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화
“하지만 둘을 길들인 건 제 자의가 아니라 에인로가드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리고 에인로가드에 저보다 특이한 학생들도 있...”
이한은 포기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 때 이름 없는 사냥꾼이 손을 뻗으며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통곡저(慟哭猪)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목소리를 낮추시오.”
“!”
비통 산맥에 출몰하는 몬스터, 통곡저는 매우 위협적인 몬스터였다.
오죽하면 밀렵꾼들이 통곡저한테 당했다는 핑계를 대며 야영지에 접근하려고 했겠는가.
거대한 멧돼지를 닮은 생김새로 보여주는 저돌적인 움직임이나 돌파력도 돌파력이었지만, 통곡저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몸집이나 송곳니가 아닌 그 울음소리였다.
놈은 밴시나 만드라고라의 울음소리처럼 듣는 사람의 영혼을 강하게 타격하는 울음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땅바닥에 귀를 가져다대고 상대의 소리를 듣던 이름 없는 사냥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상하군... 통곡저는 원래 몰려다니는 놈들이 아니오. 그런데 오늘은 몰려다니는군.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평소 볼 수 없는 몬스터들의 이상행동에 이름 없는 사냥꾼은 위화감을 느꼈다.
몬스터가 자신의 습성과 다른 행동을 할 때에는 이유가 있는 법.
대체 왜지?
“벤도졸 교수님 때문일까요?”
“...아, 아니. 그 교수가 흉폭한 사람이긴 하지만 여기 있는 몬스터들을 전부 겁줄 수는 없소. 마법사가 괴물은 아니니까.”
‘흠. 교장 선생님을 만나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
“이쪽으로 하나 오는군. 상대해야겠소. 귀를 막으시오.”
“예.”
이한은 이름 없는 사냥꾼의 지시대로 귀에 솜을 넣었다. 그걸 본 이름 없는 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산맥의 주인이시여, 지금부터 제 맹세를 바치겠습니다.”
“...마법사셨습니까?!”
이름 없는 사냥꾼에게서 마력의 파장을 읽은 이한은 깜짝 놀랐다.
사냥꾼은 입모양을 읽고 고개를 저었다.
“전통의 가호요.”
이름 없는 사냥꾼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수십 가지 전통과 미신에서 힘을 얻는 이들이었다.
엄격하고 어려운 전통을 지킬수록 사냥 시 더욱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원시 마법!’
이한은 설명을 듣고 원리를 깨달았다.
제국 사람들 중 마법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이름 없는 사냥꾼들도 비슷한 경우였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 마법 같은 계열.
‘놀랍다. 딱히 마법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이라니.’
이름 없는 사냥꾼은 창을 꼬나 쥐고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땅을 뒤흔드는 발굽소리와 함께 통곡저가 나타났다. 통곡저는 이름 없는 사냥꾼을 보자마자 엄니로 꿰뚫어버리려고 달려들었다.
팟!
이름 없는 사냥꾼은 마법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을 사용해 공격을 피했다. 오히려 창날이 통곡저의 몸통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통곡저는 살벌한 눈빛으로 이름 없는 사냥꾼을 노려보았다.
-■■■■■!
첫 번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이한도, 이름 없는 사냥꾼도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그걸 깨달은 통곡저는 분노해서 사냥꾼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름 없는 사냥꾼은 교묘하게 피해나가며 창날을 휘둘렀다.
통곡저는 그륵 소리를 내며 숨을 골랐다. 두 번의 공격으로 저 날랜 인간을 그냥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공격을 위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사냥꾼은 통곡저가 다른 몬스터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원래 통곡저는 저런 식으로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가 아닌 것이다!
“빠져나가야겠소!”
“알겠습니다!”
이한도 이름 없는 사냥꾼의 급박함을 느꼈다.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모여라, 회전하라!”
만약을 대비해 준비했던 마법들이 시전되며 통곡저를 직격했다.
수옥탄은 통곡저 같은 튼튼한 몬스터도 뼈에 금을 가게 하고 내장을 뒤흔들 수 있었다.
쿵!
강렬한 충격에 통곡저는 옆으로 튕겨나갔다.
분노한 통곡저는 자세를 바로 잡고 감히 자신을 공격한 건방진 마법사를 찢어발기려했다.
그러나 준비가 끝난 마법사는 몬스터보다 훨씬 강력했다.
“암흑이여, 휩쓸어라!”
암흑 파동이 통곡저의 생기를 순간적으로 빼앗아서 둔하게 만들었다.
“냉기여, 화살이 되어 쏘아져라!”
그 뒤로 열두발의 냉기 화살이 통곡저에 몸에 꽂혔다. 가죽은 관통하지 못해도 타격을 입은 통곡저를 얼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쳐라!”
암흑 원소 스켈레톤 전사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더니 통곡저 위로 창을 찍어 던졌다.
상대의 발을 확실히 묶었다는 걸 깨달은 이한은 다시 한 번 수옥탄을 준비했다.
아까보다 더욱 회전이 거세진 물의 탄환이 공기를 찢으며 통곡저의 급소에 작렬했다.
쾅!
마법 연타로 통곡저를 압도한 뒤 마지막 일격으로 숨통을 끊어버리는 걸 보자, 이름 없는 사냥꾼은 감탄했다.
“훌, 훌륭하군!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명성이 어디서 온 건지 알겠소!”
에인로가드 학생들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쌓였지만 이한은 해명할 시간이 없었다.
“다른 놈들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파악해야 하지 않습니까?”
“솜을 빼지 마시오. 놈들은 그걸 노리고 있소!”
이름 없는 사냥꾼은 단호하게 외쳤다.
다른 통곡저들이 어디에서 접근하는지 알기 위해 솜을 빼는 순간, 놈들은 득의양양하게 죽음의 통곡을 터뜨릴 터였다.
그러나 이한은 주저하지 않고 솜을 잠깐 빼냈다. 그리고는 아까 사냥꾼이 했던 것처럼 바닥에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했다.
“저쪽에서 오고 있습니다!”
-■■■■■■!
통곡저들이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자신들을 제외하고 이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은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는 흉포한 울음소리였다.
이름 없는 사냥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어린 마법사가 방금 저지른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시죠!”
“...?!”
이한은 매우 멀쩡했다.
이름 없는 사냥꾼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이한과 함께 이동했다.
* * *
“방금 전 일은 정말로 잘했소. 그런데 울음소리는...?”
“선천적으로 저항력이 강하다보니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정말 대단하군!”
“아, 아니. 이건 저만 그런 겁니다.”
이름 없는 사냥꾼이 이상한 오해를 할까봐 이한은 급히 해명했다.
“하긴. 다른 학생들은 그리폰하고 바실리스크를 길들이지 않았던 것 같소.”
“......”
이한이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이름 없는 사냥꾼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오. 마법사가 사악하지 않다는 건 잘 알았으니. 마법사가 정말 괴물들의 왕이었다면 나를 돕기 위해 통곡저와 싸웠겠소?”
“...믿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상대가 드디어 경계심을 풀자 이한은 반색했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었다. 가장 완고한 사냥꾼도 이한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밀렵꾼 놈들아.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인질이 유니콘한테 먹히는 게 보고 싶나!
“!”
둘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쳐 날뛰는 통곡저 무리를 피하다가 우연히 벤도졸 교수가 머무르는 영역으로 접근한 것이다!
“신호를 보내겠소.”
“그럼 전 교수님을 협박하겠습니다.”
“그렇... 음?”
이름 없는 사냥꾼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잘못 들었나?
“어디 한 번 가이난도를 유니콘한테 먹이로 줘보십시오, 교수님! 바로 교장 선생님한테 고발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성격에 유니콘을 산 채로 씹어 드실 겁니다!”
-...요 비열한 자식, 평생 말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걸어 다닐 자식 같으니라구!
이한의 협박이 벤도졸 교수의 아픈 곳을 찔렀는지 교수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학생한테 지고 싶지는 않았는지 벤도졸 교수가 외쳤다.
-흥! 고나달테스가 여기 일까지 알지는 못할 거다!
“지금 제 친구 중 한 명은 에인로가드로 연락 보내려고 내려갔습니다. 어디 한 번 계속 그래보십시오!”
-네놈은 조랑말부터 당나귀한테까지 다 미움 받을 후레자식이야!!
“......”
이름 없는 사냥꾼은 아까 보냈던 친밀한 눈빛보다 살짝 거리감이 생긴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한은 벤도졸 교수를 상대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교수님. 유니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이 염탐쟁이 밀렵꾼 놈들! 번개걸음이 알려줬나!
“도와드리게 해주십시오! 같은 에인로가드의 마법사 아닙니까!”
-하! 같은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면 더 의심해야지. 네놈 몇 학년이냐?
“......”
이한은 순간 납득해버리고 말싸움에서 질 뻔했다.
-밀렵꾼 놈들은 못 믿어! 유니콘은 내가 지킨다. 꺼져!
“여기 이 소년은 당신보다 훨씬 더 괴물에게 사랑받는 소년이오, 벤도졸!”
보다 못한 이름 없는 사냥꾼이 대신해서 나섰다.
그 건방진 말이 벤도졸 교수의 자존심을 제대로 자극했는지 아까보다 더 살벌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개#뒤질%#! $@^%당나귀#$새끼#%!
“...무슨 욕입니까 저거?”
“굳이 알아들을 필요 없소!”
욕을 토해내고 나자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벤도졸 교수가 정상적으로 말했다.
-대체 어떤 장님이 왔길래 저깟 어린 밀렵꾼 놈이 나보다 낫다는 거냐! 내가 어떤 괴물을 길들였는지 아느냐? 제국의 가장 작은 요정부터 제국의 가장 커다란 드래곤 아종도 돌봤다!
“고작해야 돌본 수준일 거요. 당신은 괴물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할 테니!”
“아, 아니. 저도 막 진정으로 사랑받는 건 아닌데...”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누가 들으면 그리폰과 바실리스크가 이한을 매우 사랑하는 줄 알 것 아닌가.
그러자 이번에는 소매 안에 있던 새끼 바실리스크가 분노해서 꼬리로 연타를 쳤다.
그리폰은 몰라도 자신의 사랑을 무시하다니!
“여기 이 소년은 그리폰을 길들이고 바실리스크의 사랑을 받고 있소. 당신이 그럴 수 있소?”
-노새도 안 믿을 헛소리 하지 마라! 네깟 놈이 그리폰을 길들이고 바실리스크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유니콘의 이름에 맹세코 내가 네 발로 기어서 널 맞이하겠다!
* * *
벤도졸 교수는 네 발로 엎드린 채 매우 못마땅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보다 못한 닐리아가 번개걸음 교수한테 말했다.
“교수님. 그래도 일어나게는 해드려야 하지 않...”
“아냐. 좀 더 엎드려 있으라고 해라. 저 자세는 허리에도 좋지. 아까 몇 대 맞았으니 허리에 좋은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
학생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네 발로 기어다니는 벤도졸 교수를 쳐다보았다.
에인로가드 학생이라면 누구나 교수를 무릎 꿇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막상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교수를 보게 되자 기분이 좀...
“그래서 벤도졸 교수. 유니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내가 녀석을 만난 건 몇 년 전이었지. 그 날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초승달이 떠있었다. 나는 공기가 빛나는 걸 보고 가장 아름다운 생물 중 하나가...”
“안 궁금하니까 본론만 말합시다. 벤도졸 교수.”
벤도졸 교수는 꿍얼대고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유니콘은 다친 게 낫지 않은 상태로 새끼를 돌보고 있소.”
“!”
번개걸음 교수는 깜짝 놀랐다.
유니콘이 다친 것도 놀라웠고, 새끼를 돌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둘 다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까.
“지랄발광을 한 이유를 알겠군!”
“그럼 꺼져주시겠소?”
번개걸음 교수는 벤도졸 교수를 걷어차려다가 참았다. 학생들 교육에 좋지 못했다.
벤도졸 교수는 이한을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교활한 사기꾼 놈.”
“...교수님. 내기 제안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저 사냥꾼 분이 하셨...”
“흥!”
벤도졸 교수는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폰리그가 긴 꼬리를 휘둘러 교수의 얼굴을 갈겼다.
“폰리그!”
“이... 이...”
벤도졸 교수가 부들부들 떨자 이한은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제가 대신 사과드립...”
“...이렇게 기운찰 수가! 녀석!”
“......”
“더 휘둘러보거라! 허허.”
폰리그는 인간 마법사의 광기에 질색하며 뒷걸음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