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아, 아니.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돌봐주셨는데...”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이한이 말하자, 해골 교장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유니콘 같은 마법동물한테 사람과 같은 의리를 기대하지 마라.”
벤도졸 교수가 열심히 돌봐주긴 했지만 유니콘은 자신의 새끼를 최대한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고를 의무가 있었다.
아까 새끼가 벤도졸 교수를 보고 겁을 먹은 걸 봤을 때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 얼마나 뛰어나고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와 상관없이 일단 새끼한테 호감을 사야 하는 것이다.
“교수님께서 아시면 슬퍼하시겠군요.”
“아닐걸. 벤도졸 교수는 유니콘이 똑똑하다고 좋아할 거다.”
“......”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벤도졸 교수는 유니콘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오냐오냐하며 좋아해 줄 사람이었으니까!
고민하던 유니콘이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냈다. 해골 교장이 ‘흠’ 소리를 내며 턱에 손을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요구를 하길래. 들어주도록 하지. 어려운 요구도 아니니.”
‘무슨 요구길래?’
이한이 의아해하며 묻자 해골 교장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믿음직한 네 녀석이 돌봐달라는군. 알겠다고 했다.”
“......”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던 이한은 급히 정신을 되찾고 말했다.
“그걸 왜 제가 합니까?!”
“어차피 네가 할 테니까.”
“예?”
“뭘 모르는 척이냐?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벤도졸 교수 밑에서 배울 거고, 벤도졸 교수 밑에서 배우면 놈이 키우는 흉악한 괴물들을 네가 다 돌보겠지. 그럼 유니콘도 네가 돌보지 않겠느냐?”
“교수님께서 유니콘을 직접 돌보실 수도 있잖습니까. 그리고 교수님이 저 별로 안 좋아하시던데요.”
이한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교수가 유니콘을 직접 돌보려고 해도 새끼가 싫어할 테니 널 부르겠지. 벤도졸의 호오와 상관없이, 넌 특정 괴물들에게 사랑받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거꾸로 매달린 가이난도가 피가 쏠려서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어떤 괴물들이요?”
“마력 많다고 겁먹고 도망치기보다는 오히려 탐내서 다가오는 괴물들한테는 특히 매력이 있지.”
“......”
정말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름 없는 사냥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의하는 게 괜히 얄미웠다.
해골 교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벤도졸 교수가 칭찬 안 했나?”
“저 같은 놈이 왜 사랑을 받는지 모르겠다고 계속 욕하시던데요.”
“그거만한 칭찬도 없지!”
해골 교장은 말과 함께 유니콘이 머무는 환경을 통째로 뜯어내서 검은 힘의 기둥으로 보냈다.
가기 전 유니콘 새끼가 머뭇거리며 해골 교장에게 울음소리를 냈다.
두 마리 유니콘은 기둥을 타고 에인로가드로 이동했다.
“번개걸음 교수. 일은 마무리된 것 같은데, 에인로가드로 같이 가겠소?”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 사냥꾼들은?”
“그들도 가능하다면 자기 산맥으로...”
“귀찮지만 어쩔 수 없지.”
해골 교장은 검은 힘의 기둥을 이용해 번개걸음 교수 일행을 돌려보낼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 이름 없는 사냥꾼 중 이번에 이한과 같이 보조를 맞춘 사냥꾼이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도 고마웠소. 이거 받으시오.”
“?”
사냥꾼이 내민 건 낡은 화살이었다.
“이름 없는 사냥꾼들의 증표요. 어느 산맥이든 이름 없는 사냥꾼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같이 사냥에 나선 이상 당신도 사냥꾼이지. 감사할 건 없소. 그리고 맹세에 관심이 있다면 증표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시오.”
“그게 무슨...”
사냥꾼은 더 이상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는지 동료들과 함께 검은 기둥을 타고 떠나버렸다.
팟!
해골 교장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너희들은?”
“플라허 시로 돌려보내주십시오.”
“알겠다. 다음 학기 때 보자.”
친구들까지 다 보낸 해골 교장은 마지막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래, 기분이 어떠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묻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음, 교수님을 붙잡아서 현상금을 받게 되니 더 뿌듯한 것 같습니다.”
“...그 기분 말고...”
해골 교장은 한 대 때릴까 고민하다가 참고서 말했다.
“도철 놈을 상대했다면서?”
“아. 싸움은 벤도졸 교수님만 하셨고 저는 분신 정도만 막았습니다. 특이한 몬스터군요.”
“귀찮은 공격 수단을 여럿 갖고 있는 놈이지. 앞으로 에인로가드를 다니다 보면 그런 몬스터를 더 보게 될 거다.”
“......”
왜 에인로가드에 다니는데 저런 몬스터를 더 보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한은 그냥 입을 다물고 들었다.
“아마 도철은 너와 상성이 매우 좋지 않아 별 힘을 못 썼겠지? 기껏해봤자 저주나 암흑 원소일 테니.”
“맞습니다.”
“하지만 놈의 능력이 좀 더 물리적이거나 직접적이었다면 너도 그리 쉽게 상대하지 못했을 거다.”
이한은 해골 교장의 말에 동의했다.
도철은 위협적이고 지독한 몬스터였지만, 하필 도철이 가진 공격 수단의 대부분이 이한에게 통하지 않는 방법들이었다.
저주도 튕겨나가고, 암흑 원소로 마력을 비활성화시키려고 해도 안 먹히고...
도철 입장에서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싶었을 것이다.
“그런 거 같습니다.”
“놈을 더 쉽게 제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으음.”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에 이한은 고민했다.
“제가 익힌 마법들을 기반으로 좀 더 고서클 마법들을 익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철 같은 몬스터에게 더 크게 데미지를 주거나, 발을 묶을 마법을...”
“반은 맞는 말이군. 틀리진 않다. 아마 올해에는 고서클 마법들을 더 익히겠지.”
“예. 3서클 마법들을 좀 더...”
“3서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5서클 마법 열 개 정도는 익혀 놔라.”
“?”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골 교장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그 정도면 소세계(小世界)의 경지에는 입문할 수 있겠지. 그걸 쓸 줄 알게 되면 도철 같은 놈들은 처리하기 쉬워질 거다.”
“힘들 것 같습니다만...”
“괜찮다. 내가 배그렉 교수에게 말해놓으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한은 다급히 대답했다.
소세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하지만 황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5서클 마법 열 개가 가능한가?’
5서클 마법은 보통 4학년이나 3학년 중에서도 손꼽히게 뛰어난 학생이 제한적으로 익히는 수준의 마법.
그걸 열 개 익히라고 하니 이한 입장에서는 황당함과 함께 꼼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난이도 쉬운 걸로 채운 다음에 어떻게든 익혀봤다고 하면...’
“아. 교장 선생님.”
“?”
이한을 검은 힘의 기둥으로 이동시키려던 해골 교장은 시선을 돌렸다.
“아까 말씀하신 제자나 분신은 뭡니까?”
“누구나 오래 살다 보면 배은망덕한 제자나 잘라낸 감정에서 태어난 분신들이 있기 마련이지. 하여간 조심해라. 그렇다고 반지 마구 쓰지 말고.”
“그게 대체 무슨 말ㅆ...”
해골 교장은 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는지 이한을 도시로 이동시켰다.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해골 교장의 모습이, 이한이 비통 산맥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 *
“헉... 헉헉.”
“멀미가... 우윽.”
플라허 시에서 가까운 들판에 떨어진 학생들은 비틀거리며 괴로워했다.
차원 관문 마법은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난이도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마법이었다.
비통 산맥에서 여기까지 보내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난이도였지만, 해골 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즉석에서 해냈다.
대신 학생들에게는 부작용이 돌아왔다. 강력한 마력 멀미였다.
자신의 체내 마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마법사에게 마력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움직이는 감각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 이한... 살려줘.”
가이난도는 거꾸로 매달린 채 이한을 불렀다. 이한은 어떻게든 해골 교장의 투명 염력 마법을 찾아낸 뒤 역마법을 걸어 해제했다.
“이한 넌 괜찮아?”
“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리고 가이난도. 그건 내가 아니라 나무야.”
가이난도가 나무를 보며 말을 걸자 이한은 몸통을 돌려줬다.
다행히 저항력 덕분에 멀미를 피해 날아온 모양이었다.
“일단 다들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자. 산맥에서 고생했으니.”
그렇게 말을 해도 친구들은 널브러져서 일어나질 못했다.
이한은 억지로 끌고 가지 말고 뭐라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마차에 좀 태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십니까?”
가도 위에서 짐마차를 몰던 마부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소년이 허름한 짐마차를 빌려달라고 하다니.
“예.”
“어느 분들이 타시길래...?”
“여기 뒤의 제 친구들입니다.”
마부는 힐끗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몇몇만 봐도 귀족 가문 출신인 게 느껴졌다.
특히 다크 엘프 소녀 같은 경우에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어서 대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가 싶었다.
확인을 끝낸 마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 안 됩니다.”
“예? 어째서입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십니까? 이건... 짐마차잖습니까.”
마부는 황당함을 참고 설명했다.
지금 거친 건초더미를 가득 실어서 달리고 있는 짐마차에 귀족 가문 자제들을 태우겠다니.
나중에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는 짓이었다.
“여기가 얼마나 거칠고 더러운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십니다.”
“아, 아니. 저희는 탈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에인로가드 출신이거든요.”
“에인로가드 출신이신 게 짐마차 탈 수 있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랍니까? 안 됩니다! 제가 크게 혼납니다!”
짐마차 마부는 넘어가지 않았다.
대가에 넘어가서 태워줬다가 나중에 귀족들이 ‘이런 더러운 곳에 태우다니!’하고 트집을 잡을까 걱정됐던 것이다.
“저희는 길바닥에서 노숙도 하고 산맥에서 야영도 할 줄 아는데...”
“그런 거짓말까지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마부는 대답하고 후다닥 도망갔다.
괜히 붙잡혔다가 험한 꼴 당할까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이한은 한숨을 쉬고 다른 마차들에게 접근했지만, 대부분의 짐마차들은 마찬가지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미, 미안해. 이한. 고귀하게 태어나서...”
“너 지금 웃고 있냐?”
“아, 아닌데?”
가이난도는 헤죽헤죽 미소가 나오는 걸 참으면서 말하다가 움찔했다. 이한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짐마차 말고 다른 마차를 빌려야 할 것 같은데, 될 지 모르겠군.”
2, 3인용의 가벼운 나들이 마차는 친구들이 다 타기는 부족했다. 이한은 조금 큰 마차가 오길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적당한 크기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한은 재빨리 마부를 불렀다.
“잠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마차에 좀 태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플라허 시에 도착하면 사례하겠습니다.”
“이 마차 안에 계신 분이 어느 분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마부는 겁먹은 목소리로 자그맣게 말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누구시길래?”
“마법사십니다!”
“저희도 마법사입니다만.”
-무슨 일이지?
안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부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태워달라고 부탁한 분이 계셔서!”
-나는 마법사요. 이래도 같이 타겠소?
“저도 마법사입니다만.”
의외의 대답에 마차 안의 마법사가 잠깐 침묵했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어느 마탑이나 길드 출신이시오?
“에인로가드 출신입니다.”
우당탕콰당탕!
마차 안에서 사람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물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들... 들어오십시오!