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그래도 이한, 좋은 점도 있어.”
이한이 하도 침울해하자 가이난도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점이 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좋은 점은 이한이 흰 호랑이 탑 학생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뭐지?”
“교장 선생님 수제자인 건 안 들켰잖아!”
“......”
옆에 있던 친구들은 가이난도의 말에 경악했다.
“미치셨습니까?”
“정신 나갔어요??”
“이한. 가이난도 황자도 좋은 뜻으로 말한 걸 거다! 죽이면 안 된다!”
친구들은 이한이 황자를 죽이기 전에 재빨리 가이난도를 끌어냈다.
저딴 걸 좋은 점이라고!
* * *
팔가는 소드 스틱의 상태를 점검했다.
지팡이를 뽑으면 검이 되는 형태의 이 무기는 팔가 같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선호하는 무기였다.
마법사로서의 마법과 기사로서의 검술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물론 평범한 소드 스틱으로는 마법 지팡이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 소드 스틱을 만들기 위해 팔가는 결투 클럽에서 정산 받은 보수와 의뢰 보수, <이악투스 수프 클럽>의 일을 뛰어주고 받은 보수까지 다 털어 넣어야 했다.
실로 뼈아픈 지출이었다.
연구에 쓸 시약이 없어서 친구들한테 구걸해야 했을 정도로.
하지만 이 소드 스틱은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팔가는 첼레세 경을 응시했다.
오늘 팔가의 상대는 첼레세 경이었다.
‘침착하자.’
팔가는 볼라디 교수도, 볼라디 교수가 제자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기 위해 애썼다.
결투 시작 전에 잡념이 많아서는 이길 수 없었다.
‘...아니 근데 진짜 볼라디 교수 제자는 어쩌다 된 거지??’
하지만 잡념은 계속해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정말 궁금하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첼레세 경은 쾌검을 구사하는 검사. 부츠가 옆으로 비틀리는 순간 왼쪽으로 순간이동하듯이 파고든다. 독특한 보법이지만, 알고 있는 이상 막을 수 있다. 왼쪽을 막고 바로 <강철 같은 팔>을 시전한다. 그러면 방어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입회인이 나오더니 둘을 불렀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결투 클럽의 규칙을 설명해줬다.
절대 서로를 죽여서는 안 되고, 누군가 상처를 입는 순간 결투는 끝날 것이고, 명예롭게...
그러나 둘 중 어느 누구도 입회인의 설명을 듣진 않았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오로지 상대방만 보이는 것이다.
“시작!”
손수건이 던져지는 순간 격돌이 시작됐다.
첼레세 경은 날카롭고 치명적인 검술을 연달아 펼치고, 팔가는 이를 악물고 막아낸 다음 반격했다.
공방은 1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공격한 횟수는 순식간에 수십 번 넘게 쌓였다.
“큭!”
“!”
그리고 행운은 팔가의 편을 들어주었다.
첼레세 경이 팔에 상처를 입고 물러선 것이다.
‘이겼다!’
“승자는 우킴 가문의 팔가!”
팔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만큼 첼레세 경이 만만찮은 적수였기 때문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클럽의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바로 달려와서 둘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처를 치료해줬다.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감탄했습니다!”
관중석의 환호 속에서 들리는 후배들의 목소리에 팔가는 웃었다.
평소에도 승리 후 듣는 환호는 기뻤지만 오늘은 한층 더 각별했다.
‘그렇군. 같은 에인로가드 출신이 보내는 환호여서 그런가!’
“다들 고맙다. 몰랐는데, 후배들이 지켜봐주는 것도 꽤나 기쁘...”
“시작 후 반응이 늦었다.”
“......”
관중석으로 걸어오는 팔가에게, 볼라디 교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경악의 시선으로 교수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마음이란 게 없나?!
“첼레세 경의 보법은 두 가지다. 둘 중 하나만 파악하고 있더군. 다른 보법을 썼다면 졌을 거다.”
“그... 그랬습니까?”
팔가는 당황하는 와중에도 놀랐다.
첼레세 경의 움직임은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하나가 더 있었다니.
확실히 배그렉 교수가 에인로가드의 미친 흡혈괴물이긴 해도 결투 실력은 진짜였다.
“<강철 같은 팔>을 시전했군.”
“예. 공격을 막고 선공을 찾아오기 위해...”
“시전이 느리고 효과가 약했다.”
볼라디 교수는 팔가가 시전한 <강철 같은 팔>을 지적했다.
시전이 느리고 효과가 약한 탓에 상대가 공격한 충격이 그대로 안에 들어왔고, 그 탓에 왼쪽 팔이 마비된 것이다.
“그... 그랬습니다.”
“관통당했으면 끝났을 거다.”
“맞습니다.”
교수의 지적에 팔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후로도 볼라디 교수는 팔가가 했던 자잘한 실수들을 지적해줬다.
모두 다 타당하고 맞는 지적이라 팔가는 새삼 감탄했다.
‘대단하시다!’
언제나 두려워하기만 했었는데, 사방이 열려있어서 도망칠 수 있고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하자 볼라디 교수는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노련하고 뛰어난 결투가로서의 안목이 엿보였다.
팔가는 반성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사흘 동안 지독하게 공격받았다고 해서 팔가와 결투 클럽 친구들이 너무 볼라디 교수를 두려워한 게 아닐까?
사실 볼라디 교수는 1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식사를 사줄 만큼 사교적인 사람일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안 끝났다.”
“네?”
“18초에 시전했던 <시야 점멸>은 실수였다.”
“...어, 그, 그거 때문에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상대는 시야가 암전된 척, 공격을 유도했다. 넘어갔으면 당했을 거다.”
“과, 과연.”
“그리고...”
볼라디 교수는 팔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수를 하나씩 지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승리에 만족하고 지적에 감사해하던 팔가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쓰레기구나! 운이 좋아서 이겼구나!’
“말...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렸다가 우릴 공격하시면?”
“이한, 이한... 어, 이한 어디 갔어?”
이한을 부르려던 친구들은 이한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한은 입회인한테 찾아가서 말을 걸고 있었다.
“예. 다음 결투 시작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볼라디 교수를 말리는 대신 그냥 다음 결투를 시작시켜버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 * *
팔가는 후배들이 가져다 준 따끈한 홍차를 마시자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들 고맙다. 추태를 보였군.”
“아, 아닙니다. 선배님. 누구든지 울었을 겁니다.”
‘이한 빼고요...’
친구들은 동시에 속으로 생각했지만 팔가를 위해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볼라디 교수는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결투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팔가는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쿨쩍였다.
“...내가 그렇게 어설퍼보였나?”
“아니요!”
“대단했습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맨날 맞고 다녀서 약한 줄 알았는데 사실... 읍읍.”
“후. 그렇지. 하긴, 배그렉 교수님 눈에는 누구나 다 못마땅하실 거야.”
‘이한 빼고요...’
친구들은 다시 한 번 동시에 속으로 생각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팔가는 아까 들었던 의문을 풀기 위해 질문했다.
“잠깐. 그런데 배그렉 교수님은 왜 결투에 참가하시는 거지? 여기서 연습하시려는 건가?”
“어... 그러니까...”
“교수님께서는 결투 클럽을 도는 취미가 있으시대요.”
요네르는 친구들을 대변해서 가장 적절하게 순화했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취미였지만 팔가는 납득했다.
볼라디 교수의 실력을 봤을 때 저런 취미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하긴. 그런 취미를 가지셨기에 그렇게 강하신 걸지도.”
‘돈 때문에 도시는 건데...’
“잠깐. 그럼 설마 어제 새로 온 괴물 같은 회원도 교수님이었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많이 싸우지?”
팔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투를 하는 이유는 실력이 비등한 상대와의 순수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볼라디 교수의 실력을 봤을 때 비등한 상대와 순수한 싸움을 하기도 힘들어 보이고, 더더욱 저렇게 많이 싸울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후배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승자는 배그렉 가문의 볼라디!”
아니나 다를까 볼라디 교수는 순식간에 끝을 냈다. 팔가는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대체 왜?
“헉!”
“왜 그러십니까, 선배?”
더르규는 팔가가 깜짝 놀라자 신기해했다.
볼라디 교수가 이미 저기 있는데 이 선배는 더 놀랄 수가 있단 말인가?
“셈텐 백작이다!”
“셈텐 백작이 누구시죠? 제가 이 주변 출신이 아니라...”
“여기 결투 클럽에서는 가문이나 영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후배! 실력이 중요하지. 그리고 셈텐 백작은 내가 알기로 이 클럽의 최고수야. 원래 얼굴을 내밀지도 않고!”
팔가는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팔가의 최종 목표는 저 셈텐 백작이었다.
이번 방학에는 무리더라도 졸업하기 전에 실력과 전략을 갈고 닦아 셈텐 백작을 꺾고 싶었던 것이다.
셈텐 백작은 품위 넘치는 동작으로 결투 클럽을 가로질러서 걸어오더니 입회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볼라디 교수를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회인은 곤란하다는 듯이 거절했다.
-어째서인가!?
-오늘 백작 각하의 상대는 저 소년으로 정해지셨습니다. 아무리 백작 각하라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일정을 바꾸실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나는 강자와 겨루고 싶네. 저 소년이 나하고 적당한 상대라고 보나?
-백작 각하! 각하께서 늦게 오신 탓이십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당연히 내가 상대할 줄 알았네. 대체 내가 왜 저 소년과 맞서야 하나? 설마 저 소년이 신청하진 않았을 테고.
-저 소년께서 신청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어...”
팔가는 이상함을 느꼈다.
셈텐 백작의 상대가 마치 흰 호랑이 탑 후배 이한 같았던 것이다.
어라...?
‘착각이겠지?’
볼라디 교수가 직접 정했다는데, 교수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셈텐 백작을 상대로 잡진 않았을 터.
“선배님. 셈텐 백작은 어떤 식으로 싸우는 결투가십니까?”
“셈텐 백작은 마력을 흡수하는 커틀러스와 반지, 그리고 망토를 갖고 있지. 가문의 보물이라더군.”
팔가는 백작의 전투법을 설명해줬다.
백작은 가문의 보물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시작하면 상대 주변을 빠르고 가볍게 돈다.
이는 공간의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마법사의 경우 이걸로 마법이 막혔다.
혹시라도 뛰쳐나온다면 커틀러스로 공세를 막아낸다.
이는 상대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흡수했다. 수비적인 검술 하나는 뛰어난 만큼 바로 뚫지 못하면 상대는 그대로 말라죽었다.
“그래서 백작의 별명이 흡혈귀... 잠깐!!! 저 녀석, 왜 내려가 있는 거냐!?”
이한이 내려가서 셈텐 백작 앞에 서자 팔가는 경악했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 저 후배가 백작의 결투 상대였단 말인가?
“어. 그러네요.”
“이한의 상대가 백작님이었구나.”
“나 샌드위치 하나만 더 줄래?”
“작작 먹어. 가이난도. 돌아가서 저녁 안 먹겠다고 하지 말고.”
“아, 아니야. 소화할 수 있어.”
“......”
팔가는 친구가 지금 강적을 만나서 얼마나 다칠지도 모르는데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후배들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이번 1학년들은 다 사악하고 비열한 놈들이구나...!’
“초이! 같은 흰 호랑이 탑 학생으로서...”
“괜찮습니다. 선배님. 하하.”
“......”
‘흰 호랑이 탑마저!’
팔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흰 호랑이 탑이 어쩌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