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이한은 속으로 욕했지만 친구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냥꾼들이 ‘그쪽도 저렇게 할 수 있나?’라고 물었는데 ‘예!’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착지 후 사냥꾼들은 밀렵꾼들을 꽁꽁 묶은 뒤 장비를 뺏었다.
“동쪽으로 계속 걸어가라. 뒤를 돌아보면 쏘겠다.”
“제, 제발 갑옷은 돌려주시면...”
“안 돼.”
이한은 이름 없는 사냥꾼들의 단호함에 동의했다.
무기는 그렇다 쳐도 다른 장비들까지 뺏는 게 과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제국의 밀렵꾼들은 사냥감들만큼이나 끈질기고 비열한 이들이었다.
막말로 이 근처에 다른 무기들을 숨겨놓은 뒤 다시 밀렵에 뛰어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장비를 전부 없애버려야지 울며 겨자 먹기로 산에서 내려갈 것...
“밀렵꾼들의 장비는 재수가 없어서 멀리 던져버려야 하지.”
“......”
생각과는 다른 미신적인 이유에, 이한은 할 말을 잃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래도 결과는 똑같으니까.’
이한은 사냥꾼들의 일은 그만 관찰하고 야영지나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냥꾼들이 아까부터 이한이 쳐다볼 때마다 외투로 자기 얼굴을 숨기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의미의 전통인진 모르겠지만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혹시 이한 네가 석화 저주를 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
폰리그는 동의한다는 듯이 그르릉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도 신경쓰지 말라는 듯이 꼬리로 손목을 두드렸다.
‘얘네 둘 때문 아닌가?’
이한은 둘을 살짝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둘 다 꽤나 속이 좁은 녀석들이라 말을 꺼냈다가는 삐질 수도 있었다.
“야영지나 준비하자.”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서 넘기더니 친구들을 불렀다.
일을 분담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벽은...”
“내가 할게.”
“앞의 구덩이는...”
“내가 파지.”
“식수를 확보하는 건...”
“내가 만들게.”
요네르는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한은 머쓱해져서 물었다.
“조금 많이 맡았나?”
“세 개 중 세 개를 맡으면 조금이 아니지. 여하튼, 이한 넌 조용히 해 이제. 불빛도 만들 건데...”
“앗. 그건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요네르는 시아나와 더르규한테 손짓했다. 둘은 이한을 질질 끌어냈다.
“쟤는 방금 마법 많이 썼으니까 그냥 우리끼리 하자.”
“그러는 게 낫겠어요.”
시아나의 대답에 가이난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이한이 만든 야영지보다 별로면 어떡해?”
“그럼 넌 밖에 나가서 자.”
“...생각해보니 좀 별로여도 괜찮지. 꼭 야영지를 완벽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거잖아!”
두 시간 후.
야영지를 완성한(이한도 도중에 슬쩍 나와서 친구들을 도왔다) 학생들은 주변을 확인했다.
“알겠지? 산맥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곳이야. 이렇게 야영지를 만들어놨어도 어떤 몬스터가 기어들어올지 모른다고.”
닐리아는 사냥꾼 출신답게 깐깐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완성된 야영지의 방어가 생각보다 단단했던 것이다.
들짐승들의 접근을 막는 해자와 퇴치용 약초, 혹시라도 모를 야영지 정문 공격에 대비한 알람 마법, 방풍 마법이 걸린 야영지 목벽...
친구들의 방심을 눈치 챈 닐리아는 강하게 말했다.
“산맥은 에인로가드보다 더 위험한 곳이라고!”
“헉!”
그제야 친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야영지 주변을 점검했다.
번개걸음 교수와 사냥꾼들은 이 인근 구역을 확인하기 위해 출발한 상태.
탐험가 서리걸음은 뒤쪽 폭포 지역만 확인하고 곧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그 때까지는 확실하게 확인을 해둬야 했다.
이한은 폰리그를 타고 요새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돌았다. 그 모습에 닐리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해?”
“혹시라도 몬스터들 올까봐 그리폰 냄새 묻히고 있어. 약한 몬스터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
닐리아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뱀 계열 몬스터들이 들어올 길을 막으려고 열심히 수풀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꺾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더 좋은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바실리스크 좀 빌려줄래?”
닐리아의 질문에 새끼 바실리스크가 절대 싫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 * *
“와이번 냄새가 배었나?”
번개걸음 교수의 말에 이름 없는 사냥꾼 한 명이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소리를 줄이라는 신호였다.
“몬스터들이 많나?”
번개걸음 교수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제국의 산맥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위험한 곳이었고 그만큼 조심해야 할 점도 다양했다.
비통 산맥 같은 경우는 중입을 넘어서는 구간부터 소리를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소리에 반응하는 몬스터들이 많은 만큼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산맥 입구 구간이었지만 이름 없는 사냥꾼들이 소리를 줄이라고 하는 걸 보면, 깊은 곳에 있던 몬스터들이 안쪽으로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 친구는 짝수 날 저녁 산행에서는 묵언을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
번개걸음 교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름 없는 사냥꾼들은 분명 뛰어난 이들이었지만, 이들이 가진 수십 가지 미신들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와이번 냄새가 밴 것 같은데.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는군.”
“그렇게 탈취를 했는데도 어쩔 수 없군요. 시간이 해결해주길 빌어야겠습니다.”
와이번의 냄새는 다른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았다.
심지어 유니콘의 접근도.
그래서 와이번도 야영지에 두는 대신 아래에 묶어두고, 교수와 사냥꾼들은 연금술사의 물약으로 탈취를 시도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미약하게 냄새가 남아있다니. 와이번도 보통 몬스터는 아니었다.
“산맥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밸 때까지 좀 더 돌도록 하지.”
“학생들은 괜찮겠습니까?”
순찰자 므랑세의 질문에 번개걸음 교수는 걱정할 거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으니 걱정할 거 없다.”
“하긴 서리걸음 씨도 계시는데...”
“아. 맞아. 걔도 있고.”
“......”
뒤늦게 자기 친척을 떠올린 번개걸음 교수의 모습에, 므랑세는 황당해했다.
그렇다면 방금은 뭘 믿고 괜찮다고 한 것인가?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정말 믿음직스러우신가 보군요. 하긴, 제 친구 중에 그엣세란 녀석이 있는데.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1학년 학생들이 부여 마법을 몇 개씩 중첩해서 바위도 박살내고...”
“그건 널 놀린 거 같은데? 에인로가드 1학년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렇습니까? 아니, 그엣세가 그런 친구는 아닌데...”
“어쨌든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괜찮을 거다. 믿음직스러운 녀석도 있고.”
이름 없는 사냥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듣지 않아도 누굴 말하는지는 뻔했기에 번개걸음 교수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폰하고 바실리스크는 우연히 길들인 거야! 이상한 미신으로 괜히 걱정할 필요 없다.”
“바실리스크요?”
‘아차.’
번개걸음 교수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사냥꾼들은 그리폰 길들인 것만 알았지 바실리스크 길들인 것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이름 없는 사냥꾼들이 미친듯이 수군거렸다. 므랑세는 제국의 몇몇 산맥에서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입장이 금지되는 것 아닌가 걱정됐다.
“밀렵꾼들이 생각보다 많소이다. 교수.”
정찰을 나갔던 이름 없는 사냥꾼 한 명이 돌아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보고했다.
“그 정도인가?”
“그렇소. 유니콘의 소문이 많이 퍼진 것 같소. 당장 이 주변을 얼씬거리는 놈들만 세 무리를 보았으니.”
므랑세는 그 말에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유니콘을 빨리 찾아도 모자랄 판에 밀렵꾼 놈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황무지 별잡이들의 격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일단 야영지로 가시죠. 밀렵꾼 놈들부터 다 잡고...”
“응? 괜찮아. 일단 구역부터 마저 확인하자. 와이번 냄새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명심하고...”
“교, 교수님. 유니콘 찾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밀렵꾼 놈들이 세 무리가 있다잖습니까.”
므랑세는 당황했다.
밀렵꾼들은 단순하고 멍청한 얼뜨기 산적들이 아니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과 정면으로 승부하면 당연히 마법의 폭풍을 뚫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박살나겠지만, 밀렵꾼들이 야영지를 발견하면 당연히 교활한 꾀를 쓸 것이다.
게다가 아까 날아온 뒤 시간이 좀 지났으니 밀렵꾼들 사이에서 새로 산맥에 들어온 일행이 어떤 일행인지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학생들은 더더욱 위험했다.
사냥감을 잘 아는 사냥꾼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또 없지 않은가.
“들었는데 괜찮다. 자. 가자.”
“아, 아니...!”
“괜찮다니까. 모두 움직여라! 밀렵꾼 놈들 때문에 방해될 시간을 생각하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해!”
* * *
밀렵꾼 줄반은 비통 산맥을 비롯한 몇몇 산맥에서 잔뼈가 굵은 사냥꾼이었다.
사실 뛰어난 밀렵꾼은 뛰어난 사냥꾼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감시자들을 피해 산맥 안으로 몰래 들어가 금지된 몬스터를 붙잡아서 갖고 나오는데 어떻게 뛰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만큼 줄반 또한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줄반에게는 다른 사냥꾼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교성이었다.
대부분의 사냥꾼들은 자신이 잡은 짐승을 산 아래 마을이나 도시로 갖고 가서 파는 것 정도가 사교 활동의 전부였다.
하지만 줄반은 달랐다.
줄반은 도시에서 금지된 몬스터를 찾는 상인을 만나서 거래를 할 줄 알았고, 또 그 몬스터를 급하게 구하는 귀족에게 찾아가 환심을 살 줄 알았으며, 떠돌이 용병이나 모험가를 꼬드겨 자기 밑에서 부릴 줄도 알았다.
이 정도 되는 규모의 밀렵꾼은 거의 도적단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탐험가들이 사냥꾼과 마법사를 이끌고 도착했다고?”
“야영지를 벌써 차렸답니다!”
“유니콘은 절대 넘겨줄 수 없는데...”
줄반은 침음을 흘렸다.
지금 유니콘을 찾는 고객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유니콘을 구하기만 한다면 그대로 은퇴해도 될 만큼 막대한 황금이 굴러들어 오리라.
‘하지만 마법사들과 부딪치는 건 영 꺼려지는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줄반! 지금 야영지를 보고 온 놈이 있는데, 다들 어린놈들이랍니다.”
“그게 정말이냐!”
“심지어 지금 야영지에 사냥꾼들도 없답니다.”
“!”
너무 좋은 기회라 줄반은 순간 속임수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가 유니콘 찾으러 와서 저런 함정을 파겠는가.
“내가 직접 확인해보마.”
줄반은 멀리 떨어진 바위 위로 올라가 야영지를 확인했다.
마법사들이 있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이 잘 만든 야영지였지만, 확실히 부하들이 말한 대로 빈틈이 보였다.
마법사는 사냥꾼과 달리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활약하는 천재들이 많았다.
마법만 쓸 줄 알면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줄반 같은 노련한 밀렵꾼들에게는 먹잇감처럼 보일 뿐이었다.
“좋아! 놈들을 제압하러 간다. 마법사니까 몸값도 괜찮겠군!”
* * *
“네가 참아라.”
이한은 야영지 임시 마구간 안에 들어간 폰리그가 화를 내자 달랬다.
주변에 냄새를 다 묻히고 나자 이한은 매몰차게 폰리그를 마구간 안에 집어넣었다.
유니콘이 그리폰의 냄새를 신경쓰지는 않는다지만, 그리폰이 있는 걸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폰리그는 ‘유니콘이 와이번처럼 저등한 생물을 피하는 것과 날 같이 취급하냐!’하고 항의했지만 이한에게는 닿지 않았다.
안 그래도 누가 자꾸 멀리서 쳐다봐서 짜증나는데...!
“누가 자꾸 쳐다본다고? 아마 밀렵꾼들이겠지. 걱정하지 마.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다가오진 않을 테니까.”
-혹, 혹시 마법사 님들이십니까?
“!”
이한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감시탑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파지지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