마법사 같은 원거리 공격에 능한 상대라면 표면적을 줄이고 조준을 어렵게 만들어야 했다.
동시에 망토가 허공을 날았다. 단순하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효과적으로 시야를 막을 수 있었다.
볼라디 교수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장난감 가게 안의 공간이 확장됐다.
좁은 복도의 폭이 옆으로 길어지더니 넓은 공간 위에 에안두르데 혼자 서있는 꼴이 되자, 지형지물을 이용하려고 했던 에안두르데는 당황했다.
그래도 에안두르데는 멈추지 않았다. 망토로 가려진 시야의 사각으로 파고들며 교수를 공격하려고 했다.
“난 강ㅎ...!”
순간 에안두르데가 옆으로 튕겨서 날아갔다. 무형의 염동력이 마치 거대한 손바닥처럼 날아와 에안두르데를 후려갈긴 것이다.
이제까지 만나봤던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시전 속도에 에안두르데는 자기가 뭘 당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후배, 숙련된 전투마법사들의 시전 속도는 네가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한이 뒤에서 외쳤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이 마법을 익히는 건 진리의 탐구를 위해서였지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장 발드로가드 학생들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마법사들 중에는 시전 속도가 느리거나 성공률이 낮거나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어차피 안전한 상황에서 천천히, 몇 번 반복하면 되는 만큼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긴장감으로 가득한 전투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해 남들보다 빠르게 마법을 시전해야 하는 전투마법사들은 달랐다.
이들은 강력하고 심오한 마법을 시전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단순한 마법이더라도 빠르고 안정적으로 시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전투마법사들의 철학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는 게 볼라디 교수였으니 에안두르데가 반응도 못하고 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잘못했다고 하고 뒤로 튀어라!’
이한은 그런 생각을 담아 후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후배는 이한의 뜻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킁!’하고 기뻐하더니 이한에게 손짓했다. 누가 봐도 협공하자는 손짓이었다.
“...아니, 뒤로 빠지라ㄱ...”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불길함이 치솟았다. 이한은 옆으로 몸을 굴렸다.
품위는 전투마법사가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볼라디 교수의 공격이 날아 들어왔다. 교수는 이한이 후배와 같이 협공할 거라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누명이군!’
“으아악!”
이한이 피한 탓에 공격을 대신 맞은 가이난도가 거꾸로 매달렸다. 친구의 고통에도 이한은 집중했다.
마법 전투에서 집중력이 흔들리면 바로 끝장이었다. 친구가 죽더라도 집중해야 했다.
“이한! 나 매달렸어! 이한!”
“바람처럼 민첩해져라!”
시간이 없는 만큼 마법을 여럿 준비하기 힘들었다. 이한은 후배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준 뒤 앞으로 달렸다.
상대한테 접근하는 게 멍청해보였지만 지금은 이게 맞았다. 괜히 거리를 두고 피하면 일방적인 샌드백이 될 뿐이었다.
‘일순 예지와 기민한 발걸음은 시전했다. 다음은...!’
이한은 자신이 최근 배운 마법들 중 볼라디 교수의 의표를 찌를 수 있는 마법들이 뭐가 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음악 마법은 너무 느렸고, 그나마...
‘회중시계. 회중시계가 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섬광과 함께 마력으로 된 구체들이 빗줄기처럼 내리꽂혔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 같은 대마력 보유자한테 여유롭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반 박자 늦었음을 깨달은 이한은 마법을 시전하는 대신 몸으로 버틸 각오를 마쳤다.
혹독한 검술 훈련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몸에 마력이 차오르고 동시에 망토가 펄럭였다.
파아아앗!
아르실이 준 방어의 망토가 적의를 감지하고 공격을 튕겨냈다. 사방으로 구체들이 난반사됐다.
이한은 형에 대한 감동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볼라디 교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전투마법사에게 상대의 아티팩트는 언제나 예상 안의 상수였던 것이다.
방어의 망토에 새겨진 문양 세 개 중 하나가 빛을 잃고 잠잠해지자, 볼라디 교수는 상대의 아티팩트가 하루 세 번 가능한 제한적 아티팩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다시 한 번 마력으로 된 구체들이 빗줄기처럼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이한이 전진했다.
‘무언가 노리고 있군.’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접근에서 의도성을 느꼈다.
방학에도 수련을 게을리하는 제자가 아닌 만큼 어떤 성취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캬악!”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고르곤 혼혈 신입생이 덤벼들었다. 제자의 강화 마법 때문인지 속도가 조준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동시에 석화 저주가 깃든 사안이 번뜩였다.
평소에는 쓰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한이 미친 마법사한테 공격당하자 흉포성이 폭발한 것이다.
볼라디 교수는 상대의 사안을 무력화시키거나 저주를 방어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행동에 나섰다.
쾅!
에안두르데는 일격에 제압됐다. 바닥에 처박힌 에안두르데는 변환 마법으로 만들어진 족쇄를 이기지 못하고 으르렁댔다.
동시에 이한이 가까이 접근했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이 무엇을 노리는지 한 번 보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망토의 마지막 방어를 소진시켰다.
교수로서 제자가 준비한 걸 봐주는 것도 아량 아니겠는가.
딱!
이한의 동작이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빨라지자 볼라디 교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제자가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순식간에 생겨난 수옥탄들이 볼라디 교수의 퇴로를 막았다. 이한은 번개의 창으로 변한 지팡이를 사납게 내찔렀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어지간한 마법들은 전부 다 완벽하게 꿰고 있겠지만, 오히려 완벽하게 계산한 탓에 변수가 생겼을 때 더 수습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이한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
비결은 간단했다.
본인도 시간을 가속한 것이다.
‘...젠장!’
이한은 알시클을 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한이 갖고 있는 회중시계를 만든 용의자 중에 배그렉 교수를 제외해서는 안 됐다.
지금 저 시간 마법을 쓰는 걸 보라!
소득 없이 5초가 끝나자 이한은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달았다.
<제한된 시간 가속> 마법의 리바운드가 몰려올 때였다.
쿵!
“...졌습니다. 교수님.”
리바운드 탓에 이한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외쳤다. 두 번째 경험하는 거라 첫 번째보다는 견딜만했다.
“잘했다.”
“예?”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왜 갑자기 칭찬을 하나 싶었다.
혹시 보는 눈이 많아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나?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자기 외투의 깃을 가리켰다.
이한의 섬뢰창 마법이 스친 탓에 작게 잘려나가고 탄 자국이 있었다.
공격이 맞은 것이다!
“교... 교수님!”
“?”
“제가 교수님에게 공격을 적중시켰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제가 교수님의 외투를 쓰러뜨렸군요!”
“이, 이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친구들이 당혹해서 말했다.
저건 이한한테 두들겨 맞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그래도 워다나즈 놈 외투에는 구멍을 냈으니 비등비등한 승부였다’할 때 하는 소리지, 이한이 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볼라디 교수의 외투라도 맞춘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친구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외투를 쓰러뜨렸다!”
“이한이 미쳤나봐...!”
“잘했다. 시간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군.”
신나서 함성을 지르던 이한은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품속에서 아까 사용한 아티팩트를 꺼내며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혹시 이런 아티팩트 만든 적 있으십니까?”
“아니.”
볼라디 교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의심병에 걸린 이한은 괜히 다 수상하게 느껴졌다.
‘수치스러워서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시겠지.’
“후배. 괜찮니?”
“...나는 약함니다...”
에안두르데는 수치심에 줄줄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 방에 제압되다니.
“울지 마. 상대가 미친... 아니, 상대가 강한 거였으니까. 교수님들은 다 저래.”
“으흑흑.”
이한은 후배를 달랬다. 나중에 혼을 내더라도 볼라디 교수한테 흠씬 두들겨 맞은 지금은 아니었다.
“저 사람 기술 배워서... 배워서 설욕할 검니다...”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나중에 돌아가서 침착해진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
이한은 후배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강의는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끝, 끝나셨습니까?”
주변이 조용해지자 가게 주인, 타타바츠는 카운터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아차.’
이한의 머릿속에서 <에인로가드 교수와 학생의 무허가 결투>, <고나달테스 공, 지도력의 문제가 있나?>, <익명의 학생 A 제보, ‘교장 선생님은 미친 사람이에요’...> 같은 자극적인 제국 신문 기사 제목들이 떠올랐다.
“예... 그런데 그게...”
“정말 대단했습니다!! 역시 교수님이시군요!!”
타타바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손님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손님들의 얼굴에는 대단한 구경을 했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혹시 교수님, 오늘 보여주셨던 마법들을 여기서 주기적으로 공연해주실 순 없으십니까? 보수는 두둑하게 지불하겠습니다!”
“얼맙니까?”
이한은 궁금해져서 슬쩍 물었지만, 볼라디 교수는 흥미가 없었는지 거절한 뒤 가게의 문으로 걸어나갔다.
이한 일행은 교수의 뒤를 쫓아서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볼라디 교수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워다나즈.”
“예?”
“더 발전한 시간 마법을 기대하고 있겠다.”
“...교수님. 저 아티팩트 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